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12. 8. 11:02 횃불/1999년

내 소중한 밧줄을 놓았을 때

천 선 영

오늘이 오기까지를 정말로 두 손 모아 기다렸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제가 경험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구원으로 이어지게 된 저의 체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소위 한국에서 말하는 절실한 장로교회의 장로의 1 4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거의 어린 시절을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가끔 큰 언니가 내뱉던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불만을 저는 잘 이해를 못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별다른 불만과 의문 없이 나름대로 교회를 잘 다녔고, 봉사활동도 했고, 교회에서 건축헌금도 많이 하시는 재정부 장로님의 막내딸로 여기 저기서 귀여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은 예쁘게 옷 입고 온 식구들과 교회에 가는 날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그 교회는 장로교라 율법을 첫째로 생각했고 구원이라는 단어는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무엇인지를 그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니던 교회도 아버님의 병고로 나중에는 잘 가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가 항상 중학교 때부터 생각해 왔던 유학을 결심하고 어머님과 언니들의 향토 장학금으로 무사히 학교도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졸업하게 되었고, Ph.D., M.D. 코스로 뇌수술 박사(신경외과 전문의)를 꿈꾸는 남자 친구도 사귀었습니다. 저의 생활은제가 계획했던대로 너무나 잘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미국에선 패션 비지니스(Fashion Business)를 공부했기에 일도 원하는 직장에서 할 수 있었고, 소위 말하는 세계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들과 모델들과 같이 어울려 파티에 가곤 했습니다. 친구들도, 식구들도 모두들 나에게 거는 기대가 켰기 때문에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다 잘할 수 있어, 내가 열심히만 하면 다 이루어질 거야.’ 매사에 그런 태도였습니다.

3년 이상을 주위에 친척 한 분도 없이 뉴욕생활을 했지만 외롭진 않았습니다. 항상 내 자신을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겠습니다. 왜 그랬는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라는 유혹을 많이 받았지만, 훌륭한 패션 사업가로서, 의사의 아내로서의 나의 계획을 세우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이루어졌고 저의 욕심과 야망은 거의 하늘 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제가 처음 구원의 말을 전해들은 것은 결혼하기 바로 전, 저의 큰 언니 되시는 이나영 자매님으로부터였습니다. 큰 언니는 유별나게 예뻤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 그런지 좀 별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의 결혼식으로 인해 공항에 마중 나가 언니를 자동차도 모셔오는데 차 안에서 언니는 제게 써니야, 너 구원받았니?” 라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왠 홍두깨비 같은 소리를! 속으로는 교회를 다녀도 언니보다 더 잘 다닌 나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굉장히 놀랐지만 좋은 변화려니 하고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에 걸쳐 이어지는 언니의 구원에 대한 간증은 우리 식구들로 하여금 반발을 일으켰고, 저의 짧은 생각으로 캐나다의 공부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사람이 변해도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하며 불쌍한 큰 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 한 구석엔 그전에 보지 못한 언니의 평온함과 무슨 빽인지는 모르지만 악어빽보다 비싼 빽을 가지고 있는 느낌을 알지 못하게 느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언니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밴쿠버(Vancouver)로 가야 했고 저의 식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이전에 한국에 있을 때의 교회생활과 미국 생활 속에서의 교회생활을 비교했고, 결론 내리기를 내가 내 생활에 너무 바빠서 교회 봉사활동을 못했다는 생각 끝에 목사님의 권유로 유년부를 가르치기로 결심한 후에 너무나 마음이 뿌듯해서 아마도 큰 언니가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했습니다. 언니는 봉사(奉事-소경)가 봉사(奉事-소경)를 가르치면 어떻게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너의 죄는 클 것이라며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누구보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피를 같이한 자매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에 화가 났습니다.

그 후에 저의 둘째 언니가 구원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둘째 언니는 미대교수라 항상 자기 의견이 논리 정연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항상 잘 어울렸습니다. 저랑 같이 큰 언니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둘째 언니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하면 뭐, 이 때까지 그랬는데, 잘 살고 있는데 뭐하면서 혼자서 나 자신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욕심으로 저것도 없는 것보다 낫겠다, 어떻게 가져볼까, 항상 궁리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1997 9월 쯤에 저를 이삼년간 지켜보시던 한국 봉제공장 사장님께서 의류제품 생산(manufacture)에 꿈을 안고 저와 같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도 자기사업(own business)보다는 못할 거라는 짧은 생각과 내 이름으로 훌륭한 브랜드(brand)를 만들겠다는 욕심에 50/50의 동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직접 디자인과 생산과 판매에 신경을 써야 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조여 오는 나의 몸과 정신은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잘 오지 않고, 정말 세상의 온 짐을 다 진 것 같이 6개월간을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뿌듯하긴 했지만, 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큰 언니로부터 꿈에 내가 그렇게 보인다고 한 번 오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언니는 저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무척 노력했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주었지만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언니는 아주 급했던 모양이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질까 하면, 언니는 한국에 돌아가야 했고, 저는 여태껏 혼자였기에, 별로 무엇인가를 절실히 구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큰 언니는 캐나다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곳이 고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밴쿠버로 해서 저희 집에 왔습니다. 저의 집에 밤 11시쯤 도착했는데 오자마자 전화를 붙들고 꼭 연락해 야할 분이라며 제 수첩에 그분의 연락처를 크게 쓰는 것이 아니겠어요? 통화를 하면서 정형제님, 정 자매님을 외치며 반갑다고 난리였습니다. 언니의 그런 행동들이 이상했습니다. ‘내가 자매이고, 내 동생이 형제이지 왜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한데 저렇게 친한 척을 할까.’ 더군다나 언니는 새침한 데가 있어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유별나게 그분들에게는 친한 척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제 회사로 정 형제님, 오 형제님께서 오셨고 3시간에 걸친 구원의 간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참 호감이 가는 말씀들이었지만 제가 느껴보지 못했기에 그 구원에 대한 기쁨을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저는 형모 형제님께 여쭈었습니다. 시간은 금이라고들 하는데 왜 당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저를 위해서 1시간씩을 그렇게 목이 아프게 말씀하고 계시냐고요? 형제님께서 제가 공짜로(거저) 받은 구원의 기쁨을 나누고 싶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께 합당하다고 대답하셨을 때, ‘그렇게 좋으면 혼자 가지고 있지, 왜 나누려고 할까? 세상엔 별 희한한 사람도 많다더니?’라고 짧은 생각을 했습니다.

