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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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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9. 16:18 횃불/1999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21)

 사무엘 W 제밍스

 21장 창세기 6장에 나타나신 주님

이제 우리는 창세기의 홍수의 역사에 접근하며 베드로의 본을 따를 것이다. 즉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일로부터 그분의 방법과 태도를 배우고자 힘쓸 것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주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의 가장 작은 일에서 가장 큰 일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놀랍게 나타나셨다. 혹자는 주께서는 예언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역사를 써 가신다는 말을 했다. 예언은 실제 역사를 미리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역사는 실제 그 일이 발생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 가운데서 이제 베드로의 서신을 따라 그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 주님의 행하신 방법을 추적해 보자. 이것을 우리는 먼저 창세기 6장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첫 번째 참고할 것이 3절에 이렇게 나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종종 복음 전도시에 사용되긴 하지만 난해구절이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여기서 영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르쳐지는데, 그분이 죄를 지적하실 때 인간의 영혼이 반응하지 않으면 그분이 애쓰기를 멈추시는 것으로 사용되곤 한다. 다른 대목들도 이러한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데, 가룟 유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이 구절이 그러한 의미라고 보기는 의문이 된다. 하지만 주께서는 그 구절로 영혼들의 회심에 강력하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구절을 그같이 사용하실 수 있으신, 종종 문맥에서 벗어나 설교되는 계시록 3 20절도 그와 유사한 경우이다.

여기서 복음적인 해석시에 나타나는 어려움이 있다. ‘애쓴다’(striveforever)는 단어는 다른 번역본에서 영원히…거하다’(abideforever)는 의미로 번역되었다(개정역).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으로 어떻게 죄인들이 정죄받고 구원받겠는가? 또한 왜 일백 이십 년이가? 오늘날 성령이 죄인들에게 이보다 더 긴 기간 말씀하시지 않는가? 이처럼 직면해야 할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홍수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염두에 둔다면, 그 구절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였다는 것이 문맥상의 흐름이다.

하나님의 영은 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그 생명의 호흡이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이제 그 생명을 다시 취하시려 하신다. 홍수로 인해 모든 육체가 한꺼번에 죽음을 당한다는 그 예언과 성취 사이의 기간이 일백 이십 년인 것이다. 이러한 성명이 발표된지 20년 후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홍수가 임했고, 당시 세대의 육체 가운데 거했던 영들이 취하여져 지금 옥에 있게 되었다(벧전 3) 그러므로 주님에 의해 그 시간이 정해졌고, 일백 이십 년이 지나자 그 심판이 도래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등되려는 인간의 시도가 종종 일어났다. 사단은 첫 여인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3:5) 하고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그러한 생각을 집어 넣는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과 동등되려는 시도였다. 창세기 11장의 하늘까지 닿게 쌓으려 했던 바벨탑도 그러한 것의 일종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을 바르게 해석하자면 그들은 천사들이다. 여자들은 그들과 기꺼이 결합하여 무언가 다른 초자연적인 자녀들을 생산하고자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목적하지 않은 어떤 것을 이루고자 애썼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라는 잘못된 발상의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는 여전히 육체이며 이 육체는 비록 천사와 혼합한다 해도 여전히 육체에 불과함을 일깨우셨다. 이처럼 그 구절은 인간은 육체로 전락된 존재로서 천사의 씨와 혼합되었어도 마찬가지임을 나타낸다.

이 모든 씨를 멸절시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신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 외에는 다 사망하게 되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보존되었다. 그들은 천사와의 불법적인 결합으로 오염되지 않았다. 노아는 500세 될 때까지는 전파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동안 그는 방주를 지었을 것이다. 그가 600세 되었을 때에 홍수가 임했다. 여기서 100년이란 기간은 3절에서 언급한 120년 보다 더 짧은 기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방주를 지은 기간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노아가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성령이 애쓴 기간이나 방주를 지은 기간으로 적용할 수 없다. 베드로전서 3장의 가르침처럼 성령이 노아의 전파시에 함께 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그 참고 구절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개입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인간의 지상에서의 수명이 단축됨의 시작인 것처럼 보인다. 그때까지는 900세가 보통이었다. 홍수 이후에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오늘날 100세까지 사는 경우가 드물다. 이 구절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성경의 많은 구절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 120년은 (1)홍수가 도래하기까지의 기간이며 (2)인간의 예상 수명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 전지하신 하나님이 제시되는데,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아무것도 그분으로부터 숨길 수 없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5),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12). 주께서는 모든 인간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알고 계시며, 그들 속에서 솟아나는 생각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2: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12:36).

