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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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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5. 16:29 횃불/1999년

사랑 받는 자

성 기 숙(신림동교회)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가서 1:5).

 

몇 해 전 일이다. 잠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오는 통로에서였다. 그 날도 어김없이 웬 젊은 여자가 슬며시 내게 다가왔다. 난 금방 그가 어떤 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관심 없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일부러 걸음을 바삐 했다 그래도 계속 따라오며 잠시 예기 좀 나누자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르게 진지하면서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통에 걸음을 늦추고 시선을 주었다. 유심히 내 얼굴을 훑어보더니 슬픈 기운이 느껴지네요하는 것이다.

무슨 말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뻔하지만, 그리 급한 것도 없으니 보기 좋게 반박해서 떼어버리려고, 그가 하는 말을 일단 들어주었다

그는 조상 중에 슬프게 죽은 조상이 있어서 날 따라 다니고 있으니 조상님 잘 모시고, 집안 복()도 나 하나에 달려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같이 가서 좀 더 알아보고 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여자의 그 같은 어리석은 말은 결국 나를 흥분시켰고 더 듣고 있을 수 없게 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죽어서 받을 복까지 내게 있으니 헛고생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왔다. 그 여자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영 찜찜하고 언짢았다.

이런 자들은 주로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 진을 치고 있는데 도에 관심이 있느냐? 복 받을 상인데 기운이 막혀 있어서 풀어야 복 받는다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하여 이상한 종교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자들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말을 받아주고 상대하면서 내가 믿는 바른 도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별 소득도 없고 결국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그들이 접근해 오면 무시해 버렸다.

물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그들이 진리를 알고 있는 내게 도전해 보았자 결국은 돌아서 가지만 그날 내가 언짢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매번 그들의 표적이 되는 이유가 혹 밝지 못한 내 표정 때문은 아닐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썩지 않을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생명 없는 자들에게 소망 없는 자 같은 모습으로 비쳐진다는 게 주님께 죄송스럽고 싫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지나친 비약일 수 있지만 왠지 내 중심에서 그러한 가책을 느끼게 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본래 약간 우울질인데 거듭나고 나서도 그 기질이 변하지 않아 내 딴엔 남모르는 고민으로 그 부분을 기도제목으로 놓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을 때였다.

더구나 거듭났으니 이제 항상 기쁨이 맘에 가득하고 거룩한 삶, 성령 충만한 삶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구원받은 기쁨은 잠시, 오히려 거듭나기 전보다 더한 무거운 짐이 나를 누르며 무력한 삶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자매는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세상 짐 혼자 다 진 것 같아하는 말이라도 듣는 날에는 내 무기력한 모습이 다른 지체에게까지 덕이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낙심이 되곤 했다.

내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된 신분으로 왕의 궁실에 살게 된 공주답게 생활해야 되는데 내 모습은 여전히 흠 투성이고, 이런 내 모습을 주님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자책이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순히 쉼을 누리지 못하게 했다.

 

주님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만 하고 뭇 사람들에게도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야 한다는 생각, 물론 기특하고 옳은 생각이었지만 영적으로 갓난아이였던 내게는 그런 생각이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기어 다닐 때가 있고, 걸음마 할 때가 있고, 뛸 때가 있고, 그러다 보면 혹 날 때가 있는데 영적으로도 이런 성장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나는 아직 기어 다니며 때로는 실수도 하면서 천진하게 신령한 젖을 맘껏 빨아 속 사람을 키우고 살찌워야 할 그 때에 조급하게 뛰어야 하고 날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힘이 겨울 수밖에‥‥

 

때로 주님은 자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셔라는 어느 자매님의 위로가 내 마음의 짐을 덜어준 적도 있었다. 그보다 주님의 위로의 말씀이 내 길에 늘 함께 하셨지만 염려 가운데 불완전한 스스로를 자책하는 우울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억지로 되는 일은 아니기에 나의 이런 모습에 부담을 안고 생활하는 중에, 생명 없는 자들의 그러한 도전은 내게 찔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해, 몇몇 지역 모임의 청년들이 모인 어느 집회에서였다. 말씀전하신 형제님 입술에서 흐른 한 마디의 말씀이 주님을 향한 내 마음가짐과 태도를 한 걸음 더 성숙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치 졸고 있는 내게 찬물을 끼얹듯 정신이 번쩍 나게 한 한마디는 바로 사랑 받는 자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나태함 가운데 습관적인 염려로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생활해 오현 내게 그 한마디는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영생을 선물 받은 것만으로도 내가 매일 기뻐할 충분한 이유인데 주님 앞에 늘 엄살피우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형제님에게 들통나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무딘 마음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을 그 순간에도 난 여전히 사랑 받는 자였구나 하는 또 다른 깨달음은 마음 한편에 뿌듯한 기쁨을 샘솟게 했다.

 

마치 묘약처럼 나는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라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그러한 뿌듯한 만족감은 그 후 언제부터인가 나로 하여금 사랑 받는 자처럼 행동하게 했다.

그것은 애씀이나 꾸밈이 아니라 내 불완전함과 연약함에도 상관없이 주님으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오는 기쁨이었다. 그것은 또한 짐을 벗는 듯한 가벼움이었다.

비록 내 얼굴이 검고 계달의 장막 같아 보일지라도 신랑 되신 주님은 아름답다고 하시니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나를 맡길 믿음만 있다면 난 언제나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놀랍게도 간혹 사람들이 분비는 지하철역을 지나더라도 그런 자들을 만나는 일이 없다. 그들도 이젠 소득 없는 일에 지쳐 철수해 버렸는지, 아니면 이제 정말 내 모습에서 생기 잃은 소망 없는 자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어서 표적을 찾는 그들의 눈길을 빗겨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이제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제 일부러 지은 밝은 표정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의 눈길로부터 피하려는 웃지 못할 노력 따위는 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랑 되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나의 사랑하는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아가서 4:7)라고 하시니 나를 송사할 자 그 누구이겠는가! 나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나 자신조차 날 책할 수 없는 것을, 내 연약함은 부끄러운 것일 수 있으나 결코 정죄가 아니며, 오히려 내가 연약할 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큰 것을. 때로 마음에 먹구름 낄 때조차도 주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입김은 그 먹구름을 쉽게 날려버리시니, 이제 사랑 받지 못한 자 같은 표정을 지으며 엄살 피울 이유가 있겠는가!

 

(1999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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