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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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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주님의 시험받은 거룩한 땅에 다가갈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인성의 유일성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우리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성이 있었다는 지적이 종종 있습니다. 에덴과 아담에는 죄없는 인간성이 있었으며, 아담의 불순종 이후로 세상에는 타락한 인간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간성은 무죄하지도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그분의 인간성은 거룩한 인성이었습니다. 그분은 지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 준비된 몸으로 살았지만 병이나 질병, 죄는 없었습니다. 또한 죽음이나 부패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하셨습니다. 그분은 여호와께서 “내 동료인 그 남자”(슥 13:7)라고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인성에는 죄의 그림자도, 얼룩도 있을 수 없었고 그럴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둘째, 영어 단어 “시험하다”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똑같이 명확히 합시다. 죄를 부추기거나 유혹하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를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이 죄에 대한 유혹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압니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시 95:9; 히 3:9)를 우리가 읽을 때, 여기서도 그런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슬프게도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이고 타락한 본성에 호소하는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슴을 치며 몸부림 친 후 그러한 유혹을 극복한다면 그것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유혹을 결코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어떤 악한 제안도 호소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분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이 단어의 다른 의미에 있습니다; “시험하다”, “증명하다”, “시련받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과 축복을 위해 그들을 증명하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분의 마음에는 우리와 같은 내적 투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의 시험과 시련은 그분의 타고난 내적 거룩함과 그분이 죄를 지으시기에 완전히 불가능함을 증명하는 데에만 기여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광야로 이끈 것은 마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성령에 이끌려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마귀에게 “너는 첫 사람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동산에서! 광야로 와서 두 번째 사람을 보라. 그를 시험해 보라! 그에게 시도하라! 그를 증명하라!” 여기에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30년 동안 갈릴리에서 거룩하게 살았으며 그분에게는 흠이 없었습니다. 잘못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 실패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과 예수님의 얼마나 대단한 대결입니까?

 

누가복음에서 기록된 세 가지 유혹의 순서는 마태복음의 순서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시험의 시간적 순서인 역사적 순서입니다. 누가는 도덕적 순서입니다.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방법을 복음서 서두에서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4장에서 그의 방법은 먼저 광야에서의 유혹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산에서의 유혹, 마지막으로 성전에서의 유혹을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의지, 그분의 인내, 그분의 순종에 대해 시험을 받으실 것입니다.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예수님은 시장하셨고 당연히 배가 고팠습니다. 마귀는 돌을 가리키며 “그것들이 빵이 되도록 명령하라”고 권합니다. 우리 주님은 신명기 8:3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광야에 있는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경험적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모든 필요를 위해 그분을 기다리며 의존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광야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의존하는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은 육체적,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중에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것이지만, 자신을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음식은 자신을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여호와를 신뢰하며 조용히 기다리실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그분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고,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그분에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 시험이 육체적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은 정치적입니다. “이 모든 권능과 그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네가 만일 내게 경배하면 모두 네 것이 되리라”(눅 4:6-7). 예수님은 신명기 6:13에서 다시 인용하셨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세상의 왕국과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인내심으로 정해진 때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계시록 13:2에서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것을 마귀에게서 빼앗을 것이지만 그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이며, 인내심을 가지고 예수님은 기다리실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성전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마귀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의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를 주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니.” 우리 주님의 대답은 신명기 6:16에서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간단히 인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정말 불신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시험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사탄은 그가 언급한 성경, 시 91:11을 완전히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의 모든 길에서”를 생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전체의 삶이 시야에 보이며, 사람이 참으로 정직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며 걸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보호하고 지키며 보존하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고의적으로 자신을 위험의 길에 놓음으로써 이것을 시험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걷는 대로 신뢰하고 신뢰하는 대로 걷습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인내와 의존과 순종이 모두 시험을 받고 입증되는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가장 순수한 은총의 완전한 길입니다,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합니다,
티없는 나사렛 사람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발끝까지도 순수하도다!

