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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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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31. 11:39 횃불/ 2000년

하나님의 행하심

한 봉 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1-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갔습니다. 이 비참한 상황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문제를 피를 통해 속함 받았던 그 제사를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이제 그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한 종을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이 하나님의 행하심이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렴풋하고 죄에 대해서도 감각이 없습니다. 그저 도덕적인 의식만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그래서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사함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겠습니까?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회심자를 얻지 못했듯이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섬기심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에 대한사람의 생각 때문입니다. 죄는 사람이 만들어낸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발생시킨 죄 문제를 사람과 상관없이 해결하십니다. 사람들의 협력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늘 단순하고 직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으로, 즉 사람의 눈에는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하심은 원래부터 사람이 믿을 가능성이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도다.”

이는 사람의 눈에 비춰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예수님의 모습,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어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독과 수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매력이나 어떤 위대한 것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섬김을 사람이 이렇게 본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지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일반적으로 그런 고난의 삶은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눈길을 한 번 주어서도 안 되는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부요하고 아름답게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거나 징계라는 생각이 사람의 머릿속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십자가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은 어떤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18:33-38).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왕’, 즉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자라고 고소했을 때, 총독 빌라도는 이 질문으로 재판을 시작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 온 예루살렘 성을 소동케 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대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2:2,3).

예수님 탄생 시에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문제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시점에서 또 한번 이 질문이 나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런데 빌라도가 이 질문을 했을 때는 액센트가 유대인의 왕에 있지 않고,’네가에 있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고소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로마의 총독으로서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들어오실 때 나귀를 탔으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그를 환영했던 것은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는 굉장히 다른 시각에서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정보도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보낸 군인들이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해온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예수님은 순순히 체포에 응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반역을 시도하는 유대인의 왕이겠는가?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그가 죄가 없는 것과 로마에 대하여 반역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하니까 다시 한번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예수님,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정말로 하나님이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셨고, 나를 만드셨으며,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이십니까?’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빌라도가 질문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의 형태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전도 받고 있는 이 말씀대로 당신은 그러한 분이십니까? ‘ 이와 같은 질문을 마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빌라도와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십니다. 빌라도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즉 이런 뜻입니다.

그 질문은 네가 진정으로 알고 싶어서 한 것이냐, 사람들이 네 입에 넣어준 말이냐? 정말로 네 스스로 그렇게 판단해서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냐?”

주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 그 사람을 군중들로부터, 무리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킨 적이 많이 있습니다. 병을 고치실 때도 병자를 따로 데리고 가신 경우도 많습니다. , 세상과 분리되어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느냐?”

빌라도의 대답은 나는 로마인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들 같은 골치 아픈 종교적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다행히 로마인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 “나는 당신이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로마인으로서, 너희들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맡아서 처리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의관심사를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유대인들은 로마를 싫어했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정복하고 강제로 식민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법을 어기는 어떤 죄인이 있으면 유대인들은 오히려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가 꼭 민족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도, 혹 죄인이라 하더라도, 로마에 대항만하면 심정적으로 그를 동정했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로마에 대항을 해서 유대인을 위한 어떤 운동을 했다면 유대인들이 그를 로마에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대로 넘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 사람이 가이사를 대항했다고 빌라도에게 고소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고소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 정도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총독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느냐? 네가 무엇을 했기에 네 동족,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왔느냐? 너는 로마에 대항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네가 실제로 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이렇게 질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 당신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빌라도는 주님의 대답을 들을 만한 상태에 있지 않았지만, 은혜로우신 주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해 주십니다.  내 나라는····

그분은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 점은 빌라도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하들이 전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나라는 이 땅에 세워지는 어떤 나라는 아니구나. 로마의 권력과 상충되는 어떤 나라는 아니구나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세상세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과 관련된 나라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과 관련된 나라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자 빌라도가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만약 모든 사람들이 백성이 되는 그런 나라가 있다면 당신이 지금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다시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대답해 주십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진리를 증거하는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째,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은 아니며,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해서, 그 복잡한 율법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귀 기울여야 되는, 그와도 관련되어 있는 진리 입니다.

