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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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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들

로빈 매키온

오늘밤은 역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말 중에 하나입니다. 역설이라는 것은 두 개념이 명백하게 대립이 되는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마음으로 보면 이 역설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역설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그냥 보게 되면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이 되겠습니다. 왜 그렇게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물론 역설이지만 저에게는 말이 됩니다. 오늘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역설은 무언가 어떤 공식을 갖다 주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의 공식을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역설이 되겠습니다. 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역설로 들리는고 하면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8절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또 동일한 생각 가운데 너희 생각은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내 생각은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에 볼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일러주게 될 것입니다.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을 비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큰 격차가 있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이것은 비유의 방법입니다. 비유컨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라고 했습니다. 우리 길과 하나님의 길,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만 있을 뿐 아니라 이 차이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땅과 하늘의 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역설을 이해를 못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을 말하는 다른 곳을 보겠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 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대목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첫째는 육의 사람이 있고 이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3장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지만 영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2:15에 보면 신령한 자가 나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문제는 14절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왜 받지 못하는고 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와 여러분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분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역설이 우리들에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9절이 바로 중심 말씀이 되겠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30절에도 내 멍에는 여러분 멍에를 마음속에 생각하십시오. 논밭은 갈 때 소 두마리를 함께 쓰는 도구입니다. 함께 밭을 갈기 위해서 멍에는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두마리의 목에 걸쳐서 함께 하도록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를 메고라고 하셨습니다. 29절 마지막에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경건치 않은 자들은 깨달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쉼이 멍에 아래서 발견된다는 역설을 말입니다. 경건치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평안을 원하고 쉬고 싶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모든 멍에를 치워야 쉬겠다고 생각합니다. 5:39,40에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왜 그리스도에게 가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기 싫어서 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멍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둘을 함께하게 하는 멍에입니다. 이것은 또한 권위에 순종하는 멍에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주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사람은 아니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쉬기 위해서 어떤 멍에도 필요 없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쉼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러분이 함께 그리스도 밑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게 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배우기 원한다면 이 구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보통 이렇게 표현하기를 그들이 자기의 교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2편은 놀라운 시편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관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시편입니다. 2: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오늘 저녁에 목적하는 말씀이 지금부터 나옵니다. 3절에 군왕들과 관원들이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맨 것과 결박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맨 것과 결박한 것은 소들은 안전하게 맨 것과 결박한 것입니다. 이 군왕들과 관원들이 말하기를 그 결박과 그 기름부은 자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기름부은 자의 그 맨 것과 결박한 것을 끊어버리자, 없애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은 자의 멍에 아래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은 자를 거절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과 가치를 거부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멍에 아래 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왜 이렇게 끝이 나는가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라고 하나님이 화를 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님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님들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복된 영적인 입장에 들어가게 되면 또한 여러분의 영혼이 쉼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기를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원한다면 29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는 그에 대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15:3에서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거기서 배웁니다. 또 빌 2장을 보면 그분께서는 높이 계신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아주 낮아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12:45에 의하면 주님께서 그 공생애를 마칠 즈음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첫번째 부분이 바로 생각하기를 원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멍에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가의 이유입니다. 동일한 그 생명을 얻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멍에를 또한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주님 되심을 거절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절하고 내 말을 받지 않으면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의어(동의어)인데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13장에 주님께서 가나에서 어떤 저녁 식사 때에 하신 일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하는 일을 알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29절의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그 뜻인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입니다. 멍에 아래서 쉼이 발견된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압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의 길인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얼마나 높은고 하니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높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것도 역설이 아닙니까? 큰 자가 섬긴다고 했습니다. 큰 자가 종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12절 종반에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은 세상에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을 세상에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저는 이전에 큰 조직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텝이라 불리는 요원들이 있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요원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높아지려면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20:25~28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이 25절에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는 일을 합니다.