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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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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1. 18:29 횃불/ 2000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27)

사무엘 W 제밍스

영원한 언약

창세기 9장의 두 번째 부분은 모든 육체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룬다(8-17). 그리하여 두 가지 언약이 노아에게 전달되었다. 첫 번째는 창세기 6 18절인데, 그것은 그 세대를 심판하는 것과 연관된다. 그 언약은 노아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 중 하나였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6:18).

안전은 방주 안에 있었다. 그 언약은 어떤 이에게는 죽음을, 또 다른 이에게는 생명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써 모형으로 적용되는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일시적인 언약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9장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으로서 오늘날까지 모든 육체에게 적용된다. 이제 이 영원한 언약을 자세하게 상고해 보자.

그것은 일곱 번이나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수로서, 그것의 중요성을 암시해준다. 주님의 일은 완전하며, 이 언약은 그 특징을 나타낸다.

그 언약은 일반적인 경우처럼 양자에 의해 맺어진 것이 아니요 한 편에 의해 맺어진 일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발생하고 인간편에서의 어떤 신실함이나 장점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인 언약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다. 백성들은 율법을 지킬 책임이 있었다. 하나님은 만일 그들이 그같이 하면 그들을 축복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의 언약에서는 인간은 책임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 언약은 모든 육체, 심지어 들판의 짐승들과도 맺은 것이었다. “모든 생물”(10). 이것은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고 노아에게 한 그 창세기 6 18절과 같은 그러한 구원의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영원하다(16). 그래서 그것은 세상 끝날까지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세대마다 달리 인간을 다루셨는데, 이것은 변치 않고 남을 것이다.

그 언약의 보증은 주께서 홍수로 지구를 다시 멸망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많은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결코 전 세계적인 홍수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때로 어떤 지역에서는 황폐시키는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 나라를 징계하거나 그 지역을 다루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비를 내리지 않고 그로 인한 불가피한 기근으로 심판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언약은 하나님이 물로 전 세계적인 홍수 심판을 다시는 결코 내리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 언약의 표식은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이다. 누구나 무지개를 볼 때,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 이 언약은 8 21절의 희생제사로 인한 결과이다. 주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심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는 신약에서 분명히 밝히신 것처럼 물이 아닌 불로서 다시 심판하실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주께서는 이스라엘 집과 세우실 새 언약에 대해 말씀하셨다( 31:31-34). 이것은 히브리서 8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결과로 설명된다. 그런데 새 언약의 특징들은 9장의 그 언약의 특징들과 유사하다. 그 둘 사이의 비교는 유익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하며, 구약의 모든 모형과 그림자를 성취한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서 8장에 지적된 것처럼 다른 것에 자리를 결코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모세의 옛 언약은 그 불완전함을 인하여 지나갔지만 이것은 완전하고 흠이 없다.

새 언약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다.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8:8-11). 그것은 구약의 백성들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야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제는 일방적인 언약으로서 그들 안에 그것을 행할 능력이 내주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3:5).

여기서 그 언약이 지장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했던 것처럼 새 언약은 모든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하며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이었고, 거기에는 차별이 없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연히 아담의 머리 아래 속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머리 아래에 속하게 되며, 그들 각자의 영적인 역량과 상태와는 무관하게 그분 안에 모두가 살아 있다.

두 언약 다 영원하다. 히브리서 1325절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말한다.

그 언약의 보증은 이러하다. “그들의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

새 언약의 보증과 표시는 성령님이시다. 그분은 신자 안에 내주하셔서 그 삶을 변화시키시는데, 모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이전의 멸망하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바꾸시는 그분의 능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두 언약 다 희생제물에 기초하였다. 하나는 노아의 제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위대한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다. 모든 것은 영원한 언약의 피’( 13:25)로 아름답게 요약된다. 창세기 9장의 영원한 언약은 히브리서의 그 언약의 선구자이며, 율법의 언약과는 정반대가 된다. 모세의 율법은 행위에 기초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노아와 맺은 그 언약은 다가올 훨씬 더 나은 언약을 예고해 준다.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언약과 다가올 모세의 율법과의 차이를 주목하기를 원하신다. 율법은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며, 모든 것은 육체 가운데 있는 인간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

’, ‘내가라고 하는 대명사가 계속 사용된 것을 유의하자. 9절에서는 그 같은 표현이 두 번씩이나 나타난다.

내가 내 언약을.”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11).

내가 세우는 언약”(12).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13).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14).

내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15).

16절에는 두 번씩이나 이렇게 나온다. “내가 보고 내가 기억하리라.”

마지막으로 내가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17).

라는 대명사가 열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은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다. 십계명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열 번이나 너희는 할지니라”, “너희는 하지 말지니라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모든 책임을 맡으셨지만, 율법에서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같은 사상이 새 언약의 특징 속에서도 주목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아홉 번이나 엄위한 를 제시하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모든 것이 절대적인 은혜에 속한다( 8:8-12).

창세기 6장에서 홍수 심판을 주께서 선언하실 때, 그분이 라는 대명사를 여섯 번 사용하셨음을 보는 것은 아름답다. 이것은 두 가지를 암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축복하실 준비가 더 되어 계신다. 그분은 자신에 대한 대명사를 심판시에는 여섯 번, 축복할 때에는 열 번을 사용하셨다. 두 번째로 여섯은 인간의 수이며, 주께서는 이것을 인간이 받아야 할 심판과 연관을 지으신 것이다.

