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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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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1. 11:35 횃불/ 2000년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에베소서 2: 19-22)

H. A. 아이언사이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로서의 우리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중생했으며, 하나님의 가족의 권속이 되었고 또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서 우리는 아버지와 생명의 교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두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오순절에서부터 공중에서 그분을 맞이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러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의 모든 신자들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의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고린도서에서는 그것이 일정한 어느 때에 이 땅에 있는 신자들의 집합임을 말합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 세상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는 그리스도의 몸(지역교회)을 이룹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있게 될 그리스도의 몸(총체적인 교회)을 이룹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모든 차이점들이 제거되었으며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와 성령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영원토록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명사가 사용되어지는데, 하나는 출애굽기에 설명되어 있는 성막이며, 다른 하나는 역대기와 열왕기서에 서술되어 있는 영광스런 성전입니다. 성막은 일시적인 상태를 나타내고 성전은 영원히 거하실 영원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19절에서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운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서를 통하여, 사도가 이방인에게 말할 때는 너희라고 하고 유대인에게 말할 때는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 신자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1:12)라고 말하고, 그리고 나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1:13)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들은 바깥에 있었으며, 그들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선택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거룩한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속한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가운데서 남은 자로 부르신 자들만이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그 남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집의 산 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이방인도 전에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이제는 여기에 속하게 되었고. 더 이상 그들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우리가 단순히 육체적인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기준에서는 모든 권리를 잃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할 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도 동일한 복되신 주님을 믿는 참된 신자로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자를 말하는데, 거룩이란 본래 경험에 속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거룩한 자란 하나님께 대하여 구별된 자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성도를 이미 완전한 거룩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복되신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구별되었으며,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성도입니다. 그들은 성도답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에 의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시민입니까? 그것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빌립보서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3:20)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란 로마 정부에 어떤 특별한 충성을 바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성과 성실에 대한 보답으로 그 도시에는 콜로니아”(Colonial)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때로부터 그 도시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로마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아주 똑같은 특권과 권리를 가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기 얼마 전에 빌립보는 로마의 콜로니아가 되었습니다. 로마가 마케도니아 북부와 동부에 이르면서 그들은 주민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가 빌립보에 이르게 되자, 그들은 그곳에서 이미 많은 지원군을 모집해 놓고 또 그들에게 필요한 거대한 물자를 준비해 놓은 시민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장군은 그들의 충성심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여 훌륭한 보고서를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원로원이 모여 그들에게 콜로니아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빌럽보인들이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빌립보는 마케도냐에 속해 있었으며 그 정부에 대하여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는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를 대표하는 관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어떻게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지를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죄인인데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또 이 세상에 의해 버림받은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복되신 아드님께 대한헌신을 아주 귀하게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버리던 그 때에 그분을 자기의 주님으로 모신 자들과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콜로니아라는 칭호를 주노라. 그들은 하늘의 시민들이며,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노라.”

세상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우리의 의무와 우리의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 복된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는 건물의 비유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와 동일한 비유가 신약성경의 다른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 놀라운 복음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지으시는 건물에 대해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 다시 한번 그것을 보게 됩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에서도 그 내용을 보는데 거기서는 신자들을 보배로운 그 산 돌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산 돌들로 비유합니다.

구약의 경우에, 솔로몬이 모리아 산 위에 성전을 지을 때, 거대한 건물을 지탱할 수 있는 평평한 받침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돌들을 옮겨와서 견고한 반석 사이에 맞춰 놓음으로써 그 성전에 적합하게 했습니다. 그 때까지 세상이 전혀 알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 7년 만에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성전건축에 관해서는 특이함이 있었습니다. 망치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래서 돌을 떠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절단되고 깎이고 다듬어진 다음 제자리에 놓여졌고 인부가 망치를 사용하지 않고서 그것들은 함께 결합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그 누구도 산 돌이 하나님의 성전에 맞춰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하나님은 죄악의 깊은 곳으로부터 산 돌들을 채석하시며 그의 크신 능력으로 그것들을 끌어 올려 위대한 초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올려놓으십니다.