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25절의 사람의 생각인데 26절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25절은 이 세상의 길입니다. 여기에 믿는 자들 사이에 길이 있습니다. 26절에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이것은 역설입니다. 세상하고는 다른데 세상에서는 큰 자, 즉 위에 있는 집권자들 높은 자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이라고 언급한 것 중에 두 가지의 용어가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종은 노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방법과 길이 아니며 역설입니다. 여기에 어떤 역설이 있습니까? 여기에 겸손과 높아짐이라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이 영적으로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27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11:28,9절을 기억하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20 28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게 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은 참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지금 현재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제는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가운데 계십니다. 이분은 정말로 낮아지셨습니다. 성경은 모든 하늘을 통과해서 하늘로 가셨다고 히브리서 4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하늘까지 높이 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장에서는 하늘 그 자체에 들어가셨습니다. 2장에서 그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참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2:9에서는 아버지께서 지극히 높여, 그 겸손이 지극히 높음으로 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상은 이 말이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 딸 중에 하나가 책을 하나 사 왔는데 성경공부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책의 제목이 모택동의 이름 중 모라는 이름의 책이었습니다. 700페이지나 되는 아주 두꺼운 책인데 내용이 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모택동은 높은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는 올라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나니 즉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벧전 5:5에서 겸손하라고 권면하면서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너희 자신이 겸손하라고 성경은 말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계속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 스스로는 겸손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14, 18장에서 두번이나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만약 자신을 높인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입니다. 여기에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주님게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보았습니다만 사 42:1에서 여러분과 저를 초청하시는데 나의 종을 보라고 초청을 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종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를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기에 높이 되셨습니다. 성경에는 반대에 관한 것들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결코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는 행동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임에서 영적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고전 3:18,19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이것을 다루기 전에 겸손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프리카 격언 중에 여러분이 만약 나무에 올라가려 하면 나무 밑 둥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기초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결코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올라가는 것을 알고 올라가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밑에서부터 올라간다는 것을 결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덴 크로포드라는 스코틀랜드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 큰 일을 한 전도자였습니다. 이분이 쓴 책을 보았는데 그는 의사였지만 전도인이었습니다. 책 제목이 검정을 생각하다는 책이었습니다. 그 제목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분이 쓴 내용은 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책이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전도를 갈려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 책을 썼습니다. 이 큰 분이 쓴 말이 있는데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전도를 갈 것 같으면 여러분은 충분히 몸을 낮추어야 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더운 아프리카로 갈 것 같으면 충분하게 몸을 낮추어라고 이분이 썼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아프리카로 가지 말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높음의 지름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서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고린도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 사람들의 생각하는 문제점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이 구절이 하는 의미는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말씀드린대로 역설입니다. 역설은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웃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려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의미를 파악하셨기를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하는 말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부산에서 진리를 보면서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모임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다음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말을 합니다. 이 하는 말의 의미는 명백하게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미련한 자가 되어라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 라는 뜻입니다. 다음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이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바를 보기 바랍니다. 헛것으로 아신다라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역설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놀라운 것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미련하게 되어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미련하게 된다는 역설입니다. 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되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웃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묻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지혜롭게 되는 것인데 예를 하나 들어보면서 어떤 초점을 찾고자 합니다. 저는 럭비 선수였는데 아주 공격적인 선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나중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 받은 지 3개월 후에 저는 럭비를 그만 두었습니다. 럭비뿐만 아니라 술집에 가는 등. 이런 것들을 그만 두었습니다. 럭비 선수 중에 제가 좀 거친 선수였는데 심판이 제 얼굴을 치려고 할 정도로 거친 선수였습니다. 럭비 선수를 그만 두었는데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제가 럭비 선수를 택했다면 제가 여기 있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여기에 있기를 원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지도하던 지도자 그 사람은 럭비에 아주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럭비 코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말하기를 저에게 앞으로 2년 후에 아일랜드의 대표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도자가 저에게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저는 아일랜드의 럭비선수가 될 뻔 했습니다. 제가 그만 두었을 때 그 지도자는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너는 바보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는 성경을 몰랐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 4:10에서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큰 교훈이 있습니다. 이 역설 즉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미련하게 되어야 한다는 이 역설에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미련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지혜롭게 되는 준비를 말이죠. 사도행전 26장 가이사랴에서 총독 베스도가 바울에게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바보라고 보았습니다. 정말로 바울이 바보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비보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모임의 교제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은 세상사람들이 보기를 바보라고 보고 종교계도 그렇게 볼 것이며, 여러분들을 눈 아래로 볼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복을 입은 목사들도 아닙니다. 