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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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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5. 10:47 횃불/1999년

도망친 노예()(8)

빌레몬에게 쓴 바울의 편지

― 제2부 실천적 교훈들 ―

R. H. 사익스

7. 교제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家屬) 중에 처하게 하신다( 68:6).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짝의 필요를 보셨다. 그래서 아담과 함께할 이브를 창조하셨다( 2:18,19).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과 즐거움을 서로가 함께 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일은, 예를 들면 침례 요한과 같은 고독한 개인들이 행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도 나중에 제자와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 주의 일은 여럿이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여 이루거나 행해진다. 성경은 이를 교제라 부른다. 이는 협력”, “사귐”, “연합을 뜻한다. 이는 형제간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서로 서로 이해하며, 함께 일하는 것, 친밀함, 우정, 나눔을 말하고 있다. 한 마음으로 말하고, 공동의 목적과 경험을 가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주를 위한 진정한 큰 일꾼(사역자)이었다. 생애 동안 많은 것들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믿음과 관심이 같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였다. 빌레몬에게 쓴 이 서신을 읽으면 다섯 가지의 다른 관점에서 다섯 가지의 참고 구절을 만난다.

(1) 동역자(1,24).

(2) 함께 군사된 자(2).

(3) 믿음의 교제(6).

(4) 동무, 혹은 협력자(17).

(5) 함께 갇힌 자(23).

 

동역자(1,2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가 행한 바 행위로 된 것이 아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8,9). 그러나 변화된 후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많다( 2:10).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았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에 쉬운 삶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일을 맡기셨다.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사 하라고 하신 일들을 행하시는 것에 관해 가끔 말씀하셨다( 9:4). 그분은 진정한 여호와의 종이셨다( 42:1). 그분은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하셨다( 8:29). 그리고 이제 승천하신 후, 그분을 좇는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다( 28:19,20).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20절을 주목하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신다. 다시 마가복음 16:20에서 보면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읽는다.

마태복음 11:29,30에서 그분의 사역에 함께 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그분의 멍에에 대해 말씀하신다.

황소 두 마리에 한 멍에를 농부들이 사용했다. 목적은 황소들이 일을 더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주께서는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면 우리는 그분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일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은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가. 친히 주 예수와 함께 일하는 자로 삼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후 6:11).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일꾼이었고, 그분을 섬김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연합하는 것을 사랑했다. 이 서신에서 빌레몬을 언급한다(1). 24절에서는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열거한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쓰고 있다. 디모데( 16:21), 브리스가와 아굴라( 16:3), 우르바( 16:9).

종종 그들은 조력자”, “동무”, “동역자”, “함께 일꾼된 자라고 불리운다. 그들은 때로는 남자들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으며, 결혼한 부부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 모두를 깊이 존중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른 믿는 자들과 함께 주의 일을 하는 것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 이는 협동 작업이라 불릴 수 있다. 각자는 다른 사람이 질 짐을 조금씩 가볍게 해준다. 한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면 다른 사람이 이를 메운다. 경험자는 경험이 없는 자를 가르칠 수도 있다. 명랑한 사람은 침울한 자의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있다. 끈기 있는 자는 당황하여 흥분한 사람을 진정시켜 도울 수 있다.

각자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섬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를 의뢰할 때 많은 일을 그분을 위하여 할 수 있다. 우리의 찬양받으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하물며 그분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특권이다.

 

함께 군사된 자(2)

주를 위하여 할 일만 많은 게 아니다. 계속되는 전쟁도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 이 전쟁은 국가나 민족간의 전쟁이 아니다. 사람대 사람의 전쟁도 아니다. 오히려 영적인 전쟁이다. 사단과 악한 그의 군대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6:11,12). 우리의 대장은 우리의 찬양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시다( 2:10). 그분을 좇는 모든 자들은 그분의 군대의 군사들이다(딤후 2:3). 우리의 대장은 우리 각자가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란 어떤 자일까? 이에 대하여 쓸 수 있는 바는 많다. 그러나 매우 간략하게 좋은 군사의 자질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보자.

 

(1)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

훈련은 지상 군대의 가장 중요한 축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14:15, 15: 14). 훈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곧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는 어떤 승리도 얻을 수 없다.

 

(2) 충성된 자.

이것은 순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는 대장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행하는 것이다(딤후 2:4). 이는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아주 좋은 본을 찾을 수 있다. 사무엘하 23: 14-17에서 다윗 왕과 그의 충성된 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라.

 

(3) 강한 자(딤후 2:1).

