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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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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3

로빈 매키온

진해 모임을 방문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장을 보겠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저는 이전에 여수모임 첫날 집회에서 1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소개를 위해서 몇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쓴 전서입니다. 몇 개월 후에 후서를 썼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을 했습니다. 1~9절까지 밤에 몰래 아주 서둘러서 그 성을 빠져 베레아로 나왔습니다. 그 핍박의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임에 유대인들이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약간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들을 모욕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잡혔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는 분들이 바울과 실라가 그 성을 빠져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떠나는 것을 대단히 어려워했습니다. 빨리 가고 싶은데 그것을 계획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고자 했지만 방해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임은 생긴지 얼마 안되는 모임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떠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믿음도 역시 어렸습니다. 핍박 때문에 그 어려움이 여러가지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또한 이 데살로니가는 대단히 부도덕한 성이었습니다. 이곳은 아주 상업적인 도시였고 항구도시였습니다. 이곳은 동서로 뻗는 도로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는 도로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방에서 로마로 가는 도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구가 20만 정도 된다고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성은 카산다라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처남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이름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그래서 카산다는 그 아내의 이름을 따서 이 성의 이름을 데살로니가로 지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아내를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던 바울은 이 도시에 있는 모임을 아주 염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바울은 기도를 했습니다. 편지를 써서 디모데에게 들려서 보냈습니다. 말씀드린 이것이 배경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중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을 봅니다. 첫번째는 그들이 통과할 환난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3절입니다. 또한 유혹이 있었는데 5절입니다. 자세히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1~5절까지는 디모데의 임무와 역할입니다. 디모데에게 일을 주어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에 관한 일이고 또한 디모데의 일이었습니다. 6~8절은 디모데의 돌아옴과 보고입니다. 9~13절은 바울의 칭찬과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9절에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1~13절은 바울의 바램인데 11절에서는 그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는 데살로니가의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는 데살로니가의 장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3장에 관한 개략인데 이 장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너희의 믿음이 걱정되어서 쓴다고 말했습니다. 3장에서 너희 믿음이라는 말이 5번 나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2절 마지막 너희 믿음에 대하여

5절 중반에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7절 마지막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7절에 또 한번의 믿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0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여기는 바울의 마음의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시험에 있어서와 그들이 받는 유혹에 대해서 믿음에 섰는지 어떤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개인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번의 언급에 특히 10절의 말씀이 개인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몸된교회에 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믿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개인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분명히 앞으로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건전을 위해서 믿음의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서 어떤 믿음의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모임 내에서도 믿음이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어야 됩니다. 22:31,32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밀까부르듯 하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이것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의 시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여러분의 믿음이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쪽에서 믿음이 실족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폭풍우 가운데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의 기록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서는 너희들이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도한 누가복음의 동일한 기사에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폭풍우 속을 통과하게 됩니다. 제 자신을 생각해도 그런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로 문제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까? 폭풍우 가운데서도 주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동일한 기록의 마가복음 기사를 보게 되면 왜 그렇게 무서워 하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두려움을 말씀하심을 기억하십시오. 두려움=믿음 없는 것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개 즉 믿음 없음과 두려워함은 매우 근접해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의 폭풍 속에서 사도 바울의 믿음은 강력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사람들 앞에 설 정도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음은 두려움 있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한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붓을 들었습니다. 벧전 1:6,7에서 믿음의 시련에 대해서 기록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사람들의 믿음을 향상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믿음이 시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살전 3: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이러므로는 앞에 나오는 기록과 연관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참다 못하여 나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 못 참겠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염려해서 그랬습니다. 앞으로 오는 시련에 대해서 바울은 걱정을 했습니다. 2: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잠시 너희를 떠났다는 말은 아주 강력한 말입니다. 이것은 버려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울이 뭔가를 잃었다는 의미와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임의적으로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가기를 사실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계획이 없이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매우 민감했습니다. 잠시 떠난 것은 얼굴이요라고 했습니다. 3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얼굴이 떠난 것이지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얼굴을 떠났지만 다시 그들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18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바울은 그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17절의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한두번 가기를 원했지만 너희를 못 봤다. 나 바울은 이것은 매우 개인적입니다. 바울의 서신 중에 아주 강력한 표현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18절 종반이 중요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는 사단이 어떻게 막았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어떻게 사단이 막았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어떻게 막았는지 바울이 알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사단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게 되면 아시아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금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는 사단이 아니고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못 전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대 바울은 분명히 주님이 부르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분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는 분별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방향을 잘 분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사단이 막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의 다른 목적 때문에 막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사단이 막았습니다.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데 바울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보기를 원했지만 사단이 막았습니다. 어쨌던 바울은 또 보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게서 강림하실 때 보기를 원했습니다. 17,18절의 내용이 바로 3장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한 두번 가기를 원했지만 사단이 막았습니다. 그래서 3:1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내가 가능한 가고자 했지만 가지 못했다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이것은 매우 오랜 기다림의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로 빨리 떠나야 한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거기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지만 다시 그 쪽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여왕이 자기를 말하면서 우리라고 말할 때는 이것은 제왕적인 1인칭을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도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라고 말했지만 바울 자신이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생각을 하면서 우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실라는 빌립보로 보내졌습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 혼자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말할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디모데에 대해서 3가지를 말했는데 우리 형제, 하나님의 일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선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선한 일에 대해서는 선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인정된 일군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디모데를 보냈는지를 봅시다.

