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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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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5. 10:57 횃불/1999년

노아 - 그의 생애와 그 시대

사무엘 W 제밍스 지음 / 장세학 옮김

24장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위하심

창세기 7장에는 홍수의 기록이 당겨있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子원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쉽게 그 장의 표제를 붙인다면, 로마서 11 22절에서 따온 말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위하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 오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7:1). 여기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가라가 아닌 오라이다(우리말 성경 번역에는 들어가라로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들어 오라-역자주). 이를테면 주께서 이미 방주 안에 계셨으며, 그 안에서 노아를 부르신 것이다. 그분이 먼저 안에 들어가셔서 그 길로 인도하신다. 그것은 또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가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고···· 내가 들었노라.” 주님은 백성 가운데 계셨고, 이제 모세를 보내고자 하셨다. 이것은 광야 여정의 위대한 길에서도 보여졌다. 주님은 그 백성들을 앞서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하는 모든 길을 주님이 먼저 앞서 가신 것이다. 또한 요단 강을 건널 때에도 언약의 법궤가 그들 앞서 그 요단 강물 속에 들어갔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랐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 지나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앞서 가신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분은 히브리서에서 알려준 바와 같이 우리 구원의 주요 따라야 할 본이며, 다른 이들이 분명히 따라갈 수 있도록 앞서 가신 선구자이시다. 이러한 자격이 있음으로 그분은 그분의 백성들의 큰 대제사장이 되신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인간으로 오신 주된 이유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5:8). 사실 그분은 항상 순종적이시기에 순종을 배우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 의미는 인간으로서 그분의 경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분이 순종의 대가를 배웠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떤 의미에서 희생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벧전 2:21). 인내하면서 그 같은 고통을 견딘다는 것은 때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이유로 온다. 주 예수님은 우리 앞서 나아가셨다.

(1)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자격을 얻으시기 위해.

(2) 우리의 본이 되시기 위해,

(3)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어떠한 고난에서도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고난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에 주님은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자로 나타내셨다. 그것은 신앙으로 인해 죽음을 직면한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적합한 모습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일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감옥에도 계셨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겪은 것과 같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그들이 들어가게 될 그 난폭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것은 오히려 영광의 시작이었다. 그들 또한 살아날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이 먼저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그 의로운 노아의 생을 주목하자.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그것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어떤 은사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목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건함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같은 선물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청지기역할을 하는 신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 동일한 말은 번영과 주님이 사람들에게 부어 주시는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그러한 모든 축복은 그 수혜자로 하여금 주께 더욱 책임을 갖도록 한다. 하지만 주님은 의로운 생명 위에 은총으로 바라보신다. 노아가 만일 에스겔 선지자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살았다면, 그의 의로운 성품으로 인하여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14:14). 주님을 의뢰한 열조들은 그들의 믿음과 의로 인하여 건짐을 받았다( 22:4).

주께서 침례 받으실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공개적으로 하늘로부터 음성으로 선포된 것처럼 그분의 지상에서의 침묵의 시기도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지 아무런 기적도 행해지지 않았고, 아무런 사역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의인의 감추어진 삶은 하나님께 무한히 소중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자녀에게도 그러하다. 의인의 삶은 야고보가 심지어 기도의 효력에서 알려준 바와 같이( 5:16) 많은 면에서 가치가 있다. 이 부분에서 시편 34 15절을 인용한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일 수 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노아는 이같은 증거를 친히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받았다.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같은 간증은 당시의 악하고 부패하고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한층 더 빛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한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7:16)라는 진술은 얼마나 놀라운가! 노아는 스스로 그 문을 닫은 것이 아니었고,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그가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그 문을 닫으신 것이다. 우리는 그 문이 아주 든든히 잠겨졌고, 그 방주 안은 절대적으로 안전함을 알고 쉼을 누릴 수 있다. 여기서 안전은 가장 격려가 되는 것이며, 노아는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그 능력과 신실하심을 의지하였다. 지극히 작은 자나 아주 위대한 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분은 그 일을 끝내셨고,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그분은 신실하게 살아 계신다. 만일 어떤 영혼이 주님을 믿음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안전하다. 이러한 구절들은 의심할 수 없도록 매우 격려하는 하나님의 초청의 내용이며, 그 초청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신설하신 하나님만이 그같이 행하실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보여진다. 하나님은 모든 계절과 시대를 주관하신다. 그 날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7:4) “칠 일 후에 땅에 홍수가 덮이니”(10).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12). 이 모든 것이 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되었다. 홍수 이전에 주께서 미리 언급한 일련의 일정대로 그 홍수가 발생했다.

