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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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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로빈 매키온

오늘 저녁에는 구약에 있는 자그마한 책 룻기 1장으로 가겠습니다.

1:1~6, 16~22

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이 룻기는 성경의 가장 놀라운 작은 책 중의 하나이며, 사실 이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많은 해설서들에서 이 룻기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가장 존경할만한 사랑의 이야기가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읽기를 좋아하며 특히 여성들이 더 그러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오직 2권만이 여성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룻기와 에스더서입니다. 그렇게 긴 책이 아닙니다. 여성의 이름으로 된 두 책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에스더와 룻은 매우 높게 평가받는 여성이었으며 둘 다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여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방인 왕과 결혼했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었는데 대단히 높은 신분의 유대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여러분은 룻이 다윗왕과 연결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룻은 다윗의 큰 할머니(증조모)뻘 됩니다. 또 룻은 솔로몬과도 연결이 되는데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기둥이 둘 있는데 하나의 기둥 이름이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룻기는 연결되기를 한 쪽은 사사기와 연결이 되고 또 한 쪽은 열왕기와 연결이 됩니다. 즉 한 쪽은 사사기와 연결이 되며 한 쪽은 왕정으로 들어가는 사사기와 연결이 됩니다. 사사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21: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은 이 당시에 왕이 없었습니다. 룻기가 어떻게 끝나는 가를 보면 4: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에 마지막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다윗이었습니다. 사사기에는 왕이 없으므로라 했고 룻기에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이름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룻기에는 대단히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룻기는 슬픔의 깊음이 아주 깊은 기록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를 보면서 고통의 깊음을 보겠습니다. 룻기는 대단히 큰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바로 이러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경우에는 아주 깊은 고난의 구덩이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자녀들이 깊은 슬픔 가운데 빠집니다. 그러한 가운데 어떤 경우는 대단히 높은 기쁨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1절에 룻기가 어떻게 시작이 되는가를 봅시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성경에 ~때에 라고 하는 표현이 나올 때는 구약에서 ~때에로 말하는 경우가 400번 정도 나오는데 많은 경우에 이것은 과거를 말하면서, 또한 좋지 않은 일들이 뒤따라 나옵니다. 룻기에도 바로 그렇습니다. 룻기의 초반은 대단히 슬픈 기사로 시작됩니다. 오늘 저녁에 나가는 말씀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기근을 다루겠습니다.

두번째는 가족을 다루겠습니다.

세번째는 궁핍함, 즉 곤궁을 다루겠습니다. 이 가족은 궁핍에 빠졌습니다.

다음으로 몇몇 장례를 다루겠습니다.

놀랍고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이 서신은 양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먼저 1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겠습니다. 1~5절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기근은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 나왔습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께서 통치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6~18절은 회복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회복되어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22절은 은혜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룻기의 배경을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사기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잠시 사사기를 보겠습니다.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발생한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에 좋은 분이 있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때때로 위기가 닥쳐옵니다. 좋은 사람들은 드물기에 그런 사람들이 돌아가시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탈을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사사기 초반에는 좋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1-2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초기의 자세를 봅니다.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다시 주목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는데 우리와 가나안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이 아닌 자들과 구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의 대상은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와 가나안 사람이 구분이 안된다면 그것은 재앙일 것입니다. 모임 내에서 우리와 그들로 모임내에서는 성도들간에 구분되면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들과는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과 싸우려고 했습니다.

2: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러분들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에 관한 태도입니다.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좋지만 그러나 사사기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10:11~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때때로 모임 내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있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북아일랜드로 가시면 저는 아주 좋은 젊은 형제 자매들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젊은 세대는 또 다른 어떤 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세대를 봅시다. 기본적인 문제는 10절 마지막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여호와 앞에서 악을 범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지만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13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일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사라진 것이며, 주변 사람들과 같아져 버린 것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여호와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대적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버렸습니다.