2절 마지막에 보면 두 가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굳게 하고 위로함으로 굳게 한다는 이 말은 세워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굳게 하고란 말은 눅 16:26절과 관계 됩니다. 큰 구렁이 끼어 있어(맞추어져 있어-영어) 굳게 구렁이 있다와 관련이 있으며 동일한 헬라어가 쓰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움직이지 않고 굳세게 서 있기를 원했습니다. 16장의 그 큰 구렁은 변동시킬 수 없는 꽉 끼어 있는 구렁이었습니다. 그것을 돌파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유혹과 시련이 아무리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닥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견고함에 서 있기를 바랐습니다.

위로 함으로 너희 믿음에 대하여 놀라운 말이 아닙니까? 너희 믿음이란 말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시험과 유혹으로 말미암아 공격 받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믿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

3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환난 중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러 환난 중에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3절에 알리라 4절에 아느니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5절에도 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5절의 안다는 4절과 다릅니다. 우리가 친히 알리라를 보면 어떻게 알았습니까? 4절을 보면 빌립보서 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다소의 사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해서 어떤 일을 당할 것인지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난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16:33에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대한 요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고난을 받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아주 혹독합니다. 아마 한국의 여러분들도, 저도 영국에서 틀림없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영국이 급속도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들이 환난에 대해서 안 이유 중에 하나는 바울이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2:3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속임으로 환난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리 말하였더니 이것은 미완료시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환난을 당하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걱정한 것을 고시한 것입니다.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여기에 3,4절에서 쓰는 동사와 또 다른 동사를 볼 수 있습니다. 3,4절에서 안다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환난을 당하고 있는지 충분히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알기 위하여 안다는 동사를 썼지만 그들의 믿음을 알지 못해서 써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의 알다는 너희들을 알기 위해서 보낸다는 알다 입니다. 알다는 말을 썼지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다 못하여 라는 바램을 나타내었습니다. 너희들이 환난을 당하는데 그것을 이전에 그것을 말했었다. 너희 지금의 믿음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는 현대적인 기술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통신이 발달했습니다. 이전 20세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통신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대학에 간다면 이메일이 없거나 핸드폰이 없으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난 세기보다 통신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에 바울이 이메일이 있거나 핸드폰이 있었으면 그것을 통해서 빨리 알려고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뿌린 씨의 결과인 그들이 하고 있는 바를 간절히 알기를 원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을 알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두번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들의 환난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시험이었습니다.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이것은 과거시제입니다. 더 이상 시험하는 자가 시험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염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승리를 이미 얻었나 하는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계속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쓸 때조차도 바울은 너희들을 내가 염려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사탄이 지금 현재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2:18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일꾼을 방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막았습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꾼을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사탄은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능한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을 공격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궤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6절 이것은 이 부분의 두번째 부분이며 바울에 관한 것입니다. 디모데가 돌아와서 바울에게 보고하는 대목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인칭 대명사가 9번 나오는 것을 잠시 봅시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머지 하고 비교하는 비교가 있습니다. 2절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요동치 않기를 바랬습니다. 이것은 환난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5절에서는 시험하는 자의 염려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6절을 아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와서, 여기에 너희가 있고 우리가 있음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을 했으며, 너희가 우리를 생각하고 너희 하고 우리가 있는 인칭대명사를 보십시오.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여기에 9번이나 인칭대명사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은 걱정했는데 너희와 우리를 통해 구분하면서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너희, 또는 너희, 우리라고 번갈아 표현했습니다. 디모데가 한 일을 주목해보십시오. 너희에게로부터 우리에게로 와서 그런 의미입니다.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디모데가 돌아와 보고하는 것이 얼마나 바울에게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여러분이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디모데가 가지고 온 소식이 무슨 소식이었습니까?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통 이 말은 복음을 언급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때만 기쁜 소식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돌아왔을 때 복음에서 사용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을 써서 자신의 기쁨을 표시했습니다. 여기서 누구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까? 바울을 걱정케 했던 그 사람들의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임이 바울에게 큰 기쁨을 갖다 주었습니다. 6절에 또 다른 무언가 있는가 봅시다.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6절 마지막에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쌍방의 관계입니다. 바울을 기억하고 바울도 그들을 기억했습니다. 디모데를 통하여 우리가 너희를 보기 원하고 너희가 우리를 보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있던 애정이 나타난 것입니다.

