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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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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6. 11:21 횃불/1998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18)

죤 필립스

언급의 법칙

성구 사전을 약간만 살펴보면, 어떤 주제는 성경에 매우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 어떤 주제에 대한 진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 시대에 걸쳐 계시하셨음이 분명하다. 성경 주제의 언급을 평가할 때 3가지 기본 원리가 있다.

 

1. 처음 언급의 법칙

무슨 주제든지 성경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때가 매우 중요하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그 주제가 성경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갖는지에 대해 암시해 주신다.  예를 들어보자.

왕이 맨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장이다. 맨 처음 나오는 왕은 시날 왕 아므라벨인데 아마 수메르의 유명한 왕 함무라비인 것 같다. 함무라비 법전은 비록 그 후 시대인 모세의 율법 보다는 못해도 당시 법률 상황을 잘 알려주는 법전이다. 창세기 14장에는 열 명의 왕들이 언급되는데,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왕들은 서로 전쟁 중이었다(전쟁이 맨 처음 언급되는 곳도 여기다. 따라서 인류의 무서운 두통거리인 전쟁과 믿는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열명의 왕 중 한 왕만 의로운 왕인데 그는 맨 끝에 나온다. 그의 이름은 멜기세덱이다. 그는 왕이자 제사장이며 의()의 왕이자 평화의 왕이다. 멜기세덱은 구약에 있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모형 중 하나다. 멜기세덱이 이 장()의 맨 끝에 나오듯이, 진정한 왕이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도 모든 다른 왕들이 전쟁과 죄악 때문에 무대에서 사라질 때 나타나실 것이다. 이 창세기 14장에 모든 인류의 역사가 암호 형태로 숨겨져 있다.

또한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사장, 떡과 포도주, 십일조가 언급되었다. 이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제사장은, 비록 그들이 구약 전체의 제사장직을 차지하는 아론의 반차를 따른 의식적(儀式的)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점이다. 율법은 레위 족속과 아론의 후손에게만 제사장 직분을 주고, 예수님은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아론보다 훨씬 더 오래된 멜기세덱 제사장 직분에서 나온 더 뛰어난 제사장 직분인 것이다(저자의 히브리서 연구’<Exploring Hebrews, 무디 출판사> 참조).

사랑이 처음 언급된 곳은 창세기 22:2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이다. 이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다. 두 번째로 나오는 곳은 창세기 24:67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이다. 이는 아들의 신부에 대한 사랑이다.  둘을 함께 살펴보면, 사랑에 대한 이 두 언급은 시간과 영원을 연결시키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신랑되신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

이집트는 성경에 약 600번이나 언급되나 그 첫번 언급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있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12:10)가 그 처음이다. 애굽은 성경이 상징적으로 사용할 때는 세상, 세상의 체제, 사람의 삶, 하나님을 떠난 사회 등을 의미한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애굽이 그러했듯이 세상의 부와 지혜, 정치와 종교, 문화와 격조 등으로 세상은 믿는 사람에게 올가미가 된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사라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신의 영적 생활을 희생하는 대가로 부자로 살며, 간증들 잃어버리고,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도망치듯 애굽을 나오는데, 이 때 데리고 나온 하갈은 몇 년 후 그에게 그 이상의 올가미가 된다. 따라서 애굽이 처음 언급된 곳에서 보자면 세상은 믿는 자에게 올가미와 위험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애굽에 있는 아브라함은 축복이 되지 못하고 저주가 된다.

이처럼 바벨론이 처음 언급되는 곳도 의미심장하다( 10:10). 바벨론은 위대한 반역자 니므룻이 세운 성이다. 그 다음 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초기 역사는 바벨론이 어떻게 해서 세계 최초의 국가 연합의 중심지, 하나님을 배제한, 계획된 사회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특성상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이 전부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의 절정이 될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을 모독하는 정치, 종교 체계의 중심이 될 바벨론을 이 첫 바벨론이 소규모로 보여준다.

 

2. 계속 언급의 법칙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성경에서 점진적으로 계시하시며, 사람을 영적 유아기를 거쳐 신약에 있는 진리와 성숙된 관계로 양육시키시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계시가 진전되는 속도가 다양할 뿐이다. 구약에서는 그 정도가 대체로 느리고 약 400년간의 중단으로 끝난다. 신약에서는 계시의 진전이 빠르기 때문에 세기가 아닌 연() 단위로 측정해야 할 정도이다. 계시 방법은 이사야서에 나와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한다”( 28:10).

하나님께서 계시 과정을 처음에는 뒤에 쳐지고, 방향도 모르고, 넘어진 달리기 경주, 그래서 달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경주인 것처럼 느릿느릿 하셨다.  구약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계시의 유아용 그림책이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예화, 모범, 모형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가르치셨다. 제사, 성막, 성전, 제사장 의식, 율법의 자세한 명령, 역사의 교훈, 수많은 인물들의 전기, 이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초기에 가르쳤다.

하나님의 진리의 점진성을 보여주는 많은 예가 있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는 ”, 즉 메시아와 관련된 밝혀진 진리를 살펴보자. 처음에는 다만 여가의 후손”( 3:15)으로만 계시되었다. 이 이상한 말 속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나서 메시아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이 계시된다. 후에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리라”( 21:12)로 되어 이삭으로 좁혀진다. 리브가의 태에서 쌍둥이가 싸울 때, 리브가는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25:23)라는 말을 듣는다. 따라서 에서가 아닌 야곱 계보가 되고, 야곱은 자기 아들 중 유다를 통해 그 가 올 것을 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49:10).

