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그분의 변형

우리 주님의 변형은 마태, 마가, 누가에 의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왕의 위엄이 빛나고 그분의 왕국을 엿보게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완전한 종에 대한 하늘의 입증이며 헌신적이고 겸손한 봉사의 사랑스러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진정으로 의존하는 한 사람의 영광입니다. 하늘은 3년 전에 또 다른 높은 산에서 사탄의 왕국 제안을 거절했던 그분을 비추고 있습니다(눅 4:5-8). 요한은 그분의 변형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그의 복음은 영광의 복음서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변화산의 위치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다볼산이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의 불신으로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국경에 있는 헤르몬 산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모두 “6일 후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8일”이라고 말했지만 차이는 없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중간 기간의 완전한 6일만을 계산하며 누가는 또한 이전과 이후의 부분 날을 계산하고 8일이라고 말합니다. “6”은 사람의 날의 수이다. 인간은 완전한 7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날이 지나갈 때 메시아 왕국에 천년의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 “8”은 새로운 시작의 수입니다. 여기 소우주에 미리 볼 수 있는 다가오는 왕국은 이전에 새로운 질서로 사라진 모든 것을 초월할 것입니다. 가장 흥미롭고 종종 지적되고 있는데, “666”은 짐승의 수인 반면에 계 13:18의 예수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헬라어 문자의 숫자 값은 “888”입니다. 그 변형은 다가오는 왕국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야경처럼 보일 것이다. 제자들은 잠을 잤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다음날”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읽습니다. 우리 주님이 거절당한 어두운 밤에 그분의 성도들에게 영광의 광경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야고보는 일찍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의 역사적인 날, 사도행전 2장에서 민족에게 담대한 대변인이자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요한은 약 육십 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 이 가운데 몇 년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격려를 위해 영광의 광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거룩한 산의 영광을 돌아보고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요?

 

이 영광의 산과 골고다를 비교하는 것은 가장 교훈적이고 감동적입니다. 보라, 그분의 얼굴, 태양처럼 빛나는 그분의 얼굴이 변화되었습니다. 골고다에서 그것은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훼손되고 손상되었습니다. 여기 거룩한 산에서 밤의 어둠이 낮으로 바뀌었습니다. 갈보리에서는 밝은 정오에 어두워졌으며 낮의 빛은 고통의 산 위에서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장막 셋을 짓자”라고 영광의 산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러나 슬픔의 다른 산에서 세 개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 그분과 함께 나타나 그분의 죽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의 도둑이 그분이 돌아가신 산에 그분의 곁에 매달렸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변형될 때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갈보리에서 하늘은 닫히고 침묵했으며 구주께서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거룩한 산에서 그분의 옷은 하얗게 빛나고 영광 가운데 반짝거렸습니다. 골고다에서 그들은 그분의 옷을 벗겨 내고 십자가 밑에서 그분의 옷을 놓고 도박을 했습니다. 성스러운 기록에서 변형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루어지지만 실제로는 뒤따를 영광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언급한 바와 같이, “아들이 그분의 고난에 대해 증거하기 시작했을 때(마태복음 16:21), 아버지는 그분의 영광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벧후 1:17).” 사람들에 의해 수치를 당하셨던 분은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에 있어야 했다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과거의 가장 위대한 종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영광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지적인 교제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죽으심에 대해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탈출”에 대한 것입니다. 그분이 죽는 것은 단지 죽음이 아니라, 그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 그분이 성취할 그분의 출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그분을 배신하고, 체포하고, 묶고,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그분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시간에 세상에서 탈출을 이룹니다. 영광 안에 성도들은 하늘의 지성으로 이것에 대해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는 모세가 홍해를 통과했고(출 14:22) 엘리야가 요단강을 통과했다(왕하 2:8)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에게 파도는 그냥 있었고 물은 억제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거룩한 산에는 깊은 물에 들어가실 분이 계셨고 홍수가 그분을 넘칠 것입니다. 그분은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내 위로 넘어갔나이다”라고 외치셨습니다(시 42:7).

