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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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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5. 10:45 횃불/1999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22)

 사무엘 W 제밍스

22장 구원은 주께 속했다.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주님의 위대한 특징은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인데, 그분의 주권적인 은총이 노아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아는 부패하지 않았고, 이것이 주께 받아들여질 만 하였다. 하지만 거기에 은혜가 배제되지는 않았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9:15).

노아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혜는 노아 자신에게 있었던 것도, 그의 장점으로 인한 것도 아니요 오직 주께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결과로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는 그 세대의 사람들과 달랐던 것이다. 그는 부패한 사회 가운데서 의롭게 살았다. 그 아들들 또한 같은 은총을 받았는데,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물에서 구원받은 자가 여덟 명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노아에게서 보여진 비난할 만한 것이 없는 순결함과 그 같은 의로운 생활이 주님께서 받으심직한 어떤 것이었음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없이 사는 당시 세계의 끔찍한 행습으로부터 깨끗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구속하신 자들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다. 그분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며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편에서의 이러한 갈망은 언제나 동일하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그분 가까이로 나아오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은 여전히 놀라운 은혜이다. 이는 실로 그분이 낮아지셔서 우리로 전적으로 그분과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 은혜이며, 우리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도록 하신 은혜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우리를 그같이 가까운 위치로 이끌어 주신 것이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발자국에 맞출 수 있도록 그분의 보폭을 우리에게 맞추신다는 사실은 한층 더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어른과 함께 동행할 수 있겠는가? 그 보폭이 얼마나 다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는 얼마나 놀라운가! 주님은 우리를 부드럽게 이끄시며, 우리로 적절하게 행케 하시고 우리로 이해하도록 기다리신다.

노아는 이러한 동행으로부터 오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동행 그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 되었을 것이다.

에녹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최초의 사람으로 언급되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 자체가 에녹에게 매우 행복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이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음이 없이 취하여 그분에게로 이끌어가셨던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홍수로부터 건짐 받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동행한 것은 홍수에 대한 어떤 암시를 받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의 동행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된 것이다. 바울은 주님을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자 했다( 3:8). 노아의 동행은 그의 구원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인간에게 있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존중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11:6).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보조를 같이 해야만 한다.

에베소서에서 걷는 것(to walk)에 관한 5가지 참고 구절을 주목해 보자.

(1)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4:1). 이것은 긍정적이다.

(2)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4:17).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이다.

(3)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2).

(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5)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5:15).

 

이것은 옛 삶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수반되기 원하는 주님의 뜻이다.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같이 이전에 행하던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거룩한 것들을 미워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요, 이전의 어둠의 영역과는 전혀 다른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처럼 어리석게 사는 것이 아니요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노아는 그가 발견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고 결과적으로 당시의 주변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그분이 가시는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요, 그분의 목적과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흔적들이 주님과 동행한 노아의 모습에서 기쁘게 드러난다.

 

주님은 다시금 자신의 뜻을 계시로 보이신다. 노아에게 방주의 크기와 제도에 관한 상세한 지침이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노아 자신의 상상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너는 방주를 짓되”( 6:14).

이것은 거룩한 권위의 음성이며, 주님으로부터 어떤 구차한 간청이 아니었다. 주님의 명령은 반드시 순종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된다. 이것은 분명한 명령이며, 노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세부 지침까지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은 모호한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으신다. 그분의 말씀은 분명하고 명료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들을 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명령은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주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모든 명령이 이러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주의를 기울여 순종하면 그것은 신자에게 유익이다.

그러므로 방주를 짓는 것에 관하여 노아에게 주어진 가르침은 상고할 가치가 있다. 성막을 짓는 것처럼 방주를 짓는 것에는 깊은 모형적인 의미가 있다. 자세한 많은 사항들이 주어지지는 않았는데, 하나님은 다만 원리를 제시하신 것이다.

 

첫째,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인데, 이 모두가 10의 배수이다. 그런데 10은 성경에서 십계명과 같이 책임을 의미하는 수이다. 사람의 열 손가락은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할 그의 책임을 말한다. 그리고 열 발가락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할 그의 책임을 나타낸다. 노아는 이러한 두 의무를 다 이행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그는 손으로 방주를 지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흐른다. 일단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그는 주님의 멍에를 메게 되고 그분을 복종하게 된다. 노아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는 봉사의 멍에를 메었고 마태복음 11:28-30의 원리를 따랐다. 그의 이름은 안식을 의미하는데, 그는 확실히 그의 영혼을 위한 쉼을 발견했다.