큰 백보좌 심판날에( 20) 그 책들이 펼쳐질 것이고, 죽은 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몸으로 행한 것을 다 기록해 두신다. 하나님은 어떤 책들이 필요치 않으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마음과 지혜로 된 상징적인 언어일 것이다. 시편 50편에서 이러한 사상을 매우 탐색적인 면으로 언급한다. 그분은 범죄자의 목전에 자신이 범한 죄를 순서대로 펼치실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고후 5:10). 하나님은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행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과거의 많은 일들이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잊혀졌을지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로다”(고전 4:5).

이것은 물론 좋은 의미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비평에 대해 그의 동기를 혹평했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의 모든 동기가 알려질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고대했다. 같은 생각이 빌립보서 4:3에 이렇게 나타난다. “주와 복음을 위해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과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우리의 모든 부패와 악함을 주께서는 아신다. 홍수는 인류의 계속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여기서 가장 엄중한 요소는 주께서 사람의 마음의 상상혹은 생각을 아신다는 것이다. 마음이 진정한 그 사람이다. 또한 보물이 있는 곳에 그 마음도 있다. 우리는 마음에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보배로 여긴다. 이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이 빛을 비춰준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7:21). 이 구절과 창세기 6장의 생각을 비교해 보자. ‘마음의 생각그 마음의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리고 부패와 간음과 음란과―모든 육체가 부패했다. ‘폭력과 살인과―땅이 폭력으로 부패했다. 혹자는 창세기 6장의 주석이 바로 마가복음 7:21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같은 악을 보시는 주님은 그 모든 동기를 아신다. 또한 그 부패를 아시며 그분의 거룩한 성품과 반대되는 모든 반역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13). 많은 신자들에게 슬픈 일이 있는데, 특히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어떤 이들이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고린도교회가 그러한 경우였다. 그곳의 한 사람은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런 징계도 없이 신자들 가운데 그 위치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고전 5). 같은 사실이 계시록 2,3장의 교회들에게도 적용된다.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고, 악한 교리들이 고수되고 가르쳐졌다. 그러나 그 인도자들은 그것을 심판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보였다.

징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도자들의 의, 지혜, 권위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 주님이 그 네 가지를 다 가지고 계시다. 지혜는 사람들의 진짜 죄를 분별하는데 필요하며, 의는 적합하게 판단하기 위해 그리고 권위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교회와 그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다. 의로우신 주님은 악을 보시고 그분은 자신의 기뻐하지 않으심을 보이신다. 그리고 그분의 놀라운 권위로 거대한 홍수로 세상을 뒤엎으셨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그들을 구원하는데서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나타났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행하심이 유례없이 나타났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탁월하다. 애굽을 심판한 것이나, 광야와 가나안에서 그같은 예가 많았다. 다니엘은 그의 책에서 열방들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비전과 예언을 하면서 이러한 통치를 많이 언급하였다. 그의 주된 주제는 이방인의 때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은 열방들을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의도했던 것보다 더 지나치게 행하면 그 열방들을 역으로 징계하시기도 했다. 신약의 교회도 이러한 징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베드로 또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것에 대해 말했다(벧전 4:17). 사도행전에는 성령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의 징계를 받았음을 기록한다.

심판에 관해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그것이 곧바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님은 오래 참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두아디라교회에 대한 것처럼 회개의 여지를 남겨두신다( 2:21). 하나님은 죄가 발전하도록 허용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여기 그러한 경우가 있다. 심판이 임하기 전의 120년은 베드로가 우리에게 상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나타내준다(벧전 3:20). 하나님은 서두르지도 않으시고 그분의 계획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침내 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신약에 보여진다. 아버지는 그의 방탕한 아들이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을 막지 않았고, 그 아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허용했으며, 그 죄가 발전하도록 내어버려 두었다. 만일 그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심판이 그를 삼켰을 것이다. 그는 파멸 직전에 돌이켰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그 주인은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나서 그 알곡 가운데서 가라지를 갈라내어 불사를 것이다. 계시록 14:18,19은 이러한 원리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이다. 천사가 이렇게 말한다.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그때에도 주님은 죄가 발전하도록 두셨고, 회개의 여지를 남겨두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그분은 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신다.

이처럼 주님은 심판에 관한 그분의 약속에 대해 전지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그리고 신실하심이 분명하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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