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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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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31. 11:41 횃불/ 2000년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4:25-32)

H. A. 아이언사이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25-32).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30절 말씀입니다.

근심하다라는 말은 고통을 주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게 고통을 드리지 말라.” 우리가 어떻게 성령님께 고통을 드립니까? 그것은 이 특별한 단락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훈계를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성격을 규정짓는 행위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놀라운 특권과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큰 축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책임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늘에서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따라서 행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특권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모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여주신 복된 본보기를 어떻게 배우도록 하셨는지를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예수께로 와서 물었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면 그분은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전혀 감추거나 숨기거나 가식이 없는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그분은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삶 속에 나타난 진리입니다. 이처럼 그분을 믿는 우리도 거짓된 모든 것을 버리도록 요청 받고 있습니다. “거짓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단순히 가짜에 해당되는 헬라어입니다. 우리는 허위나 속임수 등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주 작은 일에 있어서도 정확하고 정직해야 하며 또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상인이라면 물건을 팔 때 과장해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라”( 20:14).

이것이 하나님의 영에게 용납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서나 행동에서나 말에서 참되기를 요청 받습니다. 그 동기가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그는 특별히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 속에서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당신은 동료 신자를 속이려 합니까? 왜 하나님의 다른 자녀에게 거짓되게 행합니까? 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가장합니까? 왜 당신이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에게 성실하지 않습니까?”

우리 육체의 지체들이 서로 속이고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까? 한 지체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 좋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형제에게 좋은 것은 모든 형제에게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서 의무이행에 신실하기를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 구절은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잘못일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긴 하셨지만 때때로 화를 내셨습니다. 그분은 으스대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드나드는 잘난 체 하는 바리새인들을 보셨고, 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과부의 집을 저당잡고 있는 것도 아셨습니다. 저당물을 처분할 때가 되면 그들은 그 과부들을 길거리로 내어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채무를 변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의분(義憤)이 일어났고 그분의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qo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5).

오늘날 이와 같은 일에 대해 내 심령에서 의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바른 신자가 아닙니다.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자의 폭력을 보고서도, “, 모든 것이 아름답군. 하나님은 선이시며 선한 것은 하나님이시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고 또 하나님은 모든 것이지. 이세상에 나쁜 것이란 없단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비열한 자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주 예수께서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3:5)라고 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화를 내면서도 어떻게 죄를 짓지 않습니까? 어떤 청교도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을 만큼만 화를 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닌 것에 대해서만 화를 내기로 했습니다.”

사욕이 생겨나는 순간의 분노는 죄악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 때문에 내가 분노를 폭발했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데도 내가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도 죄입니다. 만약 내가 진정한 신자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을 듣고, 또 진리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보게 되면 의분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대하여는, 모든 것을 참으려 하고 견디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땅의 오물처럼 여기고 또 가장 악하게 나를 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화를 내게 되면, 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만약 당신이 죄악된 분을 품게 되고 화를 내게 된다면, 그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만약 다른 사람 앞에서 분노를 터뜨리게 되었다면, 그에게 가서 잘못을 고백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기분이 매우 나쁩니다. 참으려고 무척 많이 애썼지만 화를 내게 되었고 또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수한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합니다.

당신이 화가 났을 때, 죄를 짓기 전에 상대방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해본 적이 있습니까?”

