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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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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6. 11:20 횃불/1998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10: 노아의 영적인 진리

노아의 이야기에는 아주 깊은 영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베드로의 서신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위대한 교리들을 설명할 때, 피는 종종 우리 가운데 가장 확실히 믿은 것들이라는 예로 노아에 대한 사실을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전서 3장과 베드로후서 3장에서 그는 노아의 날과 주님의 재림시에 임할 심판을 유사하게 이끌어 낸다. 베드로후서 3장의 유효한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무서운 홍수 심판이 신속히 임했는데, 그것은 명백히 자연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경을 조롱하는 자들과 싸우기 위해 사용하며, 이 지상에 임할 최후 심판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요 미래 사건에 대한 예언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 두드러진 요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예전에 행하셨던 일을 다시 행하실 수 있다. 즉 그분은 전 세계의 인류를 심판하신다.

(2) 모든 자연을 초월하는 모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은 물 대신에 불을 사용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며, 그분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3)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그것들을 창조하고 짓는 것보다 더 쉽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의 테러주의자의 모습에서 더 분명히 보여진다. 많은 아름다운 빌딩들을 세우기 위해 놀라운 기술과 시간이 소용되었지만, 테러 분자의 폭탄에 의해 단 몇 초만에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데, 조롱하는 자들은 마침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쉽게 그 모든 것을 파괴하실 수 있고 마침내 그렇게 하실 것이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그리고 나서 그는 주의 날을 하나님의 영원한 날에 일어날 최종적인 갑작스런 파멸의 날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홍수 심판과 주의 날 사이에는 평행선이 그어진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은 홍수 직전의 날들과 주의 날의 정점을 이루는 인자의 오심 직전의 날들을 대비하여 말씀하셨다. 당시 베드로는 감람산훈화( 13:3)시에 그 자리에 있었고, 그 두 시대의 심판에 대한 주님의 비교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대목에서 그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홍수가 일어난 그 때로부터 이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곧 다가올 불 심판에 대한 암시와 그림자인 것이다. 그 두 심판에 있어서 몇 가지 유사점을 생각해 보자.

당시 사람들의 부패와 강포함이 홍수 심판을 요구할 정도에 달하게 되었고, 마침내 의로우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했다. 이제 인간의 악이 점점 더해지고 회개함이 없이 마침내 그 악이 만연되면, 그 악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루심의 원칙임을 보게 된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는 창세기 15 16절에서 그러한 원칙이 나타나 있다. 그후 400년이 지났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징계하는데 이스라엘을 사용하셨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도록 하셨다.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에서 주님은 그 가라지를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다( 13:29,30). 또한 탕자의 비유에서 그 아버지는 그의 악한 계획을 막지 않았는데, 그 죄는 여러 면으로 타락의 단계를 거듭하여 발전되었다.

하지만 회개를 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은 잘 끝나게 되었고 심판은 철회되었다. 죄에 대한 최종적인 보응에 대해, 요한은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14:15) 하고 알려 준다. 그 때 심판의 화염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천사에게 주어진 명령은 다음과 같다.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우리가 부패한 죄와 폭력과 거짓이 놀라울 정도로 만연됨을 볼 때, 정녕히 하나님의 심판의 낫이 임할 때임을 알게 된다.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미래의 죄가 증가하여 마침내 더 이상 심판이 지체될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 두 심판에 있는 또 하나의 유사성은 경건한 자들이 미리 경고했다는 것이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주의 재림에 대해 더 많이 경고하며, 경건한 자들의 목소리 또한 말세에 사는 자들에게 징조가 되고 있다. 데살로니가인들에게 한 바울의 다음의 말은 아주 적절하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14).

