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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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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3. 21:34 횃불/1999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18)

 사무엘 W. 제밍스

노아는 가장 놀라운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에 상응하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위대한 사람 중에 한 분이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이 그에 대해 그토록 자주 언급한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는 끔찍한 악과 도덕적 오염으로 둘러싸인 가장 충격적으로 사악한 시대에 살았지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무려 오백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 가운데서 전진했다. 신실한 믿음 가운데서 전진하는 것은 주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의 바라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오래 살 수가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6: 9).

또 다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세기의 네 장에서 노아에 대한 기록을 상고해 볼 때, 우리는 실로 매우 다재다능한 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는 베드로에 의해 의의 전파자로 불리웠다. 그는 매우 바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파할 시간을 내었다. 우리는 그가 그의 모든 것을 그의 메시지와 설교에 쏟아 부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정교하고 성실하게 준비된 훌륭한 설교가 사람들에게 제시되었고, 그 증거를 신실하게 계속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꾸준히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가 전하는 소식에 대한 사람들의 무반응으로 인해 그는 낙심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그의 직업적인 일도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상관 없이 바로 그 자체로 큰 만족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또한 건축에도 뛰어났는데, 처음에는 방주를 나중에는 제단을 지음으로 건축가로 불리울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 3절에서 건축가들에 관해 말했는데, 그 자신도 건축가였다. 그는 터를 닦아두어 그 위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모임들을 세우기 원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였는데, 다만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매우 주의가 요하는 중대한 책임이 있음을 가르쳤다. 그같은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 건축물이 잘못된 재료와 설계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노아의 건축물인 그 방주는 가장 극심한 조건의 시험에도 건재하였다. 우리 또한 노아처럼 그러한 견고한 건축물을 짓도록 하자.

여기에다가 그는 능숙한 자였음을 덧붙일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그 구조를 따르는 것은 대단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기초나 윤곽을 잡는 것과 균형을 맞추는 것은 거친 파도에 견디기 위해 견고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완성된 방주를 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 놀라운 솜씨에 감탄했을 것이다. 재능은 제단을 지을 때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데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그 당시는 그러한 구별에 대해서 주께로부터 직접적인 지시가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더욱 놀랍다. 즉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정하고 부정한 짐승에 관한 언급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주께서 성도를 세우시고 새롭게 하심으로 모임을 지으시는 이 기술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닦아둔 그 기초 위에 각 사람이 어떻게 세울 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고린도 성도들은 성령으로 하지 않고 육체로 지었다. 그들은 성령의 가르침에 의한 지혜가 아닌 세상의 지혜로 믿는 성도들을 지으려고 분주하게 일했다. 정말로 그들은 거룩한 진리 가운데서 장성하게 자라나지 못했고 영적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5:13).

젖은 성도들을 강건하게 서도록, 은혜를 깊이 인식하도록 이끌 수 없는 유치한 사역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술은 오직 하나님의 학교에서 받은 훈련으로부터 만이 가능하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식욕을 가지고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다. 말씀을 연구할 시간을 가지게 되면, 그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가르치는데 능숙하게 된다.

우유는 고린도전서 3장과 히브리서 5장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젊은 신자에게 필요한 단순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더 깊은 진리들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너무 어리기에(벧전 2:2), 우유와 같은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성도들이 더욱 성숙하여 고기와 같은 말씀들도 즐길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그 두 구절 사이에는 슬프게도 대조되는 것이 있다. 고린도전서 3 1-4절은 바울이 성장의 결핍에 대해 꾸짖는 말이다. 반면에 히브리서 5장은 성장하였지만 뒤로 물러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고린도 성도들은 때가 오래되었고 가장 좋은 선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력이 젖을 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히브리 성도들에 대한 경고는 한층 더 심각하다. 그것은 슬픈 상태였고 모두에게 주는 경고였다. 말씀에 대한 지식은 상실할 수 있는데, 만일 주님의 것들 가운데서 계속 나아가며 성장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뒤쳐지게 된다. 주께서는 이러한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29).