다소의 사울이 구원받은 후에 처음 한 고백은 다음과 같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이것은 모든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세계에서도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22:3).

그 재료는 잣나무였다. 전형적으로 성경에서 나무는 인성을 말하며, 인간으로서의 섬김을 의미한다. 아담은 섬겨야 할 책임을 지닌 인간이었다. 주님은 인간이 되심으로 자동적으로 종이 되셨다. 그분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 2:7).

그렇지만 이것은 부활의 입장에 있는 노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나무들은 잘리어져서 방주로 지어졌다. 그것이 바로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서있는 입장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지만,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 돌로서 함께 지어지는 것이다(벧전 2).

잣나무(gopher tree)는 성경 다른 곳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삼나무(cypress tree)로 추정한다. 혹은 그 나무가 송진(resin)같은 것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14절의 역청과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아스팔트가 아닌 역청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렇지만 그 형태는 분명하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새 생명 가운데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역청이라는 단어는 교훈적이다. 히브리어로 그 단어는 덮는다는 의미로 구약에서는 '속죄'(atone)로 번역되었다. 오직 구세주의 하신 일로 덮여질 때, 사람이 주님 앞에 설 수 있고 그분이 받으심직한 봉사를 할 수 있다. 믿음이 여기서 온다. 노아는 이러한 믿음을 가졌다( 11:7). 이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리스도로 덮여진 것 같았다.

그 방주 안팎으로 역청이 칠해졌음을 주목하자. 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이러하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외면은 이러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 2:19).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주님이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목전에, 즉 하늘에 기록된 것이다. 주님은 또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그 사람이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걸어갔다. 그것이 세상에 증거된 것이었다. 내적으로 일어난 구원은 이와 같아서 모든 진정한 신자는 그 믿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방주 안에 간들을 막고.” 이것은 보금자리를 의미하는데, 어떤 것들은 짐승들을 위한 것이며 어떤 것들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 휴식할 장소로 보금자리의 개념을 사용하신다.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8:20). 주님은 지상에서는 쉴 곳을 갖지 못하셨다.

방들 혹은 보금자리는 모든 신자들이 쉴 곳인 주님 안을 의미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그 방들은 또한 분리를 나타낸다. 이제 노아는 실로 모든 면에서 구별되었다. 이 진리는 고린도후서 6:14-18처럼 주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 보여지는 것처럼 그들의 행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는 대조적이다. 같은 개념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라고 한 데살로니가전서 4:5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은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켰다. 거기에는 과거의 생활방식과 이전의 모든 동료들로부터 완전한 분리가 있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의 모든 영역(개인적인 삶, 가정 생활, 직장 생활, 그리고 물론 교회 생활에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우리 주님의 오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야 한다. 1장에서는 헌신을, 2장에서는 섬김을, 3장에서는 거룩한 삶을, 그리고 4장에서는 가정과 서로 사랑하는 것 등을 다룬다. 이처럼 '보금자리 원리'는 우리로 세상과 육신적인 추구로부터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쉼으로 채우게 한다.

방주를 만드는데 사용된 치수는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오늘날 그와 똑같은 크기로 큰 배를 만들었는데, 물 위에서 안정성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균형은 모든 신자가 지녀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야고보서 1장은 그 같은 성숙은 말씀과 경험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 둘 다 성숙한 사람을 만드는데 필요하다. 하나만 있고 다른 것이 결핍되면 그것은 균형을 잃은 것이다. 오직 말씀만 가진 사람은 경험이 부족하고, 반대로 오직 경험만 가진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무어라 말씀하는지에 대하여 부족하다.

균형은 또한 헌금생활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고후 8:13).

바울은 또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린전서 5:10에서 균형있게 진술한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다. 동일한 개념이 요한복음 17:14,15에 나온다.

또한 주께서는, 진리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는 바리새인처럼 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신자들은 가르치면서 또한 실행하여야 한다. 가르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균형이다.