17장을 보면 여기는 룻기의 기본적인 배경입니다. 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가증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7:6절의 말씀에 반복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주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임에서도 이런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열 두 남자와 한 여인이 기록된 책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김의 책입니다. 사사기는 짐(꺽임)의 책입니다. 사사기에는 4중으로 된 순환이 있는데, 반복되고 반복하는 4중으로 된 흐름이 있습니다. 4개의 순환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배역하고 배역 때문에 징계를 받고 다시 회개하고 회복되는 것이 4중으로 된 순환입니다. 회개하고 회복되고 배역하고 응징의 보응을 받고 회개하고 또 회복되는 순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시대는 아주 슬픈 시대였습니다. 룻기는 역사적으로 사사기 초반에 해당하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룻기로 돌아갑시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이 표현은 대단히 중요한 때입니다. 왜 사사기에 대한 것을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룻기에 대한 배경을 보았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게 되는데 매우 슬픈 일입니다. 이 땅은 어떤 땅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20번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까? 여기에 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은 이 땅을 묘사해 보겠습니다. 이 서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땅들은 바위들이 많은 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후가 매우 더운 땅입니다. 물이 많지 않은 건조한 땅입니다. 바위산들이 많고 덥고 강의 물이 적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곡과 산이 있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물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에서 물이 내리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물을 받지 않으면 물을 가질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임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15장에서 주님께서 내가 없이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장에 산과 계곡이 있는 땅인데 하늘에서 비를 내려 흡수하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계곡에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 말에 순종하면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룻기 초반의 흉년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만약에 불순종하면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흉년과 기근이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땅은 곡식을 내지 않음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흉년이 그 땅 전체에 있었는데 특별히 그 땅 중에 베들레헴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풍요로운 땅 중에서도 특별히 풍요로운 땅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떡집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다 베들레헴에서는 떡을 기대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송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떡집에서 찬송이 있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에 떡집에 떡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디서 떡을 얻겠습니까? 여러분 명백한 것은 하나님의 모임은 떡집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 모임에 영적인 양식이 있어야 됩니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은 장로들을 훈계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벧전 5:2에서는 양무리를 치되 했습니다. 모임은 떡집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모임에 떡이 없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당해야 되는데 베들레헴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은 합당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떡집에서 태어났습니다. 6:32에 내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참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6:33에서 생명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떡집에서 흉년으로 기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흉년이 있었을 때에 이삭도 흉년을 경험했습니다. 야곱도 기근을 경험했습니다. 왜 야곱의 자녀들이 양식을 가지러 갔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야곱이 사는 땅이 흉년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흉년이 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만약에 모임에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모임을 떠나지 마십시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여기 떡집에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1절 마지막에는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보는데 이것은 가족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가족을 아주 가치 있게 보십니다. 가족은 하나님의 일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가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고 갔는데 이것이 첫번째 결혼입니다. 그 다음에는 타락을 하고 두 아들이 태어나고 거기도 가족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결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지금 서구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2006년 현재에 있어서 발리모니에 있는 그 지역에 36%의 어린아이들이 결혼 없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의 모본이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동성결혼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서방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여러분은 이것을 올바르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또한 동성연애 부부에게 어린아이들이 입양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가족을 보는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자녀가 있습니다. 한국의 성도 여러분! 가족의 가치를 여러분이 아십시오.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형제 자매 여러분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서 결혼하십시오. 작은 가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 주어진 작은 가족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양육하시길 바랍니다. 이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족에 대해서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아내는 나오미요, 두 아들은 말론과 기룐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이란 그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입니다. 이 이름이 놀라운 의미인 것은 이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교조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분명히 엘리멜렉의 부모는 아마 영적인 부부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그 시대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주기를 왕이 없는 그 시대에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왕이 없기 때문에 거기는 주권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해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유업을 떠날 성경적인 근거를 갖지 않고 그만 그의 유업을 떠나버렸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보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데 내가 한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 환경이 이 사람들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나오미의 의미는 기쁨이라는 뜻인데 이 장의 마지막 부분 20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는 나를 더 이상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 이름을 마라(쓰다)라 불러라. 이 여인도 자기 이름에 있어서 곤란을 겪었습니다. 두 아들을 보십시오 말론은 아프다는 뜻입니다. 기룐은 파리하다는 뜻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 두 아들이 태어난 것은 틀림없이 흉년 가운데 태어났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물리적으로 기근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나오미가 이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 영양공급을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 아이들을 낳고 나서도 제대로 양육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이는 아프다라고 짓고 또 한 아이는 파리하다고 지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영적으로 적용시키면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모임에 영적인 양식이 부족하다면 믿는 자들에 영적으로 병들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좋은 양육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고 가족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합니다. 성경에 많은 가족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서도 아내와 남편이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도 신약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도 그것을 읽을 수 있으며 가족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가족내의 관계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성명인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6:4에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가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관계의 가치를 평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저의 가족을 매우 사랑스럽게 그리고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라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합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게 선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은 부모를 사랑합니다.

