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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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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1. 18:37 횃불/ 2000년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진 사역(1)

- 알렉산더 스트라우크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3:14,15)

 

우리가 모임에서 주님이 세우신 장로를 교회 앞에 알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함께 섬길 장로를 세웠을 때 외국에서 와서 일 년 가까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형제가 내게로 다가와서 큰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당신들같이 개성이 강한 사람 여섯명이 어떻게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 일을 잘할 수 있습니까?”

그는 아마도 이번에 새로 장로가 된 사람이 개성이 강한 아주 정열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러한 질문을 한 것 같다. 새로 임명된 장로는 12년 동안 스페인에서 복음을 증거했고 근래에는 우리와 함께 주님을 섬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소위 우리가 예스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강한 개성과 추진력은 인도자들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나는 대답을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각자 우리 인도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함께 일하기로 헌신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적어도 20년 이상을 연합과 사랑 가운데서 일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논의해왔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겸손, 하나됨, 기도, 신뢰, 용서, 그리고 종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셨으며 또한 직접 그러한 삶을 사셨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12제자들은 인도자들로서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함께 일하므로 이 원리를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종의 자세로 섬기는 첫 모델이 되었다.

물론 우리는 서로 의견이 안 맞기도 하고 논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질 때도 있었다. 만일 우리의 힘뿐이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지도 형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원리인 인내와 용서, 겸손, 하나됨, 그리고 사랑이 결국은 서로에 대한 자세와 행동을 다스렸다. 우리가 주님의 열두 제자들처럼 서로에 대해 실패했을 때(지금도 또한 실패하기도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고백하며 새롭게 시작했다. 만일 장로들이 자기 희생의 사랑과 겸손한 종의 자세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면 복수 장로들에 의한 사역은 어렵다.

복수 장로들이 함께 어떻게 사역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보고 그분에게 들으라.

 

종의 자세로서의 섬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그레코 로마 또한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다. 유명한 교회사가이며 교수였던 케네스 스코트 라토우레테(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는 이교도들이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면서 로마 개념의 힘과 지배가 초대교회의 구조와 삶을 부패시켜 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에는 복음과는 다른 이상이 침투해 들어왔는데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에 나타난 것과는 다른 권력 사용에 대한 개념이 침투해 들어왔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가장 비참한 것은 목사들이었다고 말했다.

초대시대의 기독교계에 일어났던 개념적, 그리고 구조적인 변화는 심각한 재앙을 가져왔다. 그 어느 종교보다 겸손한 기독교가 이 땅에서 가장 권력에 굶주리고 성직에 굶주린 종교가 되어버렸다. 주후 312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만든 다음에는 세상에서 그 믿음을 인하여 핍박받던 자들이 그 반대자들을 누구보다 혹독하게 핍박하는 자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힘과 신분, 권력을 갈망하는 비성경적인 성직자와 사제들이 일어났다. 심지어 교회의 성장에 로마 왕들이 관여를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특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를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인 형제 관계와 사랑, 겸손, 그리고 종의 자세의 원리를 볼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이러한 놀라운 교훈을 이해하는데 느리며, 특별히 교회의 구조와 지도력에 이를 적용하는데 더디다.

확실한 기독교의 지도력과 내적 생명에는 사랑과 겸손, 그리고 종의 자세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자.

 

온유와 겸손( 11:29)

예수님은 당시의 무정하고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중요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말씀하셨다.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시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온유하거나 겸손하지 않다. 그들은 지배적이고 또한 교만하다. 그들은 그들의 살찐 자아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한다. 하지만 주님은 완전히 다르셨다. 그분은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기심이 없이 섬기셨으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자(특별히 그의 사람들을 인도하는 장로)들도 자신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을 섬기는 겸손한 종( 9:33-35)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변론한 것에 대한 첫 기록에서 예수님은 주와 선생으로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의 위대함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진정한 위대함이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섬김을 받는 것이나, 권세를 잡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 심지어 가장 낮은 자까지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969-1973년까지 미국 대통령의 특별 자문위원으로 있었던 찰리 콜슨(Charles Colson)은 경험을 통하여 높은 지위와 권력의 마력적인 유혹 또는 매력을 알았다. 그는 아주 지혜롭게 권력과 지위에 대한 세속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의 다른 점을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사람들의 권력() 사용에 대해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권력 사용의 목적이 서로 정반대라는 것이다. 하나는 그 권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섬긴다. 그리고 하나는 자신을 높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구부리며, 하나는 명예와 신분을 구하고 다른 하나는 낮은 자리와 멸시를 구한다. “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 대한 콜슨의 지혜로운 경고는 음미해 볼만하다. “권력은 소금물과 같아서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된다. 권력의 유혹은 그리스도인 인도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진정한 지도력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권좌에 앉아 그 아래 있는 자들의 발을 씻기기는 어렵다. “

 

섬김과 고난( 10:35-45)

요한과 야고보는 다른 열 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기적인 야망을 드러내어 예수님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부탁하였다. 이기적인 야망이 언제나 문제를 가져오는 것처럼 그들의 요구는 즉각적으로 제자들 가운데 분개함을 가져왔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 영예를 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희생과 섬김, 그리고 고난을 위하여 부르셨다(38-45).

죤 스토트(John Stott)는 아주 예리하게 야고보와 요한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자세를 잘 대조하였다.

