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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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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8. 11:00 횃불/1999년

도망친 노예()(3)

빌레몬에게 쓴 바울의 편지

― 제 1 부 복 음 ―

R. H. 사익스

(3) 보증자

보증자는 그의 재산이나 생명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응해주는 사람이다. 다른 말로 빚진 자나 옥에 갇힌 자, 범죄로 죽어야 할 자를 자발적으로 대신한다. 그는 대리인이 된다. 그는 형벌을 받고 범죄자는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바울은 그림 가운데로 들어간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마음에 큰 짐을 지고 있었다. 그가 주인과 화해하고 용서받는 것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빚은 갚아야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져야 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용서받게 하려고 이 편지를 썼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공의가 어떻게 자비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은혜가 어떻게 공평을 나타낼 것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고 어떻게 잘못된 것이 옳게 될 수가 있는가?

오네시모가 도망친 적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빌레몬에게 빚진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거짓이다. 그 문제를 단순히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진리는 사실이며 많은 거짓말이 진리를 바꿀 수 없다.

오네시모가 도망친 동안 다른 종들은 오랫동안 힘들게 일하였는데 그를 그냥 가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면 불공정하다. 그가 진짜 죄를 지었는데 무죄하다고 하면 이는 불법이다. 악한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일부분만 거짓이어도 바르지 못하다. 불공평함은 잘못이다. 불법도 잘못이다. 불공정함도 잘못이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의롭지 않다. 그래서 바울의 문제는 바로 이렇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은 채 옳지 못한 것이 옳게 될 수 있는가?”

이는 우리에게 더 큰 문제를 제기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한 죄인을 용서하실까?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공의를 포기하는 관대함이 아니다. 죄를 지나치는 관대함도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이는 그분이 언제나 의로우시다는 뜻이다. 그분은 항상 의로운 일을 행하신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신다. 잘못된 것은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잘못된 것을 행하실 수 없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온전히 공의롭다. 그런데 그분이 어찌 악한 자를 선하다고 하시는 잘못을 범하실 수 있을까? 그분이 어떻게 범죄한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을까? 그분이 어떻게 존재하는 범죄를 간과하실 수 있을까? 결코 할 수 없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잘못된 일을 행하실 수 없다.

 

그렇다면 죄 지은 자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실 수 있을까?

여기서 주님은 바울을 가장 놀라운 그림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증자로서 그 틈새로 들어간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18, 19)라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사랑스러운 말씀을 보라. 어떤 사랑인가! 어떤 은혜인가! 그러나 잘 살펴보면 바울의 사랑이나 은혜에는 불공평함이 없다. 그는 빌레몬의 호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친절한 마음과 관대함만을 요청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네시모의 죄와 잘못을 인정한다. 그것을 숨기거나 지나치려 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것을 바로 밝은 데로 가져온다. 그는 오네시모가 행한 잘못을 언급한다. 그가 진 빚을 말한다. 그는 오네시모가 무익하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요일 1:5). 그분은 죄를 지나치실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한 요구를 언급하는 순간, 바울은 그 요구를 떠맡게된다. 바울은 보증자로서 내가 빚을 모두 다 갚겠다.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하라고 한다. 오네시모의 모든 잘못과 빚은 바울에게로 담당되어졌다. 그래서 범죄한 자는 자유로울 수 있는데 이는 보증자가 그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장부를 기록해야 한다. 그 장부는 물건들이 소유주나 회사에 의해 수급하는 돈을 적은 기록이다. 이런 장부들은 사업을 경영하는데 비용이 어느 정도며, 얼마나 이익을 보며 손실이 있는 지를 보여 준다. 장부들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장부의 기록에 대한 기본 법칙은 다음과 같다. 모든 차변(借邊)과 대변(貸邊)은 같아야 한다. 그들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지불계정’(支佛計定)이 동일하지 않으면 신용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장부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장부들은 우리가 죄에 대해 지불할 비용을 보여준다. 우리의 계산이 청산되거나 균형을 이루었다면 동일한 비용으로 신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갚을 수 없다면, 그와 상관된 지불계정은 다른 사람의 계산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쓰기를 오네시모가 빚진 모든 것은 내게로 회계하라. 그러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빚은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게 갚아졌다. 이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공정하고 올바른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관한 복음의 진정한 본질이다. 참된 보증자는 우리의 찬양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대리인)가 되셨다. 이사야 53 5절에서 이를 어떻게 기록하는지를 보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위대한 거래를 하셨다. 고린도후서 5 21절에서 그분은 죄가 없으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분으로 죄를 삼으셔서 우리로 하나님께 의가 되게 하셨다고 한 것을 읽는다. 비교한 것들을 주목하자.

그리스도는 의로우시고,

우리는 불의하다.

그리스도는 죄 없으시나,

우리는 죄인이다.

그리스도는 순전하시나,

우리는 부정하다.

그리스도는 빛이시나,

우리는 흑암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나,

우리는 죽은 자였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불법을 당하셨고,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셨고, 우리는 용서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로 부정하게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피로 깨끗케 되었다.

그리스도는 흑암을 겪으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빛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으나,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었다.

 

또 바울은 다른 방식으로 대비를 보여 준다. 고린도후서 8 9절을 보자.

그리스도는 부요하시나, 우리는 가난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로 그분 안에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이 위대한 거래를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셨으므로 그분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3).

그러한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실 수 있는 그분의 지혜가 얼마나 깊은가!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신, 이러한 값을 기꺼이 치르신 그분의 사랑은 얼마나 큰가! 오네시모와 같이 무익한 죄인,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행하신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스도인이 이런 구주를 찬송하며 사랑하는 일은 당연하다. 어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매우 아름답게 이를 나타내었다.

 

  나를 위한 사랑은 이것이니

곧 나무에 그분을 못 박고

고난 가운데서 돌아가시니

모두 나의 죄 때문이라.

나의 큰 죄와 저주로

위대하신 구속주가 오셨고

기꺼이 수치를 지셨으니

나의 모든 죄의 몫이라.

 

어느 날 갈보리 언덕으로

주께서 끌려가시니

아무도 갚을 수 없는

나의 모든 죄 때문이라.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죽임을 당하사

고통 가운데서 생명을 주셨네.

지울 수 없는 얼룩을 지셨으니

나의 모든 죄의 몫이라.

 

사랑이 어찌 그리도 강했던가?

죄악은 얼마나 불의하였던가?

예수께서 오랜 고통을 당하실 때

나의 모든 죄를 위하심이라.

그분께서

나의 가장 큰 필요를 보셨으니

진정 나의 친구가 되심이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 자유케 되었으니

나의 모든 죄로부터라.

 

, 놀라운 구주는 내 것이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짜여지고

그분의 사랑은 결코 쇠할 수 없으니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심이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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