그들은 주의 재림을 알았는데, 바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오늘날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그 징조를 더 많이 보며 경고를 받고 있다. 주의 큰 날의 사건 이전에 임할 그 환란의 날들은 얼마나 심할 것인가! 성도들은 하나님에 의해 조명을 받은 무리에 속하며, 베드로의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날에 그들의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금 노아는 임박한 심판에 대해 사람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은 그 메시지를 들었다. 오늘날 그 예언적인 말씀은 전세계의 수천의 강단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슬프게도 복음적인 설교자들이 때로 그들의 메시지에서 주의 재림에 관한 위대한 주제를 생략할 때가 있다. 그 예언적인 말씀은 모든 민족에게 해당하며 최종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의 심판은 물로 임했는데, 베드로에 의하면 미래의 심판은 불로 임할 것이다. 주님은 단순히 지구 자체의 자원으로 지구의 멸망을 초래하기 위해 사용하신다. 오늘날 원자 폭탄과 수소 폭탄의 잠재력을 고려해 보면, 그같은 멸망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은 이제 모든 것을 파괴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불로써 모든 것을 해체하실 때, 이 끔찍한 에너지를 더 이상 속박하지 않고 사용하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3 10절에서 옛날 한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가 마치 현대의 과학자처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체질(the elements, 요소, 성분-역주)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주께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신다. 계시록은 의심할 바 없이 노아의 날에 활약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물의 천사에 대해 말하는데, 불의 천사가 또한 마지막 심판날에 불로써 맹활약을 할 것이다. 여기서 주의 날은 약 천년 동안 연장된 그 기간을 포함할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인자의 강림하심( 24:29,30)으로 시작되고 천년왕국이 끝날 때 마감된다.  최후의 사단의 반역과( 20:710), 베드로가 말한 불 심판이 있음으로 해서 천년왕국이 마쳐진다. 바울은 주의 날의 시작이 도적같이 임할 것(살전 5: 2)을 말한 반면에, 베드로는 주의 날의 끝에 하늘과 땅이 지나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날이 도래할 것을 말한다.

두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유사하게 진술되는데, 그 무서운 권위가 모든 것을 지배함으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임할 심판을 억제하거나 무마시킬 수 없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분이 지금은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붙들고 계신다( 1:3). 그리고 심판날에 모든 것을 마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히브리서 12 2527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당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남게 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것들과 새 피조물이다. 말씀의 다스리는 능력이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불신한 광야에서 방황했던 이스라엘의 경험에서 보여진다. 진노하신 주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그 세대의 모든 사람은 모두 다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되며 어떤 것도 그분의 명령을 거스릴 수 없다. 과거의 홍수 심판 때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의 세상도 미래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정책이 두 심판에 공통적이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24:39).

모든 육체와 생명있는 모든 것이 다 멸망하였다는 것이 창세기의 기록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멸망하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혹자는 그 당시에 지구상의 인구가 몇 백만 정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 때에 단지 여덟 명만 구원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울은 주님의 날에 대해 가르치면서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 마찬가지로 기록한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흘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전쟁과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인데, 그 환란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많은 배교자들을 제거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아마겟돈의 큰 전쟁은 그들의 군사력으로 수백만의 불경건한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때 주께서 영광의 보좌에 임하사 남아 있는 열국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아무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불신자들을 의미하는 염소들은 양으로 비유되는 신자들로부터 갈라내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받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임할 것이다.

노아의 날 방주가 예비될 동안 오래 참으셨던 하나님은(벧전 3:20), 이제도 주께서 그분의 교회( 16)를 지으시기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방주를 짓는 것에 대해 말한 베드로는 영적인 성전 건축인 교회에 대해 또한 말한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그 과정은 오랫동안 계속되며, 베드로후서 3 9절에 있는 다음 말씀처럼 그 긴 기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성품을 나타낸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그 홍수는 하나님의 인내의 끝과 그분의 진노의 시작점을 나타내었다. 그처럼 인자의 다시 오심도 그러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 선포자들은 이 점을 명심하여 그 때가 가까움을 알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복음을 증거하여야 한다. 그 오래 참으심의 기간은 곧 끝이 나고, 은혜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두 심판에서 하나님은 자비를 기억하시는데,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그 홍수로부터 여덟 명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은 실로 축복된 경험이다. 이와 유사하게 그 대환란으로부터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게 될 터인데, 각 사람은 그의 옷을 어린 양의 피로 씻은 자들로서 영원한 복락으로 들어갈 것이다( 7:14).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조장의 열국 심판도 그 양은 환란기 동안에 구원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나라처럼 이스라엘의 각성 또한 실현될 것이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1:26).

