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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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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3. 21:37 횃불/1999년

도망친 노예()(4)

빌레몬에게 쓴 바울의 편지

― 제 1 부 복 음 ―

R. H. 사익스

(4) 구 원

우리는 지금까지 오네시모를 살펴보았다. 그는 무가치한 죄인이었다. 바울은 놀라운 보증자인 그리스도의 그림으로서 나타났다. 이제 바울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망친 종에게 행해진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가치한 죄인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율법은 그를 심판해야 한다고 한다. 죄 있는 자는 죽어야 한다고 한다. 율법은 단지 죄인을 벌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은혜는 말하기를, “그리 말지니, 그를 살게 하라. 누군가 그의 죄값을 갚았으니 그를 용서하라. 그로 자유롭게 가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전체 서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을 만나게 된다. “그를 영접하라.” 우리는 이 짧은 서신에서 세 번 이 말씀을 읽는다.

그를 영접하라”(12; KJV에는 이 구절이 있으나 우리말 개역 성경은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라고 되어 있음 ― 역자 주).

그를 영접하라. 그를 되돌려 받으라. 그를 소유하라”(15,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로 되어 있음).

그를 영접하라. 그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라”(17,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라고 되어 있음).

 

구약성경에서는 두 세 증인의 증언이 있으면 사실로 인정되었다( 19:15). 또한 전도서 4 12절에서는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께서는 이 구원의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이 서신에서 그를 영접하라고 세 번이나 쓰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를 영접하라

이는 이 서신의 중심 말씀이다.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시는 따뜻한 환영의 말씀이다. 돌아온 죄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기쁨과 참 즐거움으로 마음을 다하여 영접하신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해상에서 큰 폭풍이 있었다. 항해하는 배는 로마를 향하고 있었고 그 배에는 바울과 다른 죄수들이 타고 있었다. 로마 경비군이 그들을 맡고 있었다. 두 주간의 심한 바람과 풍랑으로 그 배는 멜리데라 불리는 작은 섬에 난파되었다. 배가 여러 조각이 나자 모두 해안으로 헤엄치든지 널판을 붙잡든지 하였다. 그들이 해안에 헤엄쳐 갔을 때는 매우 지쳤음이 분명하다. 두 주간에 겨우 한 번 먹었을 뿐이니까. 그들은 젖어 매우 추웠고, 비도 많이 내렸다. 그들 중의 몇은 살아 있다기보다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더 기막힌 것은 그들은 길을 잃었었다. 거기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이 기이한 섬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행할지 두렵기도 하였을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경험인가! 그 때 그들을 향하여 원주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이 때 우리는 그들을 영접하더라는 놀라운 말씀을 읽는다. 그들을 친절히 맞았던 것이다. 그들을 맞아들이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였다. 그들은 공손히 영접하였다. 불을 피웠고 먹였다.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아 주었다. 겨울이 다 가고 다른 배가 와서 그들을 싣고 갈 때까지 세 달 동안이나 이 일을 하였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절한 접대에 얼마나 감사했겠는가! 이것이 바로 돌아 온 죄인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친절한 환영의 한 작은 그림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더 놀라운 묘사가 있다. 어느 날 주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얘기하고 계셨다. 많은 세리들과 또 다른 버림받은 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원수들을 매우 화나고 시기나게 하였다. 그들은 유대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이요 지배자들이었다. 그들은 주 예수를 무척 미워하였다. 주께 대해 송사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서 불평과 중얼거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께 말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송사는 그가 버려진 자들을 환영하였다는 것과 더욱이 그들과 함께 먹었다는 것이었다!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가지셨다.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15장의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그들이 주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환영하였다고 말하였을 때 사실은 그들이 주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깨달았던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하나님은 원수들까지도 그분을 찬양케 하신다). 사실상, 주께서는 놀라운 진리를 계속해서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죄인들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들은 다음과 같다. 즉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화, 잃은 아들의 이야기이다. 이 세 비유의 요점은 즐기다, 기뻐하다, 축하하다, 잔치하다, 노래하다 등의 단어에 들어있다. 바로 기쁨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주께서는 이 장의 시작에서 주목해야 할 것들을 강조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따뜻하게 영접하시며, 마음을 다하여 환영하시고, 참된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고 껴안으신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 더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은 세 이야기들 중의 세 번째이다. 누가복음 15 11-32절에서 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거기서 한 젊은이를 보게 된다. 그는 멀리 떠난 동생이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가정으로부터 도망쳤다. 가진 모든 것을 다 허비하고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배고파 죽게 되었을 때 제 정신이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는 죄를 지었노라고 아버지께 인정하고 품꾼의 하나로서 일을 구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일터에서 먹을 것을 얻고 살아 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하실 것인가? 그를 어떻게 대하실 것인가? 보고 물리치지는 않으실까? 그의 사죄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감옥에 집어넣지는 않으실까? 그를 용서하실까? 또는 영원히 내어 쫓으실까? 둘째 아들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은 집에 돌아가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긴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의심 없이 그의 마음은 이러한 질문들과 의문으로 가득 찼다. 무거운 마음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누군가가 그를 보았을 때는 아직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둘째는 누구인가 궁금했으리라. 한데 곧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아버지이셨다! 둘째의 심장이 고동치며 울렸다. 아버지는 그가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뛰어 오셨을까? 노인이 그렇게 멀리 뛰어 오기는 참 힘들었을 것이다. 왜 하인을 보내지 않았을까? 돌아온 죄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을까? 둘째는 몇 마디밖에 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여 내가 하나님과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가서 팔로 감싸 안으셨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그리고 다음에 아버지의 입맞춤을 느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하인에게 명하여 어떤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무엇을 말하였는가? “큰 채찍을 가져와 그를 때리라?” 아니, 그게 아니었다. “사슬을 가져와 그를 묶어라?” 아니! 그게 아니라면 검을 가져와 찔러 죽여라?” 전혀 아니었다! 어떤 아버지들은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아니었다. 이 아버지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의 그림이다.