서원이 주께 있었으며 주께서 오셨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헌신은 주님의 행로를 나타내었고.
그리고 모든 숨결에 말씀하셨습니다.
   (매클로드 와일리)

 

그분의 소개

민족에게 주 예수님의 소개는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에서 소개가 있었고 갈릴리에서 소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침례 요한이 요단 강에 모인 무리에게 한 소개였으며 두 번째는 우리 주님께서 나사렛 회당에 있는 회중에게 자신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광야에 시험이 놓여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소개는 복음서 기자 중 누구도 온전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함께 오실 메시아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권면과 경고만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 희생양, 죄를 지고 가는 자로 지목된 그 역사적이고 기억에 남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침례 요한은 경고와 권면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 3:18에서 “선포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것은 복음, 복음전도자, 복음전도에 대한 말입니다. 요한이 소개한 그날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는 광야로부터의 음성(눅 3:4)였고, 다른 하나는 하늘로부터의 음성(눅 3:22)였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거룩한 조화를 이루며 복되신 분, 인류의 구주이자 아버지의 아들이신 분을 소개했습니다. 마지막 예언자는 “이 사람이 바로 그분이다”라고 외쳤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성령으로 충만하신 채 광야로 출발했습니다.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은 시험을 이겨내고 갈릴리로 돌아와 갈릴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그분 고향인 나사렛에 이르렀습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 참석하는 것이 그분의 관습이자 습관이었습니다. 건물은 꽉 찼을 것입니다. 시끌벅적한 군중들이 전통적인 인사말인 “안식일 살롬을 주고받으며 이리저리 오가곤 했을 것입니다. 모든 성인 유대인 남자들은 그날의 성경 부분을 읽을 권리와 특권을 가졌고, 이 날 우리 주님은 이 권리를 취하시고 일어나 읽으셨습니다. 담당자가 그분에게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 책을 건넸습니다. 주님은 조용히 침착하게 두루마리를 펴서 그곳을 찾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사야 61장입니다. 그분은 첫 번째 구절과 두 번째 구절의 일부를 읽었지만 그 두 번째 구절의 중간에 갑자기 읽기를 마치고 두루마리를 접어서 담당자에게 돌려주시고 그분은 앉으셨으며 참석한 모든 사람의 눈이 그분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민족에게 메시아가 공식적으로 소개되려는 순간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첫 말씀은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이 성경 기록이 이 날 너희 귀에 성취되었느니라.” 얼마나 자주, 이전 안식일에도 이같은 부분이 그들에게 읽혀졌지만 결코 이와 같은 말씀은 없었습니다. 은혜의 말씀이 이어졌고 그들은 듣고 궁금해하면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서로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성취되고 있는 이 성경 구절은 무엇일까요? 그때에 주님께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다루고 읽으실 당시에도 사해 동쪽 해안에서 약 65-70마일 떨어진 쿰란에 있는 토기 항아리에 이미 이사야의 예언서 정확한 사본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요? 그곳에 서기 1947년까지 숨겨져 있었고, 이 사본이 나사렛에서 공개적으로 읽히기 약 이백 년 전부터 우리를 위해 신성하게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사야 61장의 기쁜 소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들에게 구출을, 눈 먼 자들에게 시력을, 압제당하고 눌린 자들에게 치유를 선포합니다. 물론 그것은 어떤 사람이 이 기쁜 소식을 누리려면 반드시 가난, 속박, 실명 및 상처를 인정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죄는 실로 민족과 모든 개인에게 이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며 참회하는 사람은 마음에 상심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이 상심한 마음은 이사야 61장의 본문에는 있지만 누가복음 4장에서 읽은 기록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JND, RV 및 기타 참조). 우리 주님은 그분의 회중에 그러한 마음의 상심이나 회개의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것을 생략하셨을까요?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느꼈든, 알았든, 몰랐든 이것이 그들의 도덕적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고, 파탄하고, 속박되고, 죄로 상처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속자가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나사렛 예수님 안에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너무 거만하고 도도해서 자신의 상태나 구원할 그분의 힘과 능력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자신을 거부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은혜로 주님의 받아 들일만한 해를 선포했으며 원수 갚으시는 날을 그들에게 읽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원수 갚으시는 날을 가져오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을 영접한다면 그분은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원수 갚으시는 날이 나중에 올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과부가 있었고 엘리사 시대에도 나병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렙다의 이방인 과부와 이방인 나아만이 복받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 찼고, 격노하여 일어나 그분을 그들의 성읍이 세워진 산 꼭대기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절벽 위에서 그분을 던지려 했지만 그분은 그들 가운데를 통과하셨고 나사렛에서 거절당하신 채 그분은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소개된 이날에 그들의 반응은 또 다른 날 3년 후 그들이 자신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또 다른 언덕의 예시일 뿐이었을까요?

 

그렇게 그분이 오셨습니다. 오랫동안 약속되고 기다려온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분은 심지어 사역의 초창기에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원하지 않았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계속되는 동정심을 되새기고, 인내하면서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에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분은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함을 받으실 것입니다(살후 1:10).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