둘째, ‘진리는 지식 이 아닙니다. 유명한 명제도 아닙니다. ‘지구는 돈다와 같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본인생의 실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이 진리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분리되어, 어둠과 사망과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그것을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그것은 빌라도라는 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멸망을 자초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진리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이 진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이 진리를 증거하신 왕이 참된 자유를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증거하는 분은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구원시키실 우리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로마의 총독 빌라도, 그가 자기의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에, 예수님이 말하는 이 인생의 실체에 관한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있겠습니까? 사건의 재판장이 되고 있는 그가 이 피고인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 앞에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빌라도는 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진리에 대해서는 진절머리가 난다. 해결이 없는 이 문제에 대해나는 더 이상 골치 썩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상들을 배우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리보다도 중요한 것은 권력이다. 권력만이 실제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취했던 현실적인 힘과 권력과 명예는 그에게 참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리나 거부당한 이 예수님의 진리는 오늘날도 그 앞에 무릎 끊는 사람들에게 참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4-6).

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을 파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는 그를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와 상관이 없는 어떤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죄와 그 결과를 대신 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죄는 더 이상 죄를 지은 사람을 건드릴 수 있는 힘이 없게 되었습니다. 죄가 무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것이 양의 비유를 통해 나타납니다. 양들은 풀을 먹기 때문에 그 먹이를 따라서 계속 나아갑니다. 풀을 따라 먹다 보면 먹이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위험한 지역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빠져 나을 수 없는 험한 곳에 있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무리에서 떠나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때부터가 정말 위험합니다.

양은 이때부터 어쩔 줄을 모르고 돌아다니기 시작하여,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위험하다는 의식이 생겼을 때 정말로 위험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획 없이, 안내자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추락하고 떨어져 죽는 것이 양의 모습입니다. 이 양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의 모습을, 인생의 어떠함을 성경은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낍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가 중요합니다. 그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자기의 구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8:36)

그러나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을 때에 하나님께서 한 종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케 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이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인지, 이 십자가의 피묻은 증거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3:26-43).

십자가상의 한 강도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는 상황 가운데서, 그리고 자신도 극한 고통 가운데 있는 마지막 순간, 즉 예수님을 믿기에 가장 불리한 상황 가운데에서 자기 옆에서 죽어가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그에게 자기 생명을 맡겼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나의 왕이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럴 수 있었을까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고, 이 강도도 그러했습니다. 이 강도를 위해서도 울어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이나 자식, 혹은 그와 관계된 사람들은 그가 죄인이지만 그 관계 때문에 그를 위하여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큰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많은 사람이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강도는 차이를 느꼈을 것입니다.

나하고는 다르구나.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울까? 평소에 저 사람들에게 잘 해주었었나. 저 사람들에게 뭔가 베푼 일이 많았나 봐. 어쨌거나 나하고는 다른 인생을 산 분이구나.’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신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강도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친구는 없는가. 정말 나를 위로해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은 없는가. 비록 내가 몹쓸 죄를 지어서 죽으러 가고 있지만 그래도 나를 이해한다고, 사랑한다고, 나를 용납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이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분의 마음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분은 인생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는 분인 것을, 자신의 죽음은 개의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또한 미래를 염려하고 계신 분임을 그는 보았습니다. 이분은 사람과는 다른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도록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 기도를 들었을 때 십자가상의 강도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분이 죄 용서를 구하는구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시는구나. 이분은 자신의 피를 근거로,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구나. 저 기도는 내가 해야 할 기도인데 주님이 대신하고 계시는구나.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분이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고 계시는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들의 조롱을 들으면서 강도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 이분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셨구나. 그렇다면 이 속에, ‘저희속에 내가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분이 나도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 빼놓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는 이 비난 속에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처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이 죄패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를 세우고 있으며, 이분이야말로 그 나라를 증거하는 왕으로서 통치하실 분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제 십자가상의 강도는 예수님의 기도를 근거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다스릴 나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증거되고 있는 나라, 그 나라에 저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제가 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저는 자격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은 남을 구원하셨고, 저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으므로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빌라도와 십자가상의 강도를 비교해볼 때, 누가 더 유리한 위치에서 복음을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자를 기뻐하십니다. 기꺼이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2000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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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0) 2015.07.24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