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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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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9. 16:20 횃불/1999년

도망친 노예()(7)

빌레몬에게 쓴 바울의 편지

― 제2부 실천적 교훈들 ―

R. H. 사익스

바울: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이 작은 서신에서 바울은 다섯 번이나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또는 묶인 자로서 언급한다(1,9,10,13,23). 이제는 이 말씀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바울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갇힌 자로서 나타난다. 즉 사도행전에서 네 번이나 갇힌 자로서 나타나며(23:8, 25:14,27). 에베소서에서 두 번(3:1, 4:1), 디모데후서 1:8 등에서 나온다. 적어도 열일곱 번 그가 사슬에 매이거나 갇힌 것이 언급된다( 6:20). 바울은 결박된 자로서 네 번 나타나며( 20:22, 21:11,13,33) 적어도 네 번 자신의 서신에서 사슬에 매인 바 된 종이라고 자신을 부른다( 1:10).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 그를 적어도 서른 여섯 번 언급하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주를 위하여 어떠한 고난을 받았는지! 많은 다른 성도들도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13:3).

그러나 몸이 갇히거나 사슬에 매이기 전에도 바울의 갇힌 자됨을 읽는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0 22절에서 영적으로 이미 그는 갇힌 자였고, 묶인 자였다. 그가 육신적으로 사슬에 매인 바 된 것은 그의 또 다른 포로 상태를 그리고 있다. 즉 주로 말미암은 그의 도덕적이며 자원하는 내적인 포로됨을 그려준다. 하지만 언제 이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잠깐 보았던 그가 변화되던 때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변화되기 전에는 이름이 사울이었음을 기억하라. 사도행전 7 58절과 8 1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의 죽음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읽는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죽이려 돌을 던지고 있었다. 사울은 이 일을 인정하였는데 왜냐하면 스데반은 바울이 증오하는 나사렛 예수의 추종자였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7 59,60절에서 사울은 스데반이 예수를 라고 부르는 것을 두 번 들었다. 그러나 사울과 유대인들은 스데반과 함께 예수라는 이름을 싫어하였다. 스데반이 죽은 후 사울은 더욱 더 열심히 예수를 좇는 자들을 핍박했다. 그는 그들을 매우 증오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쓸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예수를 좇는 자들, 교회를 멸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을 추적하여 찾아냈다. 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던졌다. 어떤 자들은 죽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다소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좇는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맹목 가운데서 교회를 맹렬히 핍박하면서 자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교회를 멸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1:13). 이 전쟁을 다메섹의 도시까지 멀리 확대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100마일 이상이나 더 떨어졌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어느 누구나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본다. 다메섹에서 그런 일들을 행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인 허가장도 얻었다. 얼마나 헌신적인 전사였는가! 충만한 열정과 용기는 어떠한가! 그는 경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을 것이다.

그와 조력자들이 다메섹에 다가갔다. 그들은 가까이 갈수록 더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 도시에서 증오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큰 승리를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행보는 갑자기 멈췄다. 하늘로부터 매우 밝은 빛이 비추었다. 이에 사울과 모두가 눈이 멀고 땅에 엎드러졌다.

그 때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사울은 권위있는 엄한 음성을 듣고 매우 두려워했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들었을 때, 사울은 지진이 그를 뒤흔들 듯 떨었다.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여기에 한낮의 해보다 밝은 영광을 가지신 분이 계시다( 26:13). 사울은 그런 영광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음성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단지,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였다. 그 때 음성이 대답하되 크고 분명하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다.

사울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지상에서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즉시 그가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깨달았다. 그 순간에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위대한 진리를 배웠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마음속 깊이 외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와 그의 교회에 대한 전쟁의 끝이었다. 그는 정복자에게 항복했다. 그 때 그 곳에서 그는 의롭게 됨으로 주의 포로가 되었다. 그 때로부터 앞으로는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에바브라는 그와 함께 갇힌 자라고 빌레몬에게 쓴 이 말의 의미이다.

이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들을 남겨준다. 우리는 바울의 주님에 대한 새로운 자세에 배울 수 있다.

1. 구원받지 못한 때에 그는 하나님의 적이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5:10). 근본적인 사상은 증오, 적의(敵意)였다( 1:21).