무어라고 명령했을까? “제일 좋은 옷을 가져 오라.” 집에 있는 가장 비싼 것, 아주 귀중한 사람을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것을 의미한다. 다음에, “옷을 입히라.” 물론 그의 낡은 누더기는 먼저 벗겨졌다.

그 밖에 무엇을 말했는가?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이는 존귀함의 상징이다. 이제 그는 특별한 자였다. 더 이상 돼지를 치지 않아도 되었다.

발에 신을 신기라.” 당시에는 하인이나 종들만이 맨발이었다. 둘째가 바랐던 것은 종의 하나로 여김 받는 것도 다행으로 여겼지만 대신 그는 자유인이며 아들이었다.

값지고 매우 살진 송아지를 가져 오라. 그것을 잡아 큰 잔치를 벌이자. 축하하고 즐기자.” 그 송아지는 특별한 경우를 위해 길러졌다 ― (희생이나 잔치를 위해서). 그리고 이 경우는 아버지에게는 매우 특별한 시간이었다. 고집 부리던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축하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왕 같은 환영이었다! 어떻게 아들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 무가치한 죄인에게 이런 잔치 베푼 것을 들은 자가 있기나 할까!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대조를 보게 된다. 돼지 우리의 더러움에서 살진 송아지의 잔치로, 죄에서 용서로, 누더기에서 가장 좋은 옷으로, 가난에서 부요로, 수치에서 존귀로, 극심한 슬픔에서 참 기쁨으로, 기근에서 잔치로. 20절에서 보면 이는 모두 아버지의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은 돌아오며 회개하는 죄인들을 영접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시는 크신 기쁨을 말해준다. 그분은 팔을 벌려 사랑의 기쁜 포옹으로 환영하신다. 이 얼마나 큰 구원의 그림인가!

 

의의 제일 좋은 옷 ― 구원과 찬양의 옷들( 61:10).

인정의 금반지 ― 우리는 이미 죄의 종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인정되었다( 8:14-17; 1:3-6).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발(샌달)― 이미 아담 안에서죄인이 아니다. 죄로 인해 심판 아래 있지도 않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있다( 2:1-10).

살진 송아지를 잡음 ―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한 구주라는 것을 생각케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그분이 주시는 덕의 양식을 먹고 있다( 12:7-9).

큰 잔치 ― 모든 회개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왕 같은 환영회의 절정.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매일 즐거워한다. 주의 만찬에 참예하므로 매 주일마다 주의 식탁에서 기뻐한다. 나아가 우리는 어린 양(그리스도)의 행복한 혼인 잔치를 즐기기 위해 하늘의 대 연회실에 앉게 될 것이다. 이는 즐거운 잔치요 영원의 성찬예식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그를 영접하라는 말씀 안에 무척이나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를 영접하셨는가를 말해 준다. 그분은 친히 회개한 죄인들을 이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셨다( 14:3).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접하셨다( 15:7). <다음 호에 계속>

 

(1999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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