언젠가 이 성전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건축 중에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산 돌입니다. 아프리카, 인도, 중국, 그리고 바다의 섬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러한 산 돌을 찾으시며 또 그것들은 이 영광스런 건축에 사용되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실 성전으로 영원토록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성전의 산 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 누구도 스스로를 산 돌로 만들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이 놀라운 건물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라는 말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놓은 터 위에 우리가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어떤 터를 놓았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러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선포했으며, 이 터 위에서 영광스런 성전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사도들에 관해서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약시대의 사도들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포함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선포한자들이라고 대답합니다. 누가 이사야보다 영광의 복음을 더 잘 선포했습니까? 그의 놀라운 선언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5).

예레미야의 증거를 들어보십시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23:6).

스가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목자들 위에는 내가 내 은을 드리우리라”( 13:7).

이 외에도 더 많은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신약의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는 구약의 선지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구약의 선지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그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사도들보다 훨씬 전에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역순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일은 자라.”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있었던 것처럼 선지자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어,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봅니다( 13:1).

마가와 누가와 같은 신약의 기록자들은 사도가 아니고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터를 놓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초기에 하나님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신약의 사역자들을 선지자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이 영광스런 기초 위에서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있음이니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들만이 이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집니다.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피 흘리심, 그리고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은 자들만이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사역에 자기 영혼을 영원토록 맡기는 자들만이 그분과 함께 살리심을 받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들이 우리의 형제들이요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갖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모하는 우리의 동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그러나 우리는 형제라는 거룩한 말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분의 구속의 피를 발로 짓밟은 자들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리 못하리라”(16:17,18).

어떤 반석입니까?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 안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것이 그 터입니다.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실 때 이 터가 놓이게 되었고 또 이제 부활 속에서 성령님은 그리스도 위에 이 영광스런 교회를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다시피, 성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참여해야 할 불쌍한 죄인들이 남아있는 한, 그 성전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건물이 완성될 시기가 얼마나 가까웠느냐고 당신이 나의 생각을 묻는다면, 나는 거기에 참여해야 할 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건물에 있어야 할 마지막 산 돌이 그 자리에 놓이게 되면, 그 때 작업이 완료될지도 모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설전이 되어 가고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산 돌로서 성령에 의해 정확한 자기의 자리에 맞춰지게 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갑니다. “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며, 성전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완성될 때, 하나님과 어린 양이 거하실 얼마나 멋진 처소가 되겠습니까! 영원토록 있게 될 그 얼마나 훌륭한 성전이 되겠습니까! 당신이 그 영광스런 성전을 이루는 하나의 산 돌임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위한 거룩한 삶과 헌신, 그리고 그분이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당신의 영혼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과 고린도후서 6장에서는 전체 교회가 성전인데 반해,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성도 개개인이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설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리고 나서 사도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법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7)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6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설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겠느뇨.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17)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전체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린도전서 6:19을 보면, 사도는 그 상징을 개인에게로 바꾸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는 너희들의 몸이 아닌 너희 몸을 발견하게 됩니다. 개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전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는 그들이 한 무리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며 또한 신자 개개인도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경건해야 하며, 얼마나 거룩해야 하며, 얼마나 구별되어야 하며, 또 그리스도께 얼마나 충성스러워야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2:20,21을 보면, 성전에 대해, 그리고 22절에서는(내가 믿기로는)성막에 대한 사상을 보게 됩니다. 사도는 지금까지 신자들 전체의 무리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에베소 교회와 같이 일정한 시대의 어떤 그룹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오늘 어떤 장소에 세워졌다가 내일 다른 어느 곳으로 옮겨질 수 있는 성막과도 같이,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적절하게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이 입혀지고 띠들이 둘려진 잘 맞춰진 수많은 널판들로 만들어졌습니다. 각 널판 위에는 은받침을 가진 두 촉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휘장은 그룹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불쌍한 죄인들이던 우리처럼, 과거에 광야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던 나무들이 하나님의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 절단되고 또 성령에 의해 서로 맞춰지고 다듬어져서 이제는 하나님의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금으로(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입혀졌습니다. 성막에 쓰인 앙장들은 하나님 자신을 숨기는 그분의 완전함을 말해 줍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사용되는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한 무리로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만큼 이것을 깨닫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어떤 모임이나 어떤 교회든지(가장 엄밀한 신약적인 의미에서 나는 불러냄을 받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말을 씁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거룩해야 하며, 이 때문에 불신자는 이 교제에 속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 교회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세속적인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모든 것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이 땅에서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높이게 되기를 빕니다.

 

200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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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