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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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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콜먼

왜? 혼란의 물결이 밀물과 썰물로 반복합니다. 그것들은 당신의 생각을 흐리게 하고 육신적이 되도록 합니다. 당신의 관절은 저려오고 약해집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지라도 보람이 없어 보입니다. 시련이 시작되면 기다리는 것과 미지의 것만큼 쇠약하게 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사랑하는 욥의 경험이었으며 타고난 능력을 넘어서는 이유로 고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욥의 문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관련이 깊으며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 이 유명한 책에 교훈이 있습니다.

 

장면을 다시 말함

상황은 구약성경 기준으로도 특이합니다. 명예로운 사람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선택되며, 그의 큰 대적인 마귀에 의해 시험이 내려집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욥의 세상은 사탄 자신의 부패한 손에 의해 강하게 압박을 받았습니다(욥 1:12; 2:6).

욥은 안팎으로 공격당했고, 예고도 없이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한계에 내몰렸습니다. 단 한 번의 엄청난 일격으로, 그의 자녀들, 소유물과 생계가 약탈자와 재앙으로 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간신히 회복되었고 욥의 피부는 사탄의 타격으로 인해 기어 다니고 벗은 채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조차도 욥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인격적으로 말하면 사탄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선동한 고통과 고난의 사건들을 부채질하도록 선동합니다. 아마도 가장 힘든 시험에서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무기처럼 사용하면서 책의 대부분을 소비합니다. 그들은 그의 영적 한계를 시험하고 비난을 날립니다.

 

엘리바스가 “당신은 결백할 수 없어.” “무슨 짓을 한 거요?”라고 언쟁합니다.

“욥 당신은 회개해야 해! 이건 당신이 문제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요.”

소발의 격렬한 비난, “넌 말만 많고, 당신이 받을 것을 당연히 받는 거요!”

“당신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빛은 사라져야 해요!”

 

연속 공세를 받은 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과 의를 옹호하고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분노를 발산합니다. 그는 자신이 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정말로 모릅니다. 32장에서 엘리후는 궁극적으로 욥에게 그가 찾는 답을 줄 단계를 마련합니다. 이 젊은이는 세 친구들보다 욥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지적합니다. 고통과 고난을 인식한 그는 하나님을 높이기를 욥에게 권고합니다. “이것에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깊이 생각하라”(욥 37:14).

 

마지막으로 신성한 권위로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에서 말씀하십니다. 욥의 모든 주장은 움츠러들고 그는 주님에게 대답합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숨길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 지식도 없이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그런즉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며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 곧 내가 알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간청하오니 들으소서. 내가 말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내게 밝히 알리소서.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2-6).

 

고난의 현실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난은 권리와 잘못을 분명히 할 수 있으며 강력한 억제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로를 바꾸고 관계를 개선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올바른 일을 설정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걷어차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고난은, 피폐했던 욥처럼 실재 자포자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욥의 비탄은 의심, 불안, 두려움, 갈망,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감정적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을 자극하고, 의지를 고갈시키고 고통을 증폭시킵니다. 욥이 잿더미에 앉아 깨진 도자기로 살갗을 긁고 있는 모습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공허한 눈망울과 무표정한 한숨과 망가진 정신을 살피며, 심지어 그의 독선적인 친구들조차도 일주일 동안 혀를 내둘렀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가 옳고 거룩했던 것을 원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주 예배를 드렸고, 자신의 주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욥 1:1,5). 약속과 울타리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친구였습니다(욥 29:4). 그들의 친밀함을 감안할 때, 그것이 놀랍지 않은 것은 그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할 때 그가 버림받고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주신 욥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암흑 속에 있었지만 어디에 있습니까? 이 어둠 속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안심시키는 말도 없습니다. 침묵 속에서 그의 외침이 메아리칩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유혹, 즉 그의 희망, 그 자신, 심지어 그의 하나님까지도 크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알지 못하는 고난의 실재이며 아무도 면제되지 않습니다.

 

고난 받는 자의 반응

하나님은 두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욥 1:8, 2:3).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욥에 대해 깊은 만족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종, 물론 이 시련들은, 그만큼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의 종에게 처음으로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욥은 더 큰 고통과 손실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도 견디어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이제는 그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라, 참는 자들을 우리가 행복한 자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약 5:11).

 

욥의 경험에 관한 또 다른 놀라운 점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욥은 자신의 감성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말하고, 듣고, 보고, 느끼는 방식은 그의 주변 세상이 죄 때문에 실패했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반응을 흐리게 했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며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 곧 내가 알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나이다 ...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3-6).

 

욥은 자신의 경험에서 눈을 떼고 하나님을 인정했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숨길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욥 42:2). 그의 감정을 뒤로하고 평화와 회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왔습니다.

 

갈등의 결과

우리는 자신의 경험 안에서 왜 시련이 오는지 고심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그것은 괜찮다”라는 간단한 말을 되풀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조잡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욥이 배운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이해와 감정이 전능하신 분 앞에서 무색해집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올가미가 되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마도 성경을 오해하여, 하나님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이 배웠을 수도 있고 우리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덮을 때, 우리는 항상 선하고 올바르신 하나님을 알면서 인내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믿는 자를 위해 거기에 계십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