군사는 자기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전술에 적합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엄한 훈련과 연습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서 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은혜 안에서 강하고(딤후 2:1).

믿음 안에서 강(견고)하고( 4:20).

주 안에서 강하고( 6:10).

담대함 가운데 강하고( 1:9)

 

(4) 견디는 자 혹은 지키는 자.

군사는 곤란과 고난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딤후 2:3,12). 그는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5) 분리된 자.

이 세상 일들로 얽매이지 않는 자(딤후 2:4)여야 한다. 군인이 만약 좋아하는 옷과 금은의 무거운 가방을 가지고 다니려 한다면 그는 전장에서 유익하지 못하다. 그는 이 세상사의 호사품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죄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6) 현명한 자, 지혜로운 자.

그는 자기의 무기를 알고 그 사용법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무기가 어떤 것인지 에베소서 6:10,20을 읽어 보라. 무기들을 현명하게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주께 기도하라.

 

(7) 믿을 만한 자

신뢰할 만한 자(딤후 4:7,8)를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군사였다. 그는 말년에도, 끝까지 믿음직스러웠다는 것을 고별의 서신에서 읽는다.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기를!

 

(8) 근신하는 자, 깨어 있는 자.

우리가 행해야 할 자리에서 잠에 떨어지지 않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대장은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26:41). 그분의 말씀을 읽는대로 그분의 뜻에 근신하자. 그분을 섬기는 기회에 깨어 있도록 하자. 적진으로부터 오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자. 무엇보다도 곧 오실 우리의 대장의 재림을 대비해 깨어 있자( 24:42).

 

믿음의 교제(6)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과 관계가 있다. 어떤 번역본에는 우리의 믿음을 전하는 것, 또는 옮겨 주는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멸망할 자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에 책임이 있다( 16:15).

또한 이는 귀한 믿음을 나누는, 즉 성경에 관한 우리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믿음의 말씀이란 종종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하는 모든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진정한 보화를 찾을 수 있다( 2: 1-5). 다음에 그들은 이를 함께 믿는 자들과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 그 결과 모두가 영적으로 더 부요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교제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1달러를 가지고 있고 당신도 1달러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같이 부요하다. 우리가 달러를 거래하면 우리 각자는 여전히 1달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쨌든 더 부요하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생각을 성경으로부터 가지고 있고, 당신 역시 새로운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가 그 생각들을 교환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모두 둘을 가지게 된다! 영적으로 전에 우리가 가진 부보다 두 배나 부요하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을 계속하면 우리는 실로 서로 점점 더 부요하게 될 것이다.

, 함께 믿는 사랑하는 자들이여, 영적인 부요를 서로 함께 나누자. 그러면 우리는 믿음의 교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동무 혹은 협력자(17)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이 말은 빈 말이 아니다. 놀라운 뜻이 충만하다. 동무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우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가까움”(벧후 1:4), “동참함”( 1:7), “사귐”( 10:33), “친근함”(벧전 4:12,13) 등을 뜻한다.

협력자는 어떤 일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같이 공유하는 사람이다.

사업을 함께 하는 동무는 한 회사를 공유한다. 그는 그 사업의 비밀들을 소유하는데 한 몫을 가지고 있고 사업의 이익이나 손실을 함께 나눈다.

혼인의 상대는 남자와 여자가 그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을 수반한다. 성경은 둘이 하나가 된다고 말했다( 2:24). 그들은 삶의 친교와 기쁨을 함께 나눈다.

영적인 사귐은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을 말한다. 그는 놀랍고 새로운 관계로 들어왔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벧후 1:4).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 자이다( 12:10).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고전 12:27). 그는 하나님의 교회인 영적인 집에서 산 돌이다(벧전 2:5; 2:21,22).

믿음으로 믿는 자들은 굉장한 경험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은 우리를 소생시키시고―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은 우리를 하늘에 앉히시고―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은 우리를 후사로 삼으시고―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그리스도와 함께( 2:5,6; 8:17).

 

참으로 놀라운 은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셨다(고전 1:9).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로 삼으셨다( 3:1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을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모두 나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다( 8:17; 3:16). , 참으로 이 모두가 놀랍도다!

그분이 소유한 모든 것이

나를 위함이라.

나의 새로운 원기들이

그분 안에 숨기어 있도다.

내가 자백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분 안에 사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였노라!

(J. G. Deck).

 

함께 갇힌 자(23)

전쟁에서 함께 포로되고, 함께 갇힌 자. 이런 단어들은 우울하고 침울하게 들린다. 불명예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확실히 앞서 보았던 굉장한 진리들을 약간 기죽게 한다.

