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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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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콜먼

룻기는 구속으로 넘쳐납니다. 타국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찾던 젊은 여자가 그녀의 모든 요망을 충족시킬 사랑과 능력을 가진 구원자인 보아스의 은혜로 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또한 룻의 충실한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된 경험에서 실제적인 손실과 회복의 흐름을 발견합니다. 이 고난 받은 성도는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쓰라림과 수치심을 극복했고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한 때 즐거운 섬김의 잃어버린 삶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장면을 다시 말함

사사들의 잿빛 구름이 베들레헴 유다 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잊어버렸고, 이제 자기들 눈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삿 17:6). 궁핍한 때가 왔을 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가족을 모압으로 데려갔습니다. 풀밭은 언제나 더 푸릅니다.

 

모압으로 가서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또한 나오미의 아들들도 소득이나 지원없이 세 여성의 가족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들의 지난 10년 손실을 생각하며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있는 그녀의 백성들의 땅으로 돌아갈 마음을 정했습니다. 며느리 룻은 그녀와 함께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예상대로 그 작은 마을은 그들의 도착으로 야단법석이었습니다(룻 1:19). 이 흥분이 환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심술부림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나오미는 고개를 숙이고 마음의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기에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강력한 의미를 가지는데 “즐거운” 여자는 이제 쓰라림이었습니다.

 

은혜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여자들은 인정 많은 부자인 보아스에게서 친족 구속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성문에서 하나님과 가족과 평화로 회복되었습니다. 나오미에 대한 이야기는 환영의 집이라는 위로 안에서 손자를 안는 것으로 끝납니다.

 

고통의 현실

따뜻한 서재에서 커피를 손에 든 채 베들레헴을 떠난 엘리멜렉과 그의 가족을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배불렀던 짧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 고난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그들을 사해 연안의 모압에서 더 나은 삶의 희망을 향해 쫓아냈습니다. 묵히고 있는 보리밭과 두 아들을 먹여 살리려는 나오미와 그녀의 가족은 세상이 하나님의 집에서 궁핍한 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정심과 겸손함으로 기억합니다. “적게 가지고도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우리는 엘리멜렉, 말론, 기룐의 죽음의 상황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농사지을 수 없는 절망 상태에서 무너졌고 아내를 위해 수년간 고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질병이 세 사람을 갑자기 닥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와 그녀의 며느리들은 잃어버린 사랑, 편안함과 부양의 현실을 느낍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잃었고, 모압의 건조한 추위는 나오미의 텅 빈 심장을 싸늘하게 합니다. 룻은 나오미가 갈망하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그녀와 그녀의 하나님을 따라 그분의 “빵의 집”으로 따라갈 것입니다.

 

나오미는 얼마나 많은 날 배를 주리며 차가운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베들레헴을 바라봤을까요? 불안과 수치심, 망가진 자존심의 손아귀에 마비된 상태에서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은 고통입니다. 유다의 땅으로 돌아온 엘리멜렉의 가족은 그의 고집스런 미망인과 그녀의 이방 며느리를 환영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손실은 산불처럼 신실한 마을 사람들 사이에 퍼질 것입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옹색한 눈빛과 어두운 문간을 짐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옛 농장 만약 그것이 여전히 있다면, 10년 후에는 잡초가 무성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보리 밭에는 가라지가 무성할 것입니다. 게다가 재력이 없는 두 여성은 그 시절에 혼자 그것을 되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녀를 다시 환영할 수 있을까요? 쓰라림 아래서 그분의 이끌림에 따라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의 고통과 자존심을 억누릅니다. 보리 수확의 시작이 있어 들판은 희망으로 빛납니다(룻 1:22).

 

고난 받는 자의 반응

C.S. 루이스의 기독교의 사례에서 우리가 잘못된 길을 들어서면 진행은 돌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것이 전진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오미와 함께 있었습니다. 모압의 고통과 손실을 떠나 그녀와 룻은 베들레헴에서 분명히 불확실한 환영을 향해 서쪽으로 걸었습니다.

 

참회하는 혼의 용기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나오미의 회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그녀의 태도와 하나님의 심판과 고통에 대한 인정은 단순한 자기 연민과 슬픔보다 더 많았음을 말합니다(룻 1:20-21). 이야기 내내, 심지어 그녀의 고난 속에서도 나오미는 주님과 그분의 영광에 대해 마음 깊이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옳았으며 어디서 복이 찾아올지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오미는 용기의 그림입니다. 남편과 아들들의 죽음이 깊은 상처를 입혔고 궁핍한 삶을 남겼습니다. 베들레헴은 그녀가 돌아옴으로 흥분했지만 수치심과 수군거림의 가능성이 그녀를 멀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시한 사람은 절망할지 몰라도 나오미는 굳게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렇게 강인한 여인을 칭찬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갈등의 결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이 그분의 백성들의 혼을 그분 자신께로 회복시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 5:10). 요단강을 건너서 모압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엘리멜렉과 나오미를 베들레헴에 돌아오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항상 팔을 펴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비록 치유되었을지라도 불순종의 상처는 나오미의 삶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오미도 룻도 베들레헴에 있는 엘리멜렉의 밭에서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들판은 사라졌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감동받아 보아스의 큰 집에서 손자 오벳을 안고 있는 나오미를 발견합니다. 오벳이란 “섬김”을 의미하며 이 고통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섬김의 약속과 새로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분명히 “상한 자들을 싸매”(사 61:1)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회복되는 신자 안에 큰 위안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옆집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요? 앞서 우리는 나오미의 귀환에 대한 베들레헴의 흥분이 환영인지 악의적인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이주자들을 포용했습니까, 아니면 피했습니까? 성문에 있는 장로들이 룻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목격했다고 선언한 것을 읽는 것은 매우 기쁩니다(룻 4:11).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나오미를 하나님께서 친히 회복시키신 여인으로 칭찬했습니다(룻 4:15).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그분 자신께로 회복된 각각의 고난 받는 성도들을 완전하고 기꺼이 받아들입시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