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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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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9. 16:23 횃불/1999년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에베소서 1:6)

 H. A. 아이언사이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6).

 

이 구절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문장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3절부터 시작된 보다 긴 문장의 한 부분입니다. 3절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산봉우리들 가운데 하나에 올라왔으며, 이제 그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서서 우리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우리가 지나온 깊은 골짜기를 보고, 또 우리 앞에 펼쳐진 저 너머의 영광을 보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만해질 여지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며 또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든지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공로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설교하고 노래하고 또 그 내용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값진 사실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설교자가 아무리 여러 번 설교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이 있다는 것을 설교자는 청중을 볼 때마다 알게 됩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엄청난 호의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얻을 수 없으며 또 그의 인자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려 했던 한 여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여왕의 수행원들이 방을 샅샅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여왕을 칼로 살해할 기회를 엿보며 소년 기사의 복장을 하고 여왕의 내실로 잠입했습니다. 수행원들은 옷장 속에 숨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여왕 앞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여왕을 살해하려는 증거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단검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더이상 희망이 없음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암살을 기도한 자기를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무릎을 꿇고 여왕에게 빌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겠느냐?”

그녀는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조건을 단 은혜, 단서에 의해 속박되는 은혜는 전혀 은혜가 아닙니다.”

여왕은 그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의 은혜로 너를 용서한다.”

수행원들은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습니다. 역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던 그 여성보다 더 충성스럽게 헌신한 신하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조건을 가지거나 단서를 붙여서 나중에 어떤 담보나 약속을 요구하는 그런 은혜는 전혀 은혜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은혜는 오직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거저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될 때 그분은 그 모든 영광과 찬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제 멋대로 버려져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만 할 우리를 그분의 축복의 자리에 있게 한 것과 그분이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깨닫게 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끝없는 재난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그분의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셨습니다. 독생자를 갈보리의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가 결코 지불할 수 없는 값을 지불한 것이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이 은혜에 의해,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이 말씀에 대해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다른 번역은 거의 똑같은 내용을 시사하는데, 구원받은 죄인은 자신의 어떤 의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그분 앞에서 자신의 어떤 공로도 주장하지 못하며 오직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용서받거나 의롭게 되거나 그의 죄가 씻겨지거나 혹은 그의 더러움이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공로를 아버지께서 높이 여기셔서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그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 대해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을 믿었다면, 그것은 그분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17:8)라고 우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7:23).

나는 이 구절이 나의 성경책 속에 과연 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리석은 죄인, 나의 죄를 뉘우치거나 고백하지 않으면 밤에 잠자리에 들 수도 없는 나를, 거룩하고 흠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듯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의 증거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낸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분이 나를 위하여 그분의 아드님을 주셨다면, 그분의 아드님만큼이나 나를 사랑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아드님을 죽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 비슷한 구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심판의 관계는 우리와 심판과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심판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으심과, 그분의 영혼이 어두움으로 가려지심과, 쓴잔과, 고뇌와 수치와, 그리고 십자가의 저주를 다시 알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통과하셨고,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는 말씀처럼 진정으로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매우 오랫동안 터어키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했던 우셔(Usher) 박사의 생애와 업적을 다루는 아주 흥미 있는 책 한 권이 최근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책에서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본 내용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일하던 선교병원과 선교학교가 있던 지역의 통치자가 된 어떤 유명 인사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의지가 굳은 인물이었지만 매우 완고한 모슬렘교도였습니다. 그는 그 나라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은 1년 동안 거주허가를 받을 수 있지만 1년이 지날 때까지 모슬렘교도가 되지 않으면 터어키를 떠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터어키의 옛 법률 가운데 하나를 실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법은 오랫동안 사문화된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카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을 그 지방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정당하며, 또 모든 선교사에게는 모슬렘교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그들의 정기적인 금식 기간인 라마단(Ramadan)의 달에 모든 선교사들을 그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 전갈을 받자, 그들은 그것이 소환임을 알았습니다. 터어키 법에 의하면,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통치자의 식사초대는 명령과 버금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셔 박사는 그 통치자의 왼쪽에 앉았고 카톨릭 주교는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선교사들은 다른 위치에 앉았고 수많은 수행원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통치자는 카톨릭 주교를 향하여 존경하는 주교님, 사람이 어떻게 하면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낙원으로 인도하신다고 나는 믿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통치자는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보다 덜 의롭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에 대한 우정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고 그를 낙원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정부에 빚을 지게 되었다면, 나는 그를 감옥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내 친구입니다. 나를 봐서 그를 풀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내가 아무리 내 친구를 기쁘게 하고 싶다 하더라도 단지 우정 때문에 그를 풀어준다면, 나는 불의한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보다 덜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주교는 다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 채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우셔 박사는 엄청난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에게 질문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10:19)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었습니다.