그러나 바울과 에바브라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는 주 예수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큰 차이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 10절에서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썼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하고 있는가? 자정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16:25). 물론 이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 1: 20). 우리도 이와 똑같아야 한다.

상처로 피흘리며 감옥에 있을 때 어떻게 노래하며 기뻐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주께서 친히 감옥 바로 그 곳에 함께 계심을 알았다. 그분은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28:20). 히브리서 13:5,6에서 주님은 자기를 좇는 자들에게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라히라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기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감옥에 있는 바울과 함께 하심을 보여 준다. 그분이 바울과 함께 갇히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구약 다니엘서 3장에서 본다. 선지자 다니엘 역시 주를 사랑하는 세 명의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다. 그들은 바벨론 왕의 치하에 있는 포로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왕의 신상에 엎드려 경배하기를 거절했다. 그들의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20:3-5). 그러자 그들은 산 채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지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옷을 입은 채로 함께 단단히 묶였다. 불꽃에 던져 넣던 군사들이 오히려 불에 타 죽었다. 왕은 불 가운데서 세 명의 죄수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결박이 풀리고, 해도 입지 않고 걸어다니고 있었다. 왕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이 걸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말하기를 넷째가 하나님의 아들 같다고 했다(25). 왕의 말이 옳았다. 그분은 불 가운데서 자신의 종들과 함께 하신 주님이셨다! 이사야서 43:2를 보라.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격려가 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시련이나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찬양 받으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우편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신다. 얼마나 놀라운가!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라!

마찬가지로 또 다른 교훈들이 있다.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또 다른 사람들을 간단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실라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의 감옥에 있었던 것을 보았다( 16). 그리고 사도행전 23장에서 바울의 조카는 바울의 생명을 염려하여 유대인의 음모의 소식을 가지고 감옥을 찾아온 사실을 본다. 그 젊은이는 믿는 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바울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옥중에서 바울이 쓴 서신들을 읽어보라. 그러면 상당히 많은 다른 이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 사람은 함께 갇힌 자라고 불리운다: 아리스다고( 4:10), 에바브라( 23), 그리고 디모데도 같이 한 것 같다( 13:3,23). 전에 살펴 보았듯이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었던 것 같다( 9,10). 이 모든 사람들이 바울이 투옥당했을 동안 실제로 한 때 함께 갇혔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와 함께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할 수 있는대로 도움을 주었던 믿는 자들의 다른 이름들을 더하고 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바울을 매우 자주 도왔다. 그들은 바울을 알고 그와 어려움을 같이 겪었으며, 이것이야말로 바울에게 진정한 격려가 되었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의 동료들과 조력자들:

에베소서 6:21―두기고

빌립보서 1:1―디모데

골로새서 1:1―디모데

골로새서 4:7―두기고

골로새서 4:9―오네시모

골로새서 4:10―아리스다고

골로새서 4:11―유스도라 하는 예수

골로새서 4:12―에바브라

골로새서 4:14―사랑 받는 의원 누가

골로새서 4:14―데마

디모데후서 1:16,17―오네시보로

디모데후서 4:11―누가

디모데후서 4:21―으불로

디모데후서 4:21―부데

디모데후서 4:21―리노

디모데후서 4:21―글라우디아(자매)

빌레몬서 23절―에바브라

빌레몬서 24절―마가

빌레몬서 24절―아리스다고

빌레몬서 24절―데마

빌레몬서 24절―누가

 

그들이 거기에 있다! 그들을 잘 살펴보라. 우리는 왜 그들을 모두 나열하고 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하셨을까? 이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상을 수상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주님 그분을 섬겼다. 그들이 바울을 방문할 때마다, 그를 위하여 심부름을 할 때마다, 한 사발의 국물 혹은 시원한 물을 그에게 가져갈 때마다 실로 그 일을 주님께 행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마태복음 25:36-40에서 배운다. 주님은 당신이 감옥에 갇히셨을 때 방문했다고 말씀하셨다. 즉 갇혀 있는 그분의 종들을 찾아간 것이 바로 주님을 찾아간 것이었음을 가르치셨다.

이는 히브리서 13:3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더 기꺼이 순종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분은 우리가 함께 갇힌 자인 것처럼 갇힌 자를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마치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오네시모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그는 가난하고, 도망친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된 다음부터는 바울을 섬기기를 좋아했다. 그를 위하여 심부름하는 것을 좋아했다. 바울이 갇혔을 때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상을 받을 수상자 명단에 영원토록 올라 있다!

우리의 이름은 어떠한가? <다음 호에 계속>

 

(1999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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