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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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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1. 11:26 횃불/ 2000년

여호수아 강해

(악속의 땅을 정복함)

알버트 맥쉐인 지음/ 서규송 옮김

서론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정복에 대한 성공담을 기록하고 있어 아마 구약 가운데서 가장 힘을 북돋아주는 책일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실수가 이처럼 거의 없으며 또 백성들 가운데서 이렇게 불평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사무엘서나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제목이 정확한 것은 매 장마다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늘 전면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가 걸쳐있는 시대는 분명 모두 합해야 고작 30년 정도일 뿐이다. 22장과 23장의 공백을 고려한다고 해도 대략 20년 정도임에 분명하고 그 안에 자세히 기록된 역사는 기껏해야 7년보다는 길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취를 이룬 이야기는 어떤 역사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2백만 혹은 3백만의 백성들이, 요새화 된 땅, 곧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이 있는 곳을 침공하여(거인들이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일은 어떤 일보다 더 큰 성취였다. 우리가 이러한 일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기적에 대한 놀라움은 더 커진다.

땅을 점령해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하여 만족시키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며 훈련받지도 못한 백성들이 이러한 놀라운 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에 수반한 초능력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성공의 비밀에 관해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거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거나, 태양이 멈춰 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다. 비평가들은 그 이야기 가운데 어떤 기적적 인 일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비범한 개입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는 것보다 그 땅이 단지 백성들의 힘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믿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다.

 

책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아홉 구절(1:1-9)의 간단한 서론에 이어, 첫 다섯 장(1:10-5)은 그 땅으로 이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고, 다음 여섯 장(6-11)은 그 땅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다루고 있고, 12장에서 22장까지는 정복한 그 땅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마지막 두 장은 후기이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기록들 가운데 성공적인 이야기를 방해하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들은 성공적인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로는 아간의 범죄(7), 기브온 거민의 전략(9), 큰 제단을 세우는 것(22) 등이 있다.

여호수아서를 신명기의 부록으로 보려는 시도가 계속적으로 있었고 5경을 말하는 대신 6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호수아서는 모세가 죽은 다음에 이야기가 전개되는 한편 5경과 같은 율법을 제정하는 특성은 전혀 없다. 우리는 본서가 구약의 역사서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역사서들은 느헤미야서까지 계속되는데, 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약 연대기가운데서 마지막 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느헤미야를 사이에 두고 관통해 있는 시대는 약 일 천년이다. 그 민족이 보좌에 맞으신 진정한 왕과 함께 다시 주도적인 역할을 할 때 또 다른 일 천년(천년왕국)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 그 역사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짧은 시기의 연대는 자세히 정하기가 쉽지 않다. 갈렙이 자신이 그 땅을 정탐했을 때 40세라고 말하고 있는 14장에의 여호수아와 대면한 짧은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유용한 통계수치일 것이다. 광야에서 38년이 더 지났다면 이는 그가 그 땅에 들어간 때는 78세라는 것을 의미하고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85세의 원숙한 나이에 달해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 전쟁은 7년간 계속되었으며 그 다음은 정착하기에 매우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우리가 여호수아의 나이를 그의 친구 갈렙과 같거나 조금 많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아마 80이 넘었을 것이고, 전쟁이 끝났을 때는 거의 90세 가까이 되었으리라. 그는 110세에 눈을 감았고 그래서 약 20년간 은거하였다. 22장과 23장은 확실히 긴 공백이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는지는 정보의 부족으로 정확히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본서의 저자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더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가 누구든 책에 기록된 사건들에 관여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호수아 자신이 기록했으며 그보다 오래 생존한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마지막 장에 주어진 세부사항들에 대하여 완성했으리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명기와 유사한 점이 있는데 마지막 장에 주어진 모세의 죽음과 매장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가 그 책을 다 썼기 때문이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 본서에서 벌어지는데 이는 가나안의 이전 거주자들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도시를 차지하며,숨쉬는 모든 것을 살육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불의한 행동과 그토록 잔인한 처사는 비록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용인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난받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자의로 그 곳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능하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더 기이한 일은 거주민들을 쫓아버린 그들을 책망하는 대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완전하게 행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예외적인 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사람의 상상 속에 있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고의 통치자이신 그분은 사람을 다루시고 그들의 많은 죄에 대해 별을 주실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로, 그리고 평야의 성읍들(소돔과 고모라)을 불로써 멸망시키면서 그분은 이미 죄 많은 자들을 정당하게 다루시는 의로운 능력을 나타내셨다. 그분이 그 진노를 행하심에 있어서 물과 불을 사용하셨다면, 동일하게 그들의 불법이 그분의 진노의 잔을 넘쳐흐르게 한 그 땅을 깨끗이 하는데 그분의 백성을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한 후에 그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비록 그들은 그분이 친히 택한 백성들이었지만) 그분은 자신에게 형벌의 권한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셨는데,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났고 여호수아 당시의 민족들처럼 혹독하게 다루어졌다. 하나님은 그 땅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셨으며, 그래서 그분이 그들의 타락한 행위들에 대해 관용하실 수 없을 때 거민들을 쫓아내셨던 것이다.