세상에는 (교회 안에도) 재주를 부리고 높은 자리를 구하며, 명예와 존경, 그리고 삶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며 영원한 성공을 꿈꾸는 야고보와 요한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와 같은 야망은 십자가의 길과는 맞지 않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주려 하심이라: 그분은 하늘의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종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분은 아무 두려움이나 사람들의 무시나 멸시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다. 그분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형상을 닳은 사람들의 행복이었다. 이를 이루기 위하여 그분은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기꺼이 지셨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위대함이 아닌 하나님의 법과 그분의 의를 구하므로 그분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

 

겸손한 자가 높여짐( 23:1-12)

아무도 예수님과 같이 종교인들의 교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교만과 이기심, 스스로 높임, 율법주의, 그리고 자신들을 높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종교적인 외식의 속임수를 드러내셨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6-8).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1,12).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구분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높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특별한 호칭이나 옷, 그리고 모일 때 동료들보다 높은 자리를 원했다. 그들은 드러나는 일과 공공사역을 원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과 명성을 원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호칭이나,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이나, 자신을 높여서 형제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 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께서 각 성도들에게 주신 유일한 위치를 빼앗는 것을 금하셨다.

우리 주님의 겸손에 대한 거듭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의 말과 같이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겸손은 멀리 있다

내가 나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거나 오늘날 세상에 있는 교회들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구별된 특징인 겸손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저 놀랄 뿐이다. 가르침에나 삶, 가정에서의 일상생활, 사회생활,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일들에서 겸손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

 

섬기는 자( 22:24-27)

주님의 분명하고도 거듭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잔치에서 제자들은 서로 크다고 싸웠다( 22:24). 우리는 다시 세상 지도자들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라는 인자로우신 주님의 가르침을 본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2:25-27).

슬프게도 제자들에게 있었던 경쟁적이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일한 정신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누가 가장 큰 교회를 가지고 있느냐?”

데이브드 프리올(D. Prior)예수님과 권세라는 책에서 크고 더 나은 교회에 대한 교만과 질투 때문에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악한 투쟁에 대해 말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있었던 이 경쟁은 예수님의 옆구리에 큰 가시가 되었다. 이는 고린도 교회의 병이었다(고전 3:1-15). 이는 또한 오늘날 다른 이들보다 더 낫고 크고 유명해지려는 우리들, 그리고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그 회중들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때로 작은 교회들은 그들보다 더 큰 교회들에 대해 시기와 질투심을 갖기도 하는데 이는 큰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경쟁심과 같은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나는 4교회를 거쳤는데 우연히 그 교회들이 주위에서는 가장 큰 교회들이었다. 성공회 교인으로서 나는 성공회 교회들에 참석했는데 가장 큰 어려움(장애물) 중 하나는 교회들이 그 숫자에 따라 가지고 있는 교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공하는 교회들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교회들간이나 성도들간에 있는 경쟁심은 암과 같다. 예수님은 이것이 그분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진정한 의미에서의 힘이 아닌 것을 말씀하셨다. “

 

서로 발을 씻김( 13:3-17)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싸웠던 그 밤에 예수님은 겸손한 종의 역할에 대한 본을 보여주셨는데 이는 그분의 사역의 기초였다. 이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따라야 할 본이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김을 통하여 종의 역할을 보여주셨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3:12-14).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상징이 성직자의 가운이 아니라 종의 수건인 것을 본다. 만일 우리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를 좋아하셨다면 우리도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필요와 회복을 위하여 수건을 들고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오직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알 때 겸손으로 옷 입을 수 있을 것이며 평강과 연합 가운데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랑( 13:34,35)

좋은 지도력과 건강한 교회, 그리고 다른 형제 자매들과의 좋은 관계에 대한 비밀은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13:34,35).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세 가지 교훈

우리 주님의 사랑과 겸손, 그리고 종의 자세에 대한 거듭된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첫째로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싫어하시는 죄의 목록 중에 교만이 맨 먼저 나온다( 6:16-19). 잠언은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16:5)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주 강한 경고이다. 성경은 또한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 11:2)고 했다. 야고보도 이와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4:6). 하나님은 교만을 너무 싫어하셔서 사도 바울에게 교만하지 않고 오직 창조주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후 12:7-10). 교만이 나쁜 것 중 하나는 우리를 속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오직 우리 자신만을 섬길 수 있다.

죤 스토트(John Stott)가 한 말이 옳다. “목자의 일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은 교만이다.”

교만한 인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방해가 되며, 마귀의 첫 공격 목표가 되련 (얼마나 은사가 뛰어나든 상관 없으며, 그 자신이 아무리 혼자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할 가격이 없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한 종의 자세에 대한 거듭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고 그 삶에 적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교만과 이기심은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을 속이고 지배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한 종의 모습인 그리스도 모습의 섬김,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의 섬김의 모습보다는 빌라도의 모습인 강인하고도 정치적인 일인통치를 좋아한다. 지난 2,00()년의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지나쳤다는 것이다. 교회와 개인관계에 있는 많은 문제로 인한 분리와 흉한 완력싸움, 상한 심령들, 그리고 질투들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준 교만과 이기심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심령인 겸손과 사랑, 그리고 종의 자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도자는 교회에 싸움과 분리를 가져오게 한다.

셋째, 우리 주님의 거듭된 가르침은 겸손과 종의 자세, 그리고 사랑이 교회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5,7,8).

모든 지역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난 겸손한 종의 심령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인도자는 세상적으로 과시하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종의 심령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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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