결국 이 원리는 바로 학생이 말씀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부피가 많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곧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곧 그 메시지가 낡은 것임을 간파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을 고려해 볼 때, 노아는 실천의 사람임이 입증된다. 주님은 매우 활동적이었고 사도들도 그러했다. 기독교의 근본은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 주님이 요한복음 13 17절에서 말씀하셨다. 그분 자신이 친히 그러한 삶의 놀라운 본이 되셨다.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누가는 주님의 사역을 묘사하였다( 1:1). 엠마오의 길을 가던 두 제자도 그는 일과 말에 능한 자라고 말하였다( 24:19). 복음서에 보면 종종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러한 순서로 행하셨음을 볼 수 있다. 예를들어 요한복음 6장에서 그분은 오병이어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신 후에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또 다시 8장에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후 그분이 세상의 빛임을 선포하셨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성격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복음을 말로 전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노아는 가족의 일원이었지만 그같은 바쁜 삶 가운데서도 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에게는 한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들이 있었다. 얼마나 자주 주의 종들이 그들의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방해를 받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자신의 나태함에 대한 많은 핑계거리로 삼고 자신의 많은 실패를 자식들과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지 모른다. 아담이 최초로 그렇게 한 이후로 많은 남자들이 그러한 핑계를 해왔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이러한 말로 자신의 실패가 자기 아내 때문이라고 전가하였다. 노아는 아담의 길에 서지 않았다. 그는 그 집의 가장이었으며 그의 아내와 그의 자부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가족들을 돌보느라 분주했을 것이지만 매우 근면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어떠한 책임도 회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자녀들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었다. , 엘리, 사무엘 그리고 다윗 조차도 가족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또한 노아를 존중해야 한다. 그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를 섬기며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에게 가장 귀한 장점 중의 하나였는데,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우선순위를 가진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4:15).

노아의 순종은 창세기의 기록에서 상당히 주목된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6: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7:5).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9).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7: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가 나왔고”( 8:15-18).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다 준행하였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몹시 기쁘시게 하였다.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사람을 위한 위대한 첫 축복이다. 구원은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교리를 마음으로부터 순종할 때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성도들이 경험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서 6장의 가르침과 같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주님을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모든 신자들을 구속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16,17).

노아의 삶에서 순종이 놀랍게 드러난 것처럼 모든 신자들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는 또한 인내심이 강한 사람임에 틀림 없다. 방주를 짓는 데 있어서 그의 인내심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오늘날 같은 현대적인 도구가 없었던 당시에 그 일은 매우 끈기를 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무를 다듬고 알맞게 자르고 각각의 못도 만들어야 했다. 그는 수개월이 지나서도 매우 미미한 결과밖에 얻지 못했을 것이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며 재료를 준비하는 일만도 수개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는 또한 전파하는 일에도 부지런히 하며 인내했을 것인데, 수년동안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수주 혹은 수개월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았고 전파하는 자체에 대해 회의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방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인내하며 그렇게 했다. 성경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실패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렸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때라고 스스로 여겨 기다리지를 못했다. 사실 그는 사십년이 너무 짧았다( 2,3). 다윗은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짓고자 했는데(삼하 7), 그것은 시기상조였다. 결국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자신이 직접 여호와께 제사를 드림으로 그 왕국은 상실했다(삼상 13). 이것은 심지어 가장 거룩한 사람들 조차도 흔히 실패하는 것으로 그 예들이 성경 전반에 나타나 있다. 인내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빨리 갖고 싶어하고,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노아는 이러한 주목할 만한 인내로 주님께서 받으심직한 사람이었다.

이 면에 있어서 주 예수님의 본이 성경의 예언적인 말씀에 보여진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이 데살로니가후서 3 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개정역(RV)은 마지막 절을 그리스도의 인내 안으로라고 번역되어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분의 재림에 대한 언급이 아니고 그분의 성품에 관한 것이다. 그분은 지상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인내를 보이셨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분은 자신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의탁했으며, 그분의 아버지가 마침내 모든 것을 그분의 뜻 아래로 복종케 하실 것을 알았다. 이제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 노아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놀라운 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고, 심판의 때까지 분명히 기다렸다.