언니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길을 잃고 헤매는 제가 너무 불쌍해 보였던 모양인지, 정 형제님과 오 형제님을 만나게 해 주셨나 봅니다.

정형모 형제님 댁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말씀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지요. 일분 일초를 남을 위해서 쓰기 싫어했던 나, 주일이면 한 시간 동안을 아이들이랑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던 나, 많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였지만 말씀 교제 중에 주님이라는 분이 계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던 저로서는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일까?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면 그냥 사 버릴 수 있을텐데.’

그 때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을 묵상하노라면 이상한 무엇인가가 저를 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점점 주님께 가까이 하길 원하면 원할수록 더해지는 그 고통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갖는 말씀 교제시간은 얼마나 좋은지, 일도 뒤로하고, 그 날이, 그 시간이 빨리 오기만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안과 안정과, 항상 홀로서기를 외쳐 주장했던 나 자신과는 틀리게 철부지아기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 교제가 끝나면 자매님들의 요술장이 같은 음식솜씨로 차려진 큰 저녁식사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실까 하는 믿음에서 주님께선 날 구원해 주신다는 강한 믿음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998년 4월 28, 다른 날과 똑같이 전철을 타고 퀸즈(Queens)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암흑 속에, 긴 밧줄 끝에 제가 대롱대롱 매달러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밧줄을 놓고 싶었지만, 만약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그 밧줄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밧줄에는 여태껏 내가 내 힘으로 잡아온 명예, 지위, 학벌, 남편, 가족, 친구 등이 큰 포도송이처럼 엉켜서 매달려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놓아버릴까, 놓아버릴까, 거듭 생각했지만 무서웠습니다. 다룬 한편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앞으로 들어가 자유함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런 무겁고 병든 내 자신을 이끌고 오늘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태도로 말씀 교제에 임했습니다. 지금도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병든 마음을 안고 너무나 절실히 회복되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형제님과의 교제 중 저는 그 밧줄을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그 보혈의 피로 내 죄를 씻어주셨음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약간 어찔했습니다. 꼭 잡고 있던 밧줄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급속도로 죄의 속박에서 저는 떨어지고 있었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환한 빛이 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품속에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안겨있는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 자매님께서 써니씨”, “써니씨”, 하는 소리에 저는 정신을 바로 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형제님의 얼굴이 너무나 멋있게 보였고, 자매님의 미소는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는 듯했습니다. 우린 모두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주님과의 첫 사랑을 맛 본 저로서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그 날 밤에는 잠을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말씀, 요한복음, 로마서를 다시 보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다시금 새겼습니다. 머리로만 알던 나의 지식들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마음 한 복판에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직장 일을 최고로 생각하여 집에까지 가져와서 일하던 나, 한 번도 수요집회를 참석하지 않았던 나, 남편과 동등함을 외치고, 여성 상위시대를 주장하던 나, 정말 부끄럽고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아직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신 여러분, 구원의 참 기쁨을 느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께 매달리세요. 두드리세요. 우리 주님은 열어주십니다. 저 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너무 아기입니다. 하지만 먼저 구원받으신 형제 자매님, 우리 좀 더 주님에 대해서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 큰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고 그냥 기뻐만 하면 안될 것 같아요.

제가 수요 말씀집회를 참석하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여태껏 머리로 느끼던 주님의 사랑을 이젠 온 몸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너무나도 무식했던 내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 마음이 저려와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미리 아셨던 주님, 그러면서 만찬을 준비하셨던 주님! 어느 모임에 가든지 우리 뉴저지(New Jersey)모임은 제가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기에서 다시 태어났거든요.

 

(1999 2월호)

 

'횃불 > 1999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그의 생애와 그 시대 (17)  (0) 2014.12.13
그리스도인의 실수  (0) 2014.12.08
영원한 구원(3)  (0) 2014.12.08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0) 2014.12.08
도망친 노예(종)(3)  (0) 2014.12.08
말씀의 올바른 해석(25)  (0) 2014.12.08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1)  (0) 2014.12.08
하나님의 가족  (0) 2014.11.1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