7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노라 이것은 매우 놀라운 표현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았노라 디모데를 보내어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2절에 보면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라는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했고 디모데가 기쁜 소식을 가져와서 이번에는 바울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이것은 돌봄에 대한 표현입니다. 2:7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7절에서는 자녀를 기름과 같이 했다고 했는데 자녀를 기르는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합니까? 어린 아이를 깊은 애정을 가지고 돌봅니다. 3:7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는 마치 아이들에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실망하고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바울 스스로가 당하고 있는 환난에 대해서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들 가운데 믿음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환난과 시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8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리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표현된 유일한 곳 중에 하나입니다. 이미 살고 있는데 살리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저는 9절이 이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9절에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살리라는 육체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 표현되는 기쁨을 말합니다. 이제는 복되다 할 때 표현하는 표현과 같습니다. 생명이 없다가 삶을 갖는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산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기쁨을 가지고 산다라고 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변했습니까? 주 안에 견고히 서므로 이것은 바울이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미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좋은 소식을 듣고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이것이 바로 3절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니 너희가 요동치 않고 굳게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산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섰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주권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이 세상에서 온갖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한가지는 주님 안에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써 보낸 편지 가운데도 있습니다. 고전 16:13믿음에 굳게 서서 5:1 굳세게 서서.

9절 바울이 이 서신에서 3번째 드리는 감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1:2에서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했습니다. 2:13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여기는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기보다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말했습니다. 감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충분한 감사가 안 나온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좋을지 모른다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가져온 기쁜 소식에 너무 기쁜 나머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감사가 있는데 그 감사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기쁨을 기뻐하니라는 감사가 나갔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10절에 보면 주야로 간구했습니다. 기도가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의 승리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해 있던 그 위험에서 환난을 이겼고 시험을 이겼습니다. 놀랍습니다. 9절에서 그 기쁨을 말하는 가운데 주야로 심히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어려움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우리를 하늘로 가는데 결코 막아낼 수 없습니다. 2장에서는 밤낮으로 수고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주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간구를 했습니까? 동일한 것을 놓고서 기도했습니다. 너희 얼굴을 보고. 2:17을 보면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기쁨이라는 말이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나 2:18에서는 사단이 우리를 막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믿음에 관한 부분이 나와 있습니다. 3:10에서는 주야로 심히 간구하는데 너희 얼굴 보기를 원해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너희 믿음의 부족을 온전케 함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믿음 첫째로 바울은 이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여기에 단 한번 개인적인 믿음이 아닌 믿음이 나와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믿음 그 이상이라고 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할 때 바울은 아주 빨리 움직였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 믿음의 부족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에게 기초적인 믿음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너희 믿음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2:18절에서 사단은 역사를 하며 막았습니다. 3:10에서는 주야로 얼굴 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역사하고 있지만 바울은 계속 얼굴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11절에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을 직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마 사단이 방해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행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더 이상 사단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6절에서 이미 사랑을 보였습니다. 디모데가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그 사랑이 넘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이 말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사랑이 넘쳐서 더 넘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도 바울의 사랑이 더욱 많이 넘쳤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한 바울의 걱정은 그들이 환난과 시험을 통과한 데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넘치기를 원했습니다.

살후 1:3,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전서에서 말한 것이 바로 후서에서 나와 있는 셈입니다. 3절 중반에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전서에서 바울이 그들의 믿음을 걱정했는데 후서 1장에서 전서에서 말한 그 믿음이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전서에서 바랬던 사랑의 풍성함이 후서에서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걱정했던 환난 중에 요동치 않는 것이 후서에서 이미 해결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라고 했습니다. 이 성도들이 있는데를 여러분이 아십니다. 그들은 모본이 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전서 1장에서는 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모임에 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전서 3:13 12절에서는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를 보았습니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사랑은 그 자체가 끝이 없습니다. 사랑은 목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이 말씀을 이전에 드릴 때에 전서 모든 장에서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어려움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서신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더 자세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진해 모임을 크게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 2 8() 진해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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