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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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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3. 21:38 횃불/1999년

그리스도인의 봉사-은사

 C. H. 매킨토시

 은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 근원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 그리고 특성에 있어서도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께서 몸된 교회를 위해 은사를 허락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바로 주님이 은사의 근원지가 되십니다. 교회나 교회 안의 어떤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은사를 줄 수는 없습니다. 은사들은 그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교회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뜻대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무리도 이 일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 혼자만이 가지신 특별한 권한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은사를 허락하실 때,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든지, 목자로 또는 교사로 부름 받았든지 간에, 모든 인간의 권위를 완전히 떠나서 받은 바 은사를 활용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모든 성도가 주님께 봉사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모두가 다 앞에 언급한 은사들을 받는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전도자나, 목자나, 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귀중한 은사들은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의지를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관여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 은사들이 누구에게 주어지든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를 가지고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요청됩니다. 또한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한 이들과 생명의 말씀을 일러주던 이들을 인정해 줄 것이 권고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만물이 다 그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받을 복을 거절하고 그것을 내버리는 자입니다( 12:3-8; 고전 3:21-23, 12, 14, 16:15; 1:11-17; 4:7-16; 살전 5:12,13; 13:7,17; 벧전 4:10,11을 읽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들입니다. 누가 어떤 은사를 하나님께 받았는지 우리는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누가 자기는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에게 실제로 그 은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2:14), 그와 동일한 원리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의 약한 분별력에서 나온 헛된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영적인 모임은 잠시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전도자는 실재(實在)입니다. 교사도 실재로 있습니다. 목자 역시 실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를 가진 자들은 그들이 하는 사역으로 인해 정식으로 인정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고, 모든 존중과 영예를 받을 만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직접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인간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가르침, 모든 교육, 모든 훈련을 다 받았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게 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 은사를 실제로 사용하고 계발할 책임을 가지게 되며, 자신의 은사를 따라 주님을 섬길 것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은사를 받은 적이 없다면, 아무리 뉴턴(Newton)의 이론을 알고, 베이컨(Bacon)의 철학을 공부하고, 데모스테네스(Demostenes,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역주)의 유창한 언변을 지녔다 해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아닙니다. 종교에 있어서는 그가 매우 재능 있고 유능한 사역자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사역자와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것이라면, 그 은사가 그것을 소유한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만든다고 믿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임명에 전혀 상관없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도 동일하게 믿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자격들과, 인간의 모든 직위들(titles), 인간의 모든 권위들을 다 가졌으나, 중요한 단 한 가지의 것, 즉 그리스도의 은사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섬김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주위의 다양한 교파들 중에 참된 은사를 소유한 그리스도의 종들이 많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인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 결코 성직 수임식(ordination)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은사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부활하사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은사를 좀 더 유효하게(efficient)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마치 무지개에 그림자를 두려는 것과 같으며, 제비꽃에 엷은 빛깔을 새겨 놓으려는 것과 같고, 파도 속에서 동작을 취하려는 것과도 다름이 없습니다. 또 그것은 붓을 가지고 공작의 깃털에다가 서투른 그림을 열심히 그려대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그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요담의 비유에서 보여지듯이,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등은 다른 나무들의 임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9). 이 각각의 나무들은 저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특징적인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가치 없는 가시나무만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도(a real nothing), 다른 나무들이 자기를 치켜세워 공적인 위치(an official something)로 임명하려는 것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갖고 있는 은사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그는 원하지 않으며,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권위가 그의 주위로 쳐 놓으려고 하는 울타리를 벗어나 그것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발을 일찍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서 있었던 저 높은 기초 위에 둡니다. 그는 이 세상의 교육기관들이 그에게 적당히 정해주는 활동의 범위에 영향받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나누어 준 이 귀중한 보석(은사)을 새겨 놓을 금속이나 도자기도 있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보석을 내리신 그분만이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은사를 사람 안에 거하게 하신 그 은혜만이 그 은사가 활용되기에 적당한 영역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풍성한 은혜인지요!

이제 이러한 질문도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없었습니까?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람들을 가지면 안 되는 겁니까?” 의심할 나위 없이 초대 교회 시대에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 또는 사도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성령님, 곧 그 당시에 그들을 임명하실 수 있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 의해 임명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장로를 세우거나 임명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이 그러한 일을 하려는 것은 효력이 없는 무의미한 시도일 뿐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그림자를 가지고 우리의 주의를 빼앗아 갈 가능성과, 그러한 그림자들을 하나님이 주신 실체로 인식하도록 요구할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것들은 성경에서 그 실례가 발견되지 않으며, 성경의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임명하신 장로들을 봅니다. 반면에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들에서 인간이 임명한 장로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장로들 대신 인간이 임명한 장로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실체를 대신해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장로들을 세우고 임명하려고 할 때, 그 행위에서 그들이 어떤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나 디모데나 디도 등이 장로들을 안수했을 때,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서 그분의 권능으로 그 일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떤 개인이나 무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장로들을 세우셨듯이, 지금도 그분만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인간의 임명은 참으로 경멸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장로나 목자를 일으키신다면, 우리는 감사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세움을 입은 그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으시고,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적합한 사람을 일으키셔서 모임을 돌아보게 하시고, 자신의 양무리를 먹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아서 부끄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교회에게조차 그러한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한 은사의 저수지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목자들과 장로들을 세우려는 성급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애정을 따라 훨씬 더 풍성하게 목자들과 교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때, 그분은 우리로 우리 자신의 방법을 의지하도록 그대로 두십니다. 그분을 경험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분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힘은 빼앗겼고, 우리는 열매가 없고 쓰임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더욱 나쁜 상황은, 우리가 인간의 편의를 우선하는 불행한 길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갖지 못했다면, 거짓으로 힘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보다 현실 그대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부한 체 하는 것보다, 가난한 실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계속 기다리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제한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우리가 스스로 공급함으로 인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분의 공급을 중단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것들을 기꺼이 주고자 하십니다.