 

그런 다음 구름이 와서 그 장면을 가렸습니다. 그것은 밝은 구름이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비구름이 아니었으며 산 안개도 아니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셰키나와 비교되어야 합니다. 땅의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 물러갔습니다. 제자들은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 두려워했습니다. 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하늘 자체가 땅에 내려왔는데 “뛰어난 영광”이라고 베드로후서 1:17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질병과 슬픔이 있는 세상은 그 아래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에 대해 조용한 기억을 가지고 슬픈 세상을 지나 골고다까지 인자와 함께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광은 기억될 뿐 아니라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도 구주와 함께 그분을 거부한 세상을 걸으며, 언젠가 우리도 그분의 영광을 보고 나눌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십자가

그 어둠의 날 아침 9시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은 심한 고통의 겟세마네에서, 조롱으로 가바다를 거쳐 골고다까지 걸어 가셨습니다. 이 날을 위해 그분은 기다리셧습니다. 이제 그분의 때가 왔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이었고 그분은 흠이나 점이 없는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죽임을 당하시고 그분의 피가 흘려질 것입니다.

 

전날 밤은 어둡고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배신자는 그분에게 입을 맞추며 배신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하고 몹시 울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분을 시험했고 그분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그를 헤롯에게 보냈고 헤롯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분을 거부하는데 동참했습니다. 그분은 조롱과 중상모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에게 침을 뱉고, 때리고, 옷을 벗기고 채찍질했습니다. 그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그분은 묵묵히, 고통을 참으며, 불평하지 않았고, 그분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사 53:7). 참으로 슬픔의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고 두 악인이 그분과 함께 해골의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갈보리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리아산 언덕의 북쪽 끝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백 년 전에 마카비족은 언덕을 통과하는 고속도로를 뚫었습니다. 언덕의 더 큰 남쪽 부분은 성전 산입니다. 도성 밖 고속도로 반대편에는 골고다라는 두개골 모양이 있는 유명한 바위가 있습니다. 수세기 전에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로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창세기 22장).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희생의 장소로 이동하는 이 장면의 초기 예표였습니다.

 

적어도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의 일부분이라도, 그분은 소란과 사람들의 고함소리, 여자들의 눈물 속에서도 담담하게 걸으셨습니다. 부드럽게 그분은 이들에게 위로를 말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있도다”라고 군중이 빌라도에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년이 채 지나지 않은 AD 70년에 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파괴로 사망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갈보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시온산에 있는 가야바 집터 근처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백만, 이십 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의 모든 고통스러운 세부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노예, 외국인, 반역자들을 위해서만 도입한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다른 죄를 범한 로마 시민들도 사형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8)고 썼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과 그리스도에 관한 느낌을 위해 우리는 시편, 특히 시편 22편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분의 손과 발이 나무에 못 박혔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병자들에게 얹혀졌던 부드러운 손이 이제는 잔인하게 나무 위에 못박혔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라고 그들의 선지자는 기록했지만 그분의 발은 그분의 손처럼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거기에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졌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음은 “들림”(요 12:32-33)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자는 들려야 합니다. 어떤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까, 옷이 벗겨진 채, 악인들의 불손한 시선 중에 들렸습니다.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라고 그분은 외쳤습니다(시 22:14). ”그들은 나를 향해 입을 벌렸나이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노려보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육체적 약함은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내 힘은 … 마르고”. 그리고 이로 인해 끔찍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불타는 예루살렘 태양 아래에서 3시간 동안 매달려있었습니다. “내 혀는 내 턱에 붙나이다…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그들은 바짝 마른 입술에 식초를 발랐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고통받는 동안 그분의 옷을 얻기 위해 도박을 했습니다. 그분은 황소와 개들에 둘러싸인 온순한 암사슴이었으며 바산의 자만심과 거만한 황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 그리고 사나운 개들이 그분을 향해 둘러쌌습니다.

 

셋째 시간인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태양이 그분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태양이 빛을 잃었습니다. 땅을 뒤덮은 신비한 어둠의 세 시간이 뒤 따랐습니다. 죄없는 분이 이제 죄가 되신 것입니다. 죄없는 대속자가 죄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 따라서 그분을 다루십니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

 

수치심을 견디며 무례한 비웃음
정죄받은 날 대신해 그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피로 나의 사면을 봉인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어떠한 구주인가!
  (필립 P. 블리스)

 

제구시인 오후 3시에 그분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다 이루었다!”라는 한마디만 외치셨을 것입니다. 구원의 사역이 끝났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넘어가고 어둠은 지나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나무에 못 박혔습니다!
손과 발과 옆구리가 뚫린 채로!
당신을 위해 ... 나를 위해.

(C. 오스틴 마일즈)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