 

다음으로 상세히 살펴볼 것은 창문이다. 하나님은 실재적(practical)이다. 인간은 신선한 공기와 환기가 필요하다. 또한 그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창문은 그 방주 둘레에 빙 둘러 만든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지붕 위에 그저 형식적으로 만든 것처럼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개정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빛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도록 창을 내되 위에서 한 규빗에 이르기까지 하며”( 6:16). 이처럼 자연의 빛이 방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삼층 중에 최소한 한 층은 그 창문이 빙 둘러 있었던 것 같다. 이 창은 크기가 한 규빗이었다. 그 정확한 크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영적인 교훈이 있을 것이다.

노아는 그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고, 마침내 그 새들을 내보낼 수 있었다. 신자는 이처럼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자주 제기되는 바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우리는 주께서 열방 가운데서 그 시대에 따라 행하시는 일에 대해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10:25). 그 기자는 어떤 성도들이 모임에 가기를 중단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던 글로에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분열이 있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잡담이 아닌 도움을 호소하는 외침이었다. 고린도 성도들 자신은 그들의 탈선한 모습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글로에와 같이 볼 수 있는 ''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빌립보의 에바브로디도는 그곳 교회의 좋고 나쁜 상태를 바울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 또한 ''을 가진 자였다.

주께서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여러 사람이 죽은 소식과 빌라도가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에 섞은 사실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물론 관찰자이시다. 그분은 이러한 일들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그 시대의 사건들을 알고 계셨다.

바울은 고린도 당시의 시대적인 어려움을 알았기에 결혼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그 당시에 결혼을 하는 것은 그들이 직면한 곤경에 어려움을 더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고전 7:26).

그 시대를 잘 분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주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필요에 대해 열린 눈을 갖는 것이 좋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4: 35).

이 옛 세상의 벽에 곧 심판이 도래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지혜롭다.

성도들이 정처없이 방황하고, 영적인 일들이 쇠퇴하는 이러한 일들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을 관찰과 관심의 창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 새들은 이러한 창과 특히 관련이 있고, 모든 신자 안에 있는 두 성품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된다. 그 창은 신자가 자신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7:18).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여전히 옛 성품이 함께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는데, 때로는 그것이 몹시 괴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창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린도후서 12장은 매우 흥미롭다. 그 장의 처음은 신자의 영적인 경험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바울은 어떤 이가 셋째 하늘, 즉 낙원에 이끌려 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은 것에 대해 말했다.

그렇지만 그 장의 끝 부분에서는 만일 신자의 옛 성품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 등의 죄를 지은 자들의 회개치 않음에 대해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면 신자는 세상과 교회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를 쓰면서 베드로는 1장에서 참 신자의 상태에 대해, 그리고 나서 2장에서 기독교의 상태에 대해서 썼고, 마지막으로 4장에서 불신 세상의 상태를 말했다. 그는 바로 창을 통해 내다보았던 것이다.

 

창문은 위에서부터 1규빗에 나 있었다. 주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계속 위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진보는 주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의 특징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연속적인 날에서 보여진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계시에 있어서도 점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첫째, 창조에 있어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화하시며 비전을 보이시고, 그 후에 시내산에서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들과 그분의 징계를 경험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들을 배웠다. 하나님은 계시의 정점에서 하나님의 중심에 계셨던 그분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셨다. 하지만 모든 진리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제 계시가 완성되었다. 이같은 진보의 유형은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산속에 거했던 누가복음 1장의 엘리사벳은 주의 지혜를 가졌다.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에 관한 가장 놀라운 계시는 변화산에서 일어났다.

마가의 씨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는 열매맺는 삶―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에 관한 정점을 이룬다( 4:8). 마태는 그 똑 같은 비유를 기록할 때, 그 역순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했다( 13).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왕이 열매 자체 보다는 그 종들을 살펴보는데 초점을 둔 것 같다.

같은 유형이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인다. 주님은 다섯 달란트 가진 자로 시작해서 한 달란트 가진 자로 마친다. 마태는 이처럼 왕과 관련해서 다루었고, 마가는 발전 과정을 다루었다.

 

마가복음의 독특한 비유는 씨앗의 성장에 관해 다룬 4장에 있는데, 그 발전 순서를 주목해보자.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

주님은 그분의 사역에 대해 빈약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 강한 어조로 책망하셨다( 8). 그들의 부족한 발전이 주님에게 근심이 되었다. 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창세기 6장에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 있다. 주님은 또한 다른 면으로도 보여지는데, 그것은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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