2. 증오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께 저항했다. 우리가 보아 온대로 그분을 상대로 싸웠다. 우리도 역시 반역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이었다. 그를 반대하고, 말씀에 복종하기를 거절했다.

3. 그러나 변화(회개)는 방향전환이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이다. 그분께 복종할 것이다. 그분을 주와 왕으로서 금관을 씌울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다. 이미 자기 영혼의 우두머리가 아닌 것이다. 자기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도록 한다. 이러므로 충성과 헌신이 따른다.

어째서 이런 큰 차이가 있을까? 사울은 영광의 주 예수, 곧 그의 정복자를 만났다. 사울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물론, 사울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갑자기 살아계시고 영광 가운데 계신 바로 그 예수를 얼굴을 마주하였다! 이제서야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걸 알았다.

1. 그는 예수께서 죽음의 정복자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는 그분의 영광과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정복자요, 죄와 음부 그 곳의 정복자임도 알았다, 이는 그분이 지금 하늘에 계시고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소의 사울, 자신의 정복자임도 인정하였다. 그의 얼굴이 땅에 엎드려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이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전적인 항복이었다. 그는 바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가 되었다.

-이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생이시며, 주시며, 왕이시며, 정복자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포로라고 생각했다.

고린도후서 2 14-1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쓰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당시의 로마 풍습을 소개하였다. 한 로마 군인이 어떤 도시나 국가를 정복했다고 하자. 그는 수도인 로마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전쟁 포로들을 함께 끌고 올 것이다. 전리품도 가져 올 것이다. 큰 행진과 행렬이 벌어질 것이다. 거리 거리는 정복자 영웅들을 보기를 열망하는 로마 시민들로 가득할 것이다. 큰 영예가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큰 기쁨이 그를 맞을 것이다. 그 도시는 위대한 영웅을 경배하다시피 할 것이다. 그의 힘있는 대장들과 용감한 군인들은 함께 환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정복자 뒤에는 노획한 보물들과 재물이 가득한 수레가 따랐다. 그 다음에는 사슬로 메인 포로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매우 슬프고 비참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가정과 고국을 멀리 떠났다. 아마도 사랑하는 많은 가족들이 죽었을 것이다.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들에게 깃발들과 축하는 기쁨의 시간이 아니었다. 노예로 되거나 죽게 됨을 의미했다. 진한 향기가 도로를 따라 풍기고 있었다. 정복한 지도자들에게는 그 향기는 존귀를 의미했지만 포로들에게는 죽음의 냄새였다.

바울은 지금 이런 종류의 행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보았기에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 썼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복자 영웅이었다. 고린도후서 2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 가운데 있는 포로로서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된 것을 기뻐했다. 비록 그것이 고난과 시련을 뜻한다 해도 그는 그러한 놀라운 주께 속한 것이 행복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1 16-33절에서 그의 고난을 본다. 그러나 12 10절에서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요약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행복하다 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바울에게는 가치 있었다.

전에 바울은 패배자 편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편이요, 그래서 승리자의 편이다( 8:37). 그는 죄로 노예가 되었다. 차갑고 힘든 죄의 사슬은 그로 포로가 되게 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의 금사슬이 그를 포로 삼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다-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

-그를 섬기기 위해

-그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고후 5:14,15).

또한, 바울은 그의 시련 가운데서도 주의 손을 보게 되었다. 그는 사실 로마의 갇힌 자였으나 자신을 로마의 갇힌 자라고 부르지 않고 있는 점을 주목하라. 그를 감옥에 넣었다고 유대인들을 탓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의 죄수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원인너머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까지도 주의 완전하신 지배하에 되어진 것을 인정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기쁘게 부르고 있는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디모데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서신 빌레몬서에 씌여 있다.

이러한 일들 중에 바울에게서 배울 일은 무엇일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역시 사단의 포로였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위하여 우리를 포로삼으셨다. 계시록 1 18절에서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으나 이제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시고 그의 띠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세계,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열쇠는 권위를 말한다. 소유권과 지배를 말한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사단의 군대를 정복하셨다.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분은 나를 정복하셨는가? 내 생명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가?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지배하고 계시는가? 그분께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가? 우리의 모든 생각도 그분께 복종하도록(고후 10:5) 사로잡으셨는가? 이러한 모든 길들 가운데서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들이요, 포로들인가?

 

주여, 나로 당신의 포로되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자유케 될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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