그리고 감독들도 아닙니다. 특별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모임에는 어떤 장식도 없습니다. 어떤 형상도 모임 안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 사람들이 미쳤구나!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에 대해서 미련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은혜롭습니다. 이 세상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두시고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여기에 있는 역설은 무엇입니까? 놀라운 것은 종이 되기 위해서 종이 되었습니다. 종에서 해방되어서 또 다른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 아닙니까? 이 말씀도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말씀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말이 안되는 말이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측에서 볼 때 미련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종이 되기 위해서 종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18절에 죄에게서 해방되어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으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18절 마지막을 보면 해방이 되었지만 다시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 종은 노예란 뜻입니다. 놀라운 해방이 되고 자유로워졌는데, 14절에 보니까 더 이상 죄가 주관치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종입니다. 이제는 죄가 아니고 의의 종입니다. 의는 죄와 반대가 됩니다. 요일 5:17모든 불의가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은 많은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에게 어쩌면 여러분의 가족, 직장, 학교, 등에서 여러분이 해야 될 것을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를 선택하게 될 경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때때로 우리는 선택의 비용을 지불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만일 거짓말 하는 압력에 처해지게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이 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의를 택해야 합니다.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이 구절 초반에도 죄에서 해방된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저의 생애에서도 해방된 경우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를 지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죄를 짓기는 하지만 계속 짓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6장 초반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에서 10)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는 죄를 계속 행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종, 즉 노예가 되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하게 되면 하나님의 종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21:5,6에 보면 히브리 종이 희년에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종이 말하는 순서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 때 그 주인은 문으로 데려가서 귀를 송곳으로 뚫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 종은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이후에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결혼한 아내와 저의 자녀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 나의 아내와 나의 자녀가 모두 우리의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는 바는 73:25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가 하늘에 계시니 이 땅에는 그 분 외에는 나의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는 나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고후 12: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9절 중반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10절 종반에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것도 역설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약할 그때에 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어떤 편의점에 가서 사람들 앞에 서서 나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다고 말해보십시오. 아마 여러분을 의사에게로 데려갈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에 있는 역설은 아주 단순합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약하다고 말할 때 바울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약한 것과 강한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약한 것은 나의 것이고 강한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여기서 뭔가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넉넉하게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 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약합니다. 물론 우리들도 약합니다. 약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역설인데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산에서 엡 6장을 교제했습니다. 바울은 이 위대한 대목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6:10에서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했습니다. 그 힘의 능력으로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여러분은 힘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강해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의 힘이 아니기에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도 역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약해져야 합니다.

이 일을 구약을 통해서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삼상 17장에 강한 골리앗이 있습니다. 그는 강하고, 크고,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틀채 같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다윗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큰 거인이 칼을 들고 창을 들고 방패를 드는 사람까지 데리고, 그 앞에는 작은 체구의 다윗이 있는데 창도, 칼도, 방패도 없습니다. 또한 가슴에 흉갑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약함의 표시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 블레셋 사람과 네가 싸우러 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보니까 어린 젊은 사람이라 왕까지도 다윗을 눈 아래로 보았습니다. 사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윗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양은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자와 곰이 다윗이 기르는 양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양들을 구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블레셋 사람을 다윗이 대항하기 나왔습니다.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은 모욕하고 무시했습니다. 명백하게 다윗은 약합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물매를 가졌습니다. 물매 주머니 안에 돌 다섯개를 가졌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실 것입니다. 강력한 거인이 쓰러졌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주일학교에서 교사가 어린아이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돌을 아실 것입니다. 그 돌이 거인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적은 소녀 아이가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거인이 피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그 아이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일학교 선생님이 가르친 것은 그 돌을 하나님이 인도했다고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다윗은 명백하게 약합니다만 다윗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에서 나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나를 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약한 자의 그림자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는 강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받는데 때때로 매우 더딥니다. 이 역설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첫번째는 멍에 아래 있는 쉼의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두번째는 낮아짐이 즉 겸손이 높아진다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세번째는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어리석어지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네번째는 노예가 종이 되기 위해서 종에서 풀려나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강해지기 위해서 즉 약해짐으로 강해지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전체 역설들을 만약에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떤 처방전 또는 설명서를 가지게 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승리의 비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 2 13() 강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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