 때때로 나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마음에 담지 않고 다 터뜨립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다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화를 내어 죄를 지을 때마다 곧 바로 상대방에게 찾아가서 그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면, 그렇게 자주 찾아가는 일에 대해 곧 싫증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게 될 것이고 이젠 자제력을 쉽사리 잃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화를 내고서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께는 그것을 고백하면서도 당신의 형제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가 당신 몸에 배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는 표현은 시편 4:4에 대한 칠십인 번역을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떨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나님 앞에서 떠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단어가 의미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칠십인 역은 그것을 분을 내되 범죄치 말지어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아마도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하며 천륜을 어기는 그의 아들의 행위를 생각하며 격분되었을 때에 기록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도 자주 위해서 기도했던 그 아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분노가 풀리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겠다. ‘분을 내되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바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의 실패를 생각해 보고 또 하나님께서 은혜로 당신을 용서해 주신 수많은 순간들을 생각해 볼 때, 당신은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신자들을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관대하게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이들이 당신의 영적 생활에 해만 끼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 것입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왜 그런가요? 분노는 악의를 품게 하고 또 사단은 그 악의의 생각을 통해 자기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려고 하며 그들로 하여금 동료 신자들에게 악하게 행동하도록 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4:12).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은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적이라 불리지 않으면서도 도적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좀도둑또는 절도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특정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이런 기준에서 느슨해지기란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어떤 사무실에서 일한다면, 이렇게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내가 일한만큼 급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무실에 대해 내가 청구할 것들이 좀 있는 셈이지요.” 연필을 훔치는 습관이 있어서 그것을 12타스나 훔친 어떤 젊은이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 후 그는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그 연필들을 가지고 어느 날 사장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 연필들을 되돌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작은 일, 다른 사람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일에 있어서도 진실하기를 요청받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지 못한 것은 얼마나 유감스런 일인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서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자신의 일에 대해서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일에 대해서도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적질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율법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율법보다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합니다. 은혜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라고 할 뿐 아니라,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하라고 덧붙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소유를 훔치지 않으면 나는 율법의 의를 따라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내게 주신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나는 은혜의 거룩함을 따라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준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제 29절에서 우리는 말의 조심에 대해 살펴보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고서”( 141:3).

그리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2).

나는 어떤 완전한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내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더불어 잠시 같이 지내며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들의 경솔함과 세속적인 수다스러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막고 또 불친절한 말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나는 그들의 완전함이란 순전히 기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여기서 사도는 말합니다.

무를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은 더러운 옛 성품에서 나옵니다. 새 성품은 거룩한 말을 하며 더러운 옛 성품은 더러운 말을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바로 나의 고민입니다. 나는 말로 인하여 언제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불친절한 말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나는 마음에 결심합니다. 그러면 다음 순간 내 혀는 얼어붙고 맙니다.”

말을 해야만 하고 또 그것을 중단할 수 없을 때, “주님, 이제 말을 하려고 합니다. 선한 말을 하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말하십시오. 듣는 이에게 덕이 되도록 말하십시오. 후회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서 밤에는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오늘 경솔하고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말한 것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벙어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말을 하도록 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제가 되어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나는 만나서 같이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과의 교제를 나누게 되면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교제의 일원인 어떤 친구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와 10분 정도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성경을 묵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게 이러이러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다른 이들의 말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또 이것은 많고 많은 경우에 나의 말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얼마나 경솔하게 말합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본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모든 신자들 속에 거하시며, 거룩하신 인격, 복되신 하늘의 손님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을 듣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거동을 보고 계십니다. 이 모든 말과 행위가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의에 위배될 때, 그것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복되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직감으로 압니다. 이것은 신자가 진리에 따라 행하지 않을 때, 성령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떠나시리라고 읽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떠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14:17).

그분이 신자 속에 거하러 오시면,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1).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은혜의 시대에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흠 없이 서는 날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떠나지 않고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쓸에 불순종할 때, 그분은 근심하십니다. 이 때문에 우리 중 많은 이들은 행복하게 되지를 못하고, 하나생과의 교제를 누리지도 못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근심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보여 주시며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근심시켜드리는 순간 그분은 기뻐하시던 그분의 사역을 중단하십니다. 그분은 이러한 일들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의 죄와 과실을 고백할 때까지 그분은 나를 거기에 매어 있게 하십니다.

이제 내가 인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기쁨을 나는 갖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구속의 날까지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의미하는 구속의 날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죽으신 날은 구속의 날이 아닙니까? 그 날은 예수께서 나의 영혼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신 날입니다. 그러나 몸의 구속을 위하여 다가오는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 복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욕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변형시킬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서 8 22,2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구속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습니다. 그 날이 되면, 옛 성품은 사라지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시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고대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말함으로 이 단락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삶의 방식을 살게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당신은 이 땅에 사는 어떤 이에게 대하여 마음에 악독을 품고 있습니까? “그러나 내가 어떻게 모독을 받았는지, 어떻게 취급 받았는지, 어떻게 모욕을 당했는지 당신은 모릅니다라고 당신은 말합니까? 만약 당신이 모독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제 당신이 이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버리라는 권고를 듣지 않으면, 우리는 그 반대편이 되고 맙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나는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해왔습니다. 언제까지나 계속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잠만 기다려 보십시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사도께서는 말합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당신은 그것에 이를 수가 있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한 것보다 당신에게 더 잘못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만약 당신이 구세주를 믿는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과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이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입니다.

 

2000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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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