그가 나중에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데서 그는 또한 농부인 것 같이 보인다. 그토록 오랜동안 방주 안의 수많은 생물들의 필요를 채울 양식을 사기에는 그에게 역부족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거의 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의 농사짓는 능력으로 필요한 많은 것들을 수확했을 것이다. 가축을 돌보는 것 또한 농부의 일인데, 그는 방주 안에서 많은 동물을 돌보았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를 동물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어떤 동물원도 노아의 방주처럼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지는 않다. 그는 그들을 돌보며, 먹이고, 그 우릿간을 청소하고, 그 동물들을 키우는데 따르는 많은 어려운 일을 해야 했다. 한 방주 안에 야생 짐승과 육축이 함께 있었다. 이것이 방주에 대해 어린이들이 매혹되는 이유인데, 바로 사자와 다른 야생 동물들이 모두 노아의 돌봄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노아는 방주 뿐만 아니라 제단도 지었다. 그는 성경에 제단을 쌓은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8:20).

그런데 이것은 최초의 건축이며, 이전에 다른 것이 없었기에 그는 기술이 있는 사람임이 자명하다. 그는 주께서 제단으로부터 향기를 맡으시고 기뻐하심을 알았다. 후일에 성막의 번제단의 모형이 상세히 주어졌고, 모세는 산에서 보이신 모형대로 그 모든 것을 짓도록 경고함을 받았다. 그 제단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었다. 그의 제사로 인하여 지상의 미래와 약속을 연결하는 노아의 위대한 언약이 세워졌다.

그는 이처럼 제사장 역할을 했다. 그는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였다. 그의 예배는 하나님께 기꺼이 열납되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8:21).

이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중심에 다다른 예배였고 열납된 예배였다. 후세대에 제사장은 율법에서 매우 정교한 기술이 요청되었고, 그는 여러 종류의 희생제물에 대해 익숙해야 했고, 유대력에 의한 여러 절기에도 익숙해야만 했다. 노아 당시의 의식은 보다 단순했지만 그는 마찬가지로 제사장이었다. 오직 주께서 자신을 계시하여 주실 때에만 제사장의 봉사를 할 수 있다. 모세는 성막과 그 모든 율법의 세부적인 것을 보았다. 그처럼 여기 다가올 홍수에 대한 계시가 주어졌다. 방주를 지을 상세한 지침과 더불어 주님과 노아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

게다가 그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인 의미인데,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노아의 영성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분별하는 그의 능력에서 보여진다. 그는 어떻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었을까? 그가 이전에 그러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름다운 영적인 직관을 가졌을 것이다. 이 주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가 정원사로 보인다. 그는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농부가 되었다. 그는 이제 늙었다. 그는 인생에서 참 많은 것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해야할 일을 찾았다. 이것이 성경에서 포도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인 점은 흥미롭다. 그 포도주로 인해서 가나안은 저주를 받게 된다. 빵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창세기 3장의 저주와 관련하여 흔히 지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가 일종의 축복으로 변함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은 떡과 포도주를 주는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의 목록에 한가지 슬픈 말을 추가해야 한다. 그는 또한 잠자는 자였다는 것이다. 포도원은 연로한 그에게 흥미를 주었지만, 그것은 그에게 올무가 되었다. 즉 그는 술취하여 잠들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와를 알기 전 사무엘은 잠들기 전에 놀라운 계시를 받았지만 그 후에는 되풀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5:14).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살전 5:7).

이러한 두 구절은 창세기에서 노아의 말년의 생애의 경험에서 실로 그러했다. 어떤 사람의 시작은 좋았는데 그의 마지막이 나쁘다면, 그것도 그 가족에게 저주를 초래한 것이라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출발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계속 잘하는 것은 훌륭하며, 끝까지 잘하는 것은 축복된 일이다. 불행하게도 노아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은 성경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는 삼손, 솔로몬, 기드온, 입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생각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경고가 된다. 옛 성품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인생에는 우리를 불안정하게 할 많은 왜곡된 것들과 우회로가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그러한 것이 우리 마음에 있는지 조차도 모를 때가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하나의 엄숙한 경고로 마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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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