칠 일 후에 사십 주야로 홍수가 있었고, 비가 그친 뒤에 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 위에 있었다(24). 이것은 그 기간 동안 산들도 물로 덮인 것을 의미한다. 그 날이 지난 후에 방주가 아라랏산(8:34)에 머물렀는데, 이것은 달리 말해서 그 산의 꼭대기가 비로소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그로부터 사십 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8:6). 까마귀는 되돌아오지 않았지만 비둘기는 방주로 되돌아왔다. 친일 후에 그 비둘기를 다시 내보냈는데, 이번에도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칠일 후에 그가 그 비둘기를 세 번째로 보냈을 때,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방주에서 나가라하는 주님의 말씀이 임했고, 노아는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는 말씀 없이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일련의 날들은 의미심장하다. 칠 일, 사십 일, 일백오십 일, 그리고 사십 일. 각 날은 주님으로부터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

대환난도 주님에 의해 그 날이 1260일간 지속될 것( 12:6)이 정해져 있다. 그보다 하루도 가감될 수 없다.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에서 두 짧은 기간이 예시되어있다. 두 기간은 매우 중요하며, 다른 예언의 긴 기간에 비해 둘 다 상대적으로 짧다. 이것은 바로 복음서에서 참되신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과 앞으로 도래할 거짓 그리스도의 활약 기간이다. 둘 다 삼 년 반이란 기간이다. 참되신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날 동안 이스라엘은 적그리스도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율법 아래서 눈에는 눈으로살았는데, 하나님은 그 법에 따라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대환난을 1260일 보다 더 길게 한다면 아무 육체라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즉 모두가 다 죽고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24:22). 그 날들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울 것인가! 주께서는 여기서 영혼의 구원이 아닌 육체가 살아 남는 의미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천년왕국은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인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기간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 이 모든 것이 홍수에 대해 다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살펴본 이 중요한 장에서 볼 수 있다. 주께서 바로 그러한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도 계획해 놓으시지 않았겠는가? 그 같은 관점에서 바울에 대해 이렇게 언급되었다. “그는 나를 위한 택한 그릇이다. “ 주님은 또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 주께서 우리들을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 계획을 따라 삶 가운데서 우리를 빚으심은 사실이다. 그 같은 작업과 우리 경험의 간증은 모두 주님에 의해 계획되어 있다.

이같은 사상은 우리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나타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4:4). 사람의 수명을 정하는 것은 양식의 풍족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에 좌우되는 것이다. 주님이 끝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인생은 끝나게 된다. 누가복음 12장의 부자는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는데,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 사람은 그날 밤 죽었다. 그의 생명은 이 세상의 소유나 그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지만 히스기야의 경우는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그 사람이 기도했을 때 생명을 15년간 더 연장해 주시겠다는 주의 말씀이 다시 임했다. 우리의 시간과 경험과 시련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그분은 미래를 붙들고 계신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불경건한 자들에게 홍수가 임했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와 엄위하심이다. 7장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일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17-24).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주님의 진노와 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이러한 분명한 기록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을 상고해보자.

앞부분에서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은 정확히 공의로운 것이다. 주의 말씀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주의말씀이 없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 주의 말씀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5:18). 앞장에서 살펴본 베드로후서 3장에서와 같이 성경의 많은 구절이 지구가 불로 멸망할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실제 그렇게 될 것이며,하나님의 목적은 어느 것으로도 좌절시킬 수 없다. 사람들은 그가 오신다는 약속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은 밤의 도적 같이 임할 것이다. 세상은 그 일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심판은 과거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은 반드시 서게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모두가 죽었다(21).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22).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23). 모두가 다 멸망했다. 주님도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별하였다”( 17:27)고 논평하셨다.

구원도 또한 보여지는데, 방주에 들어간 몇몇만이 구원받았다. 구원은 오직 주께만 있고, 그분만이 그 길이며, 다른 어떤 길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죄인에게는 그 어떤 공로도 없으며, 오직 구세주가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이다.

그분의 하신 일은 완전하며, 모든 심판을 다 받으셨다. 아직 끝마치지 못하신 일은 전혀 없다. 그분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지상 위에 그 물이 있어야 할 날과 기간이 모두 다 주님의 통제 가운데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일들을 행하며, 무기와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발명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도 주님의 손안에 있다.

주님의 심판은 후회하심이 없으시다. 주님은 사람처럼 후회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진노하시는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그분의 거룩한 성품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지만 홍수 심판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자연적인 요소인물을 사용하셨다. 다음에 그분은 불을 사용하실 것인데 우주 가운데 있는 원자 에너지로 하실 것이다. 인간은 이제 그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주 가운데 두셨고, 그분의 때에 이 지구를 없애는데 그 힘을 사용하실 것이다. 창세기 7장에는 노아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때 세상을 심판하신 그분의 엄위하심을 다루는 중요한 구절이 담겨있다. 그것은 실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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