교회가 목자들을 세우고 임명할 정당한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목자들을 교회 스스로 선출하는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1 23절에서 26절까지가 그 예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은 정반대의 사실을 확실히 입증합니다. 심지어 열 한 사도들조차 동료 사도를 택할 때에 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고, 그것을 더 높은 권위에 넘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의미는 매우 명료합니다. 사도들은 그들 스스로 함께 사도될 자를 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사람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사람 안에 보배를 넣어 주셨고, 그분만이 보배를 가진 사람들을 그들이 필요한 자리에 위치시킬 수 있으십니다.

따라서 열 한 사도들이 그들의 수를 채우는데 있어 그 일을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 드린 실례는 모임이 목자를 선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선례를 완전히 거스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사도와 장로, 그리고 전도자와 목자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바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오기 바랍니다.

인간의 견해는 무익합니다. 전통도 쓸모가 없습니다. 편의주의 역시 도움이 안됩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름 하에, 초대 교회는 항상 그들의 목자들과 교사들을 직접 세웠다고 가르침 받고 있습니까? 확실히 말하건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뒷받침하는 내용은 성경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성경에서 인간들이 목자들을 세우거나 임명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즉시 그러한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고자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근거 없이 그같은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우리로서는 그것을 모조품(mimicry)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의 교회들은 그들이 장로들을 선출하거나 임명하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했을까요? 어째서 그 교회들의 장로들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교회 전체나 교회내의 개인들 중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디모데나 디도에게만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믿듯이, 디모데와 디도가 성령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능과, 그분의 직접적인 권위를 가지고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임명은 하나님의 뜻으로 그들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일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디모데와 디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신약성경에서 디모데와 디도의 뒤를 이어 장로들과 목자들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암시라도 발견됩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teach) 수 있으리라.”(딤후 2:2).

그러나 여기서 장로들과 목자들을 임명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이어질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분명히 여기서의 가르침”(teaching)성직 수임식”(ordination)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나누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만일 영감을 받은 사도가 디모데에게 그가 장로 및 목자의 임명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고 그러한 권위는 정기적으로 계승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 했다면, 바울은 그러한 생각들을 그대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 앞에서 인용한 말씀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또 네가 부여받은 권한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여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임명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장로들을 임명할 수 있는 개인이나 무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권한이나 권위가 교회에 위임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교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장로와 목자, 그리고 전도자와 교사를 보내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실체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짜 돈 말고 하늘의 진짜 돈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2:63).

이 말을 한 에스라와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자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그림자를 가지고 하나님의 실체를 대신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공적인 일을 감당하는 사람 없이 그대로 있는 편이 낫습니다. 에스라는 자칭 제사장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보증과 하나님께 받은 자격을 제시하지 못하면 완전히 거부되었습니다. 사람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그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육체에도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21:16-23).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를 소원한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고, 필요한 영적 자질들을 반드시 갖춰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고린도 교회의 양심과 판단력에 강하게 호소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들로 그의 영적인 은사들과 그가 수고해서 얻은 열매들에 관해 언급했습니다(고후 10, 12).

 

그리스도인의 봉사라는 주제를 마치기 전에 안수의 실행에 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안수는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안수가 실제적인 은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 4:14).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디모데후서 1 6절의 이 말씀은 첫 번째 서신의 장로의 회”(presbytery)란 표현의 의미를 확고히 합니다. 두 구절 모두 디모데의 경우(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에 있어서의 안수 행위는 어떤 은사를 나누어주는 것과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나 둘째로, 사도행전 13 3절을 볼 때, 안수가 단순히 풍성한 교제와 동일시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장면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역을 해 오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도행전 13 3절에 기록된 안수가 성직 수임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행해지는 안수는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부르셔서 보내시는 그 사역(1차 전도여행)에 있어서 형제들이 온전한 동일시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은사를 나누어 주는 권한이 없었다면, 성직 수임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안수가 단지 어떤 특별한 일이나 선교에 있어 풍성한 교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채택된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두세 명의 형제들이 자신들을 외국에 선교하러 가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가까이에서 함께 교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에게 그 일에 필요한 은사와 자원함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때, 형제들이 안수로써 그들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와 형제로서의 친밀한 교제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매우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독자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부탁 드립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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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