창세기 9장과 히브리서 8장의 언약들은 그 특징에 있어서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현재의 지구의 생명과, 후자는 새 지구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 전자는 자연적이지만 후자는 영적이다. 전자는 이 세상과 연관되지만, 후자는 다가올 세상과 연관된다. 물론 전자는 먼저 다가올 것의 그림자이지만, 후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9장의 그 두 부분은 아름답게 혼합된다. 1-7절은 현세적이며, 8-17절은 영원하며 다가올 영적인 축복의 전형이다. 하나님은 현세적인 벗과 영원한 것, 그리고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둘 다 돌보신다. 이러한 두 가지 일이 종종 성경에서는 함께 분류된다. 그러한 한 예가 창세기 2-3장에서 발견된다. 2장에서는 자연적인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3장에서는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속의 약속을 주셨다.

골로새서 1장에서도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사상을 함께 전개한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요, 또한 부활의 입장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 소개된다. 그분은 모든 피조된 것들의 원천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그러한 영역에서 탁월한 지위를 가지신다. 그분은 또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영적인 영역에서도 가장 뛰어나신 분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고 하는 의미이다.

이러한 두 가지가 히브리서 1 2,3절에는 다른 형태로 제시된다. 하나님은 그분을 그분이 창조하신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그것은 자연적인 영역과 더불어 죄를 정결케하신 영적인 영역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장의 첫 구절에서 말한 것처럼 주께서 자신의 자녀들의 필요를 적절한 때에 채우시며, 이 언약의 모형처럼 그들의 영원한 필요도 채워주신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지개에서 보여진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선 계시록 4장에서 발견된다. 거기서 찬양은 먼저 창조하신 주께 돌려지며( 4), 그리고 나서 구속하신 그분께 돌려진다( 5). 창세기 9장에서 무지개는 인간의 눈을 위한 것이지만 계시록 4장의 보좌에 둘러선 모습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눈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진실하시다. 그것은 믿는 이들에게 놀라운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언약의 영원성으로부터 생기는 확신이다. 그것은 단지 동물의 피에 기초한 것이지만, 새롭고 영원한 언약은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더 나은 제물에 기초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대목에서 본 것처럼 자신의 손으로 지으신 피조물들에 대해 신실하시다면,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한 성품을 유업으로 참여하체 하신 자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는가!

로마서 5장을 읽을 때 성령께서 하물며라고 하신 구절을 다섯 번이나 사용하신 것은 얼마나 확신하게 하는 것인가! 바울은 속건제에 대해서 말하며, 신자는 그가 일찍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음을 지적한다.

 

이제 창세기 9장 마지막 부분인 노아의 실패와 그 결과에 대해 상고해 보자. 이 주제는 이미 노아 그 사람이란 장에서 다룬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해 한층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다.

새 언약을 무시한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다. 그와 같이 여기서 그 언약의 가르침 이후에 마지막 장은 종종 히브리서에서 경고의 말씀으로 훈계된 것처럼 축복 대신에 심판 또는 재앙을 말씀하신다.

함은 그의 형제들처럼 신실하지 못했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합당치 않게 행했다. 함은 아버지가 장막 안에서 술취하여 벌거벗은 채 잠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함은 그의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적어도 흡족한 듯이 바라 보았고, 그 말속에는 보다 더 냉소적인 악한 의미가 담겨있다. 어쨌든 그는 예의 바르지도 않았고 분별 있게 행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분명히 노인에 대한 공경하는 배려가 없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부패로부터 구원받은 그들은 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옛 유대교를 떠나지 않았고, 그러기에 그들 스스로 재앙에 빠지게 되었다( 6:8). 심지어 광야에서도 그들은 불순종했고, 하나님은 진노하심 가운데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3:11). 그들의 불신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진노 가운데 있다( 3:10,11).

셈과 야벳은 한 의복을 취하여 그들의 어깨에 걸치고 뒤로 들어가 그들의 아비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리웠다. 그들은 경외와 존경하는 태도로 행했고, 그 축복을 얻었다.

함은 그의 아버지가 존경할 가치가 없는 어리석은 노인으로 간주했고, 그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아무런 경의를 갖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2:3).

9장은 하나님이 민족들을 나누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분은 다음 장에서 그들의 한계를 정하고 통제하신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에는 주요한 종족들 간의 관계도 나타난다.

함으로부터 가나안 족속, 그리고 바벨론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둘 다 정복되었는데, 가나안은 이스라엘에 의해, 바벨론은 메데와 바사에 의해 정복되었다. 함은 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그러한 실패를 한다.

야벳은 에스겔 38,39장에서 발견되듯이 북방 왕을 낳게 되는데, 이는 말세의 그림자로 미래의 북방 왕을 산출할 것이다. 그 또한 과거에 정복되었는데, 미래에는 보다 확대되어’(27) 그렇게 될 것이다. 야벳은 이방인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에서 큰 부분을 담당할 것이다.

셈은 이스라엘과 메시아를 낳게 되었다. 이것이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라함 까지의 중요한 계보이다.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26)라고 한 말을 유의하자. 하나님은 셈을 통하여 영광을 받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메시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 안에서 성취되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17:4) 하고 주님은 이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결과적으로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다가올 천년왕국에서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지나간 것을 복음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그것은 얼마나 즐거움이 되는가! 세 사람의 회심 이야기가 담긴 사도행전 8-10장을 보면 각각 노아의 세 아들이 나온다. 8장의 이디오피아 내시는 함의 자손이며, 다소 성 사울은 셈의 후손이며( 9), 10장에서 기쁘게 읽을 수 있는 고넬료의 회심은 야벳의 후손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창세기의 위대한 네 장들의 상고를 마치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홍수 가운데 있었던 방법에 주의를 끌었고 그 가운데 있는 세부 사항과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을 나타내었던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라야만 한다. 이와 같이 주목되어진 모든 것은 베드로에 의해 이삭 줍듯이 얻어졌고, 아마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것들도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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