새 거주민들 역시 똑같이 사악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그곳에 그대로 남겨둔다면, 이스라엘이 당시 땅을 차지하고 있던 민족들을 쓸어버린 것은 그분에게 모순일 것이다. 이스라엘을 심판함에 있어서 그분은 그들보다 더 죄 많은 민족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포로로 삼으셨으므로 그분은 심판에 있어서 주권적일 뿐만 아니라,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 역시 그분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다른 성경들과의 관련들

 

신명기

여호수아서가 시작되는 구절은 모세가 사망한 이야기와 새롭게 관련되는데, 우리의 마음으로 신명기를 돌아보게 한다. 진정 우리는 신명기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택함 받고 세움을 입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본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인에게 안수를 받음으로써, 그리고 그가 지도자임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나타냄으로써, 백성들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지지 않았음을 확신하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새 지도자가 아는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위로였다.

신명기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이 매우 강조되었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서에서도, 특히 서두에 율법에 대한 묵상과 율법의 계명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번영에로의 왕도(王道)가 되는 표지판이라고 보여진다.

여호수아서를 끝맺는 마지막 두 메시지 가운데서 많은 참고 구절들이 주의를 끌게 될 것이다. 그는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본을 따라 백성들에게 작별한 것처럼 보인다.

 

느헤미야서

여호수아서와 느헤미야서는 관련된 점들이 다소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애굽에서 구출된 백성을 보고, 느헤미야서에서는 바벨론에서 구출된 백성을 본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정탐들이 그 후에는 그 민족이 여리고 성을 돌며, 느헤미야서에서는 느헤미야 자신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돌며 조사하고 있다. 한 책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의해 성벽이 무너짐을 말하고, 다른 책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의해 성벽이 세워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서들 중에서 이 두 책들은 가장 짧은 기간에 걸쳐져 있다. 여호수아서는 약 30년간의 역사이고, 느헤미야서는 약 12년간의 역사이다. 두 책에서 율법의 귀중함이 보여진다. 여호수아서에는 율법을 읽어야 하고, 느헤미야서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읽혀졌으며 에스라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록한다.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회개하며 금식 기도를 올릴 때,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그 민족이 얻은 초기의 승리에 대한 뚜렷한 참고 구절이 언급되었다( 9:22-25). 여호수아를 곤란하게 했던 아간이 진중에 있었던 것과 같이, 느헤미야를 곤란하게 했던 도비야와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에베소서

여호수아서와 에베소서가 관련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는데, 이 서신에는 성도들의 싸움이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 성도들이 싸우는 적들은 지상의 거인들이 아니라, 사악한 영들의 대군이며 이들의 활동영역은 하늘에 속해 있다. 여호수아서의 전쟁은 연합하여 전투하나 에베소서에는 개인적이다. 여호수아서에는 공격적이지만 에베소서에서는 방어적이다. 여호수아서에서의 기업은 점령하여 취해야 하지만 에베소서에서의 기업은 이미 얻은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는 대적은 내쫓아야 하지만, 에베소서에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여호수아서에는 전쟁터에서 필요한 갑옷이나 군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에베소서에는 필수적인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특히 강조한다. 여호수아서에는 믿음, 능력, 그리고 용기가 성공에 필수적이며,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에서 믿음의 방패와 그분의 힘의 능력으로 굳세게 서야 한다는 권면이 있다.

 

히브리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져다 준 안식은, 히브리서에서 우리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에 대한 모형으로 보여짐으로 히브리서와 여호수아서가 서로 연결점이 만들어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안식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주목할 만하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전쟁으로부터 안식하였다 11:23, 14:15).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더라”(21:44). “여호와께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다”(22: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주셨으니”(23:1). 이러한 많은 참고 구절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만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분은 자신을 여호와의 군대장관’(5:14)이라고 주장하신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인성이 강조되며, 그분은 구원의 주’(2:10)라고 일컬어진다. 여호수아서를 마감하는 고별사에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시대로부터 당시 그가 말하고 있는 그 때까지의 민족의 역사에 대한흔적을 더듬고 있다. 히브리서에는 아벨로부터 민족의 끝까지 충성된 자들의 승리의 자취를 더듬고 있다. 모세가 진밖에 장막을 쳤을 때 그는 여호수아에게 그것을 맡겼고,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3)라고 한 권고를 읽는다.