그 두 심판에서 구원은 공통적이다.  그 두 심판의 유사한 패턴에 관한 최종적인 한 가지 생각은, 그 두 경우에서보다 나은 세계가 출현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의 기록을 고려할 때까지 노아의 새 세계에 대한 논평을 남겨둘 것이다. 아무튼 홍수 이전의 날들과는 매우 달랐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의 약속, 언약, 예배, 통치와 보다 다양한 음식 등이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주어진 세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 때 세상은 물로 망하였거니와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지금 현재의 세상 또한 사라지게 될 것임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요한은 이에 대해 아멘으로 다음과 같이 화답할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1).

이처럼 그 두 심판 후에 옛 체제를 대신하여 새로운 체제가 형성된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몇 가지 대조적인 차이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한편에서 새 세계는 물로 나왔고, 다른 한편은 불로 나올 것이다.  노아와 새 세상은 죄와 사망이 여전히 지배했고, 새 법이 악을 억제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것은 휠씬 나은 세계였지만 완전으로부터는 한층 못 미치는 것이었다. 로마서 1장에 논평 된 슬픈 수준까지 죄가 증가되었다.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서 죄악된 세상에 곧 떨어질 상황이었다. 그같은 세상을 심판하는 대신에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공해 주셨다. 이 현재의 은혜 기간이 도입되면서 세상은 집행유예를 맞이하게 되었다. 의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대조해 보자. 모든 악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거기서는 의가 영원한 터전을 갖게 될 것이다. 의가 천년왕국 때에 통치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악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지만 반드시 억제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에 모든 것이 완전해질 것이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를 손상할 어떠한 죄와 사망과 다른 타락의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슬프게도 노아의 새 세계에 노아 자신의 술 취함의 죄가 있었고, 최소한 그의 아들 중 하나가 오염되어 또 하나의 저주가 더해졌다. 새 창조가 되고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기까지는 완전함이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노아가 말한 것과 연결하여 노아의 날에 대한 권면으로부터 그의 교훈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주목해 보자.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대해 경외함으로 움직였다. 같은 개념이 베드로후서 3 13절에 이렇게 암시되어 있다. 여기서 큰 차이점은 노아의 경우에는 두려움(경외함)에 의해 움직였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움직여 진다는 것이다. 그 때 그곳에는 진노가 있었지만, 여기에는 은혜가 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은 우리가 아는 바 자신의 자녀들을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 노아는 어떤 의미에서 미래를 두려워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기대한다.

또한 이러한 약속의 관점에서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되어야만 한다(l4). 또 다시 이러한 일들에 관해 창세기 6장에서 노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의인이었고 흠 없는 자와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흠없게 되는 것은 가능하다. 주님은 가장 미세한 부분을 보실 수 있다. 흠 없음은 사람을 향해서 이고 점도 없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창세기 6장은 다시금 동의한다. 하나님은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자라고 하셨다. ‘완전한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출애굽기 12장에서 흠없는으로 번역된 이스라엘의 양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동일한 단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노아에게 입혀진 결과였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 사람들 앞에 의롭고 하나님 앞에 흠 없게 되는 것은 그분의 곧 오심에 대한 빛 가운데서 은총을 입은 결과이다.

다시금 베드로는 17절에서 이와 같은 엄숙한 경고를 덧붙인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이제 노아는 그러한 육신의 정욕에 빠진 그들을 주께서 싫어하심을 알았지만 그 자신도 부주의함으로 동일한 문제에 빠졌다. ‘깨어 있으라하는 부분에서 노아는 실패한 것이었다. 그는 실로 자신의 굳센데서 떨어졌던 것이다. 그는 술이 취하여 자식들에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노년에 실패하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어떤 일을 잘 시작하는 것과 그것을 잘 마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노아가 그의 생애 말년에 그같은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그의 손자들에게 저주가 임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우리가 항상 전진하기를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18). <다음 호에 계속>

 

(1998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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