홋날의 계시에서 초점은 다윗에게 맞춰진다.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13).

에 관한 이 모든 점진적 계시와 함께 메시아의 생애와 관련된 다른 계시가 나오고 그분의 고난과 뒤에 올 영광에 초점을 맞춘 예언도 나온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약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게 된다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은 성경 해석자들에게 중대한 과제를 안겨준다.  성경의 어떤 구절에 접근할 때마다 역사적 타당성이라 부르는 감각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무엇은 믿을 수 있고 무엇은 아직 아닌가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모세 시대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은 알았으나,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은 훨씬 후에야 계시되었기 때문에 몰랐다. 다윗은 포로와 귀환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구약 성도 모두 교회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구약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타당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한다.

신약의 일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5).

이 구절을 들어 세례 받아야 거듭난다는 교리를 주장하면 너무 지나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침례에 관한 진리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구절과 의미가 어떻든 간에, 그리스도인의 침례를 가르칠 수 없다.

이 부분의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혹은 주님께서는 에스겔 36:25을 말씀하셨다. 혹은 육체의 탄생을 간접적으로 가리킨 것이다 등등. 그러나 어느 설명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러므로 역사적 타당성의 법칙으로 돌아가보자. 문맥상 이 단어는 니고데모에게 무슨 뜻이었을까?

그 당시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최우선적인 사건은 세례 요한의 사역, 요단강에서 베푼 그의 물세례였을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이스라엘 전 민족에게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으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백성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산헤드린이 그의 세례를 조사해 보고는 그와 그의 세례를 모두 거절해버렸다. 그가 바리새인과 그들의 위선에 대해 혹평하는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이 새로운 선생이 와서 세례 요한이 했던 것과 똑같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찾아왔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된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성령으로 세례 줄 분을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세례 요한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도 세례 요한을 거부한 산헤드린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네가 세례 요한의 세례(즉 회개)와 성령 세례(즉 거듭남)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역사적 타당성의 법칙으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의미를 가진 성경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침례를 잘못 끌어내지 않을 수 있다.

 

3. 전부 언급의 법칙

믿음과 영적 생활에 관한 필수적인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항상 말씀 가운데서 여러 방면의 교훈으로 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언급해 놓으셨다. 예를 들어 에 관한 교훈( 3), 미래에 일어날 일들( 24, 25), 사랑(고전 13), 부활(고전 15), 교회( 2, 3), 이스라엘의 회복( 11), 그리스도의 본질( 1, 2), 믿음으로 의롭게 됨( 3, 4), 율법( 20), 믿음으로 행함( 11) 등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예언을 모아 놓은 마태복음 24, 25장을 보자 이 부분을 다음의 개관을 따라 살펴보자.

 

1. 시대의 진행-마태복음 24

1) 민족들과 관련된 사건들(24:414)

(1) 마지막 날들의 괴로운 문제들(24:48)

① 민족적 재앙(24:4,5)

② 자연의 재앙(24:68)

(2) 마지막 날들의 무서운 핍박(24:9,10)

(3) 마지막 날들의 다른 신념들(24:1113)

① 거짓 선지자들(24:1113)

② 신실한 전도자들(24:14)

2) 유대 인과 관련된 사건들(24:1539)

(1) 예언된 일들의 흐름(24:1522)

① 예언된 위험(24:1522)

② 예언된 기만(24:2326)

③ 예언된 구원(24:2731)

(2) 예언된 일들의 시간(24:3239)

① 무화과-비유-(24:3236)

② 홍수-모형-(24:2739)

3) 교회와 관련된 사건들(24:4051)

(1) 그리스도인의 휴거(24:4042)

(2) 기독교계의 휴거(24:4351)

2. 시대의 완성-마태복음 25

1) 유대인을 위하여(25:1 13)

2) 교회를 위하여(25:1430)

3) 민족들을 위하여(25:31 46)

 

이 간단한 분석표만 보아도 미래의 사건에 관한 이 진술은 포괄적일 뿐 아니라, 설교 형태로 배치되어,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로 인류를 삼등분 했을 때 각각의 입장에서 미래를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사이의 기간에 있을 미래의 사건들의 전범위를 요약해 놓고 있다. 마태복음 24:114을 요한계시록 6장의 인()을 뗐을 때 일어나는 사건과 비교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더군다나 그 이전의 예언적 계시, 특히 다니엘서의 예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교회와 관련된 사건들이 마태복음 24장의 끝에 나온다는 사실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설교상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교회가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히 나와있다. 주님은 이곳에서 마지막 때의 사건을 설교 형태로 다루고 계신다. 우선 이방 민족의 관점에서 마지막 날을 보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보고, 마지막으로 교회의 관점에서 마지막 때의 예언을 하신 것이다. 각각의 주제는 주제별 설교에서처럼 따로따로 다루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를 설명하신 이 종말론에서 교회를 배제하는 극단적 견해를 따를 필요는 없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와 관련된 포괄적인 설명을 하시면서 주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교회를 빼놓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주님께서 역사적 순서를 따라 이방인, 이스라엘, 교회를 설교의 토대로 삼으셔서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맨 나중에 내오셨다.”<다음 호에 계속>

 

(1998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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