 

사도 베드로와 여호수아

주목할만한 하나님의 종들인 이 둘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둘 모두 그들의 이름이 바뀌었는데 호세아’( 13)에서 여호수아로, ‘시몬에서 베드로( 1)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남으로써 거룩하게 되었던 시내산에 여호수아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은 특권이었다. 베드로가 거룩한 산에서 주와 함께 있었던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

모세가 애굽에서 그의 이적을 행할 때에 여호수아는 그 이적들의 증인이었다. 베드로는 주께서 그분의 공적 사역기간에 행하신 주의 능력 있는 행위의 증인이었다. 여호수아는 흥해와 넘치는 요단강의 바닥을 걸어서 건너도록 허락되었고, 베드로는 주께서 폭풍으로 출렁이는 파도를 잔잔케 하심을 보았으며 출렁이는 물위를 걸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여리고 성벽은 인간이 만든 성채의 무용함을 여호수아에게 보여준 아주 두드러진 실례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감옥 문이 저절로 열렸을 때 동일한 교훈을 배웠다. 무너진 성벽은 여호수아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열린 문은 베드로를 밖으로 나가게 했다.

라합의 구원에서 우리는 한 이방 가족이 여호수아에 의해 구원받는 것을 보았으며,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고넬료의 가족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스라엘 진중에는 여호수아의 선고에 의해 그의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은 탐욕스러운 아간이 있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도 또한 탐욕스러운 한 가족이 있었는데 베드로가 책망하자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호수아의 말년이 20여 년이고 기록에 없는 베드로의 말년도 약 20년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날이 거의 다할 즈음에 그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간다고 그 민족에게 말했으나, 떠나기 전 그는 두 메시지를 뒤에 남겼다. 유사하게 베드로도 그는 이 장막을 벗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나 그가 그렇게 하기 전 그 역시 두 메시지를 남겼는데, 그가 떠난 뒤로 두 서신이 남아 있다

여호수아의 강론은 여호와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귀중함과 배도의 심각한 결과를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첫 서신은 순종의 가치에 대해 강조하며, 두 번째 서신은 배교자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한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기업으로 받은 아름다운 땅을 생각하게 하고, 베드로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언급한다.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그가 남겨두고 떠나려는 사람들이 주변의 악들에 의해 미혹당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만약에 그들이 다른 민족들의 죄를 본받으면 딱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세상의 더러움 가운데 얽매이려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며,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라고 경고한다.

 

여호수아서의 주요 말씀과 사상

대부분의 책들처럼 본서도 두드러진 특징들이 있다. “담대하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1:6), “오직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하라”(7),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8),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10:25), “그러므로 너희는 극히 담대히 하여”(23:6)(개역성경에는 너희는 크게 힘써라고 되어 있음-역주).

이와 관련하여 용사라는 표현이 본서에 처음으로 언급됨과 동시에 자주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음도 흥미롭게 주목된다(1:14). 본서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어있는 점이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1:7),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1:8), “크게 삼가····명령과 율법을 행하여····그 계명을 지키며”(22:5),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23:6).

본서에서 유념해야 할 또 다른 말씀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에 붙여진 칭호(‘언약 궤’)가 다른 성경 기자에 의해 쓰이기도 했지만 이처럼 열세 번이나 사용된 예는 드물다 골짜기들의 중요성도 역시 나타나는데, ‘골짜기가 스물 여섯 번 나온다. “맹세하다라는 말씀도 열 다섯 번 나온다. 지경(방위점)들도 자주 언급된다. “은 스물 다섯 번,”은 스물 아홉 번, “은 스물 두 번,”는 기이하게 단지 두 번뿐이다. 우리가 기대한대로 건너다라는 말은 자주 나오는데 쉰 세 번이나 나오고, “올라가다혹은 일어나다라는 말은 서른 일곱 번, 그리고 기업이라는 말은 마흔 다섯 번 나온다. 율법 가운데서 묵상함이라는 개념이 성경에 처음으로 18절에 소개된 것을 주시하는 것도 흥미롭다.

일류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중심 인물로 가지고 있는 이 성공담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임 가운데서 진정한 지도자의 특징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배워야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준비된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매울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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