주님, 주의 성령으로 지금 새로운 말씀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통치자는 돌아보며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낙원에 들어간다고 확신하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우셔 박사는, “각하, 각하의 예를 조금만 고쳐서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각하를 단지 이 지방의 통치자가 아닌 왕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각하의 아주 사랑하는 아들, 즉 왕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부에 엄청난 액수의 빚을 지고 있고 천 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법에 따라 저는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하잘것없지만 각하의 아드님이 저의 친구입니다. 그는 저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저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는 각하를 찾아가서 아버님, 제 친구가 정부에 빛을 졌기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가 풀려날 수 있게 제가 대신 그 빚을 갚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라고 간청했습니다. 각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고 또 그 빛을 스스로 갚겠다니 나는 기꺼이 그것을 허락하겠노라. 나도 그 일에 동참하겠노라.’ 그래서 그는 당국에 가서 남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나의 빚을 다 갚았습니다. 나는 그를 세 가지 방식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로 와서 형제여, 너의 빚이 청산되었고 이제 너는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나의 빚이 이미 하나의 채무이며 내가 법에 의해 채무를 지기 전에 이미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음을 잊은 채, 오만하게 돌아보며 안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해 빚을 갚아주는 것을 거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가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내 빚을 청산하기까지는 결코 이 감옥을 나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감옥에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 제가 그 청산 영수증을 보며 ,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뭔가 실수가 생긴 모양이군요. 왕자님께서 나에게 이런 관심이 있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뻔뻔스럽게 나갈 수 없습니다. 여기 있게 해주십시오. 경찰이 다시 나를 체포할까 무서워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옥에서 나가기를 왕자님이 계속 요청하신다면 저는 나와서 거리를 몰래 걸어 다닐 것이며 저의 집은 또 하나의 감옥이 되어 창문 밖을 내다보거나 문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만약 각하의 아드님께서 보내주신 전갈을 제가 믿지 않는다면 저에게는 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자세로, 저는 일어나서 각하의 아드님이신 왕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해서 나는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통하여 나의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자유롭게 갈 수가 있습니다. 며칠 후, 어떤 거리에서 말을 타고 가시는 왕자님을 제가 보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이 왕자님의 길을 방해하기 위해 길에 장애물을 쌓아 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길을 막으려는 그 사람을 제가 붙잡으려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달려가서 왕자님을 위해 그 길을 기꺼이 깨끗하게 치웠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고맙소. 그대의 수고에 대해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소?’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닙니다. 왕자님은 저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터어키의 통치자는 주의 깊게 듣고 조용히 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 그러면 우셔 박사께서 여기에 병원을 세워 일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그 때문에 이러한 학교들을 세우고 우리 국민을 위하여 당신과 같은 선교사들이 일생을 바치는 것입니까? 그것이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셔 박사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빚을 갚으셨기 때문에 확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 통치자는 다시 생각하다가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빚 갚은 나의 아들의 예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은 아들을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은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또 아들을 낳으신다는 사상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셔 박사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각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우리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셔야만 합니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차원이 높으며, 그의 말은 우리의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만약 제가 각하에게 조금 있다가 나는 가정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터어키 말로 전달될 때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터어키 말에는 가정’(heme)에 해당하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있다가 집(house)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건물로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건물이 있든지 없든지, 아내와 자녀들의 사랑의 품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가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언어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의 영원한 신비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과 내가 아는 것과 같은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온 관계입니다.”

그 통치자는 그들을 추방할 수 없음을 느끼고 그 사역을 계속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 지위에서 물러났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호의와 친절로써 선교사들을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은 그가 마음 깊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항상 소원했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깊은 곤경 속에 있는 우리를 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값을 지불하셨고 그 빚을 청산하심으로 우리를 왕의 가족이 되게 하셨으며 모든 죄의 오염을 씻으시고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옷을 입히시고 그리고는 왕의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사랑하는 자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생각입니다. 이에서 믿음의 순종이 솟아 나오고, 이로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하고 삶을 바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광 중에서 우리의 구세주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우리는 그분에게로 받아들여질 것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25:21).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봉사로 인하여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귀중한 값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이에 대한 헌신으로 인하여 우리는 오는 세대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1999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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