곤궁(궁핍)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이것은 대단히 힘든 어려움이었습니다. 어려움과 곤궁이 왔기 때문에 그만 베들레헴과 유다를 떠나 모압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의 유업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며 성경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 대단히 슬픈 일로 전개됩니다. 그는 또한 유업을 떠나면서 가족을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분 슬픈 일은 어떤 형제님이 모임을 떠납니다. 때때로 가족을 데리고 그만 떠납니다. 이것은 이중의 슬픔입니다. 그는 자기의 유업을 그만 떠났습니다. 왜 떠났습니까? 엘리멜렉 시대에는 시편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기록될 때에도 원리는 같았습니다. 33:18,19에서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나를 경외하는 자를 돌볼 것이며 사망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기근시에 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은 약간의 역설입니다만 만약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기근이 있을지라도 살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이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라면 엘리멜렉은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37:19에서는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정에 대화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이 결정사항에 나오미가 어떻게 동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엘리멜렉이 가정의 머리였기 때문에 아마 나오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여기서 자기의 책임을 느꼈습니다. 이 가족의 대화를 생각해보려면 어떻게 생각해봐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 가족들이 기근시에 해야 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선 이들이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나오미가 어떻게 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엘리멜렉은 두 자녀가 있는데 양식이 없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제가 아일랜드에 있는 아주 유명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는 모임에 대해서 압니다. 그는 다른 모임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모임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그만 모임을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모임에 그 사람이 없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왜 당신이 모임을 떠날 생각을 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아시다시피 나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있습니다. 모임에서 그들이 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를 당신이 아시잖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들을 세상에 데려가서 키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임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은 재앙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들이 모압 땅으로 나갔습니다. 다섯번이나 1장에서 모압이라는 말을 봅니다. 2장에서 또 놀랍게 다섯번 언급되는 것이 있는데 보아스의 밭이라는 말입니다. 보아스의 밭은 축복이 풍성한 곳이었습니다. 모압 땅은 불행이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나 보아스의 밭이나 전체를 통제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체를 통제하시지만 엘리멜렉의 선택은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3:12에 모압 사람들과 관계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글론을 섬겼습니다. 모암 왕을 18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왕을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또한 3:28에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압 사람은 늘 하나님의 백성에 대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모압 왕이 그들의 영지를 통과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가족을 모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우거하려고 갔는데-흠정역) 거기서 계속 정착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돌아오려고 잠시 우거하러 갔습니다. 아마 기근이 끝나면 돌아오려고 우거하러 갔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며 그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전 민족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여기 아주 엄숙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모압 땅에도 이르렀습니다.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절 마지막에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계속) 유하더니 엘리멜렉은 상황을 조절하는 능력을 그만 상실했습니다. 처음에는 정착하지 않고 우거하러 갔는데 2절에 보면 우거하려든 생각이 통제를 상실하고 거기서 그만 계속 머물게 되었습니다. 4절 마지막에 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 모압에서 당한 엘리멜렉의 어려움을 아시겠습니까? 그는 거기서 죽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임을 떠날 때 얼마 있다가 모임으로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모임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만 그 사람이 모임 밖에서 죽는 일이 생깁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 감사함은 나오미가 돌아옵니다.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겨졌습니다. 과부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만약에 모임과 과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감사하게도 모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임에 성도들은 그 과부를 불쌍히 생각하고 동정합니다. 또한 참된 과부들을 모임은 공궤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4절 두 아들이 모압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왜 엘리멜렉이 죽기 전에 장가를 들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엘리멜렉이 살아있었다면 모압 여인에게 장가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같지 않는 멍에를 지면 안된다는 것을 엘리멜렉은 알았습니다.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말론 기룐이 그냥 죽었다고 하지 않고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모압은 나오미에게 모든 것을 다 가져갔습니다. 모압이 나오미에게 제시한 것은 그 남편과 아들을 가져가고 무덤을 그녀에게 제시했습니다. 두 아들을 생각할 때 아마 아버지 옆에 장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오미 마음에 어떤 감정과 느낌이 들었겠습니까? 모압에서 세 무덤 앞에 나오미가 섰을 때 나오미는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모압에서는 출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기는 아이들을 담는 바구니가 없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야만 어린아이를 태우는 바구니가 있을 것입니다. 요람은 없고 관만 있었습니다. 출생이 없고 장사만 있었습니다. 모압에 있는 이러한 재앙을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매우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과 기근, 장례등 부정적인 것만 말씀드렸는데 긍정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6절에 떡집은 이 장의 전환점이 되는 곳입니다. 여기에 그리고(개역성경에는 없음)가 있는데 이것은 시간과 관련되는 용어입니다. 베들레헴 유다에 관한 언급이 있었고 이스라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러분 이 장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모압에서는 여호와에 관한 지식이 없습니다. 만약에 듣지 못하면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여호와에 관한 인정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권고(방문)했다고 했으며 양식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장에서 최초로 나오는 복음입니다. 모압이 좋지 않았으며 모압에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 소식이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회복은 언제나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모압에서 돌아갔습니까?

제가 학생일 때 논문은 써야 했는데 논문의 제목이 이민이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라는 이민에 관한 논문을 썼습니다. 아일랜드 역사에서 슬픈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 때에 감자 대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기근으로 100만명 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일랜드를 떠났습니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다른 영국 등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논문을 조사해 보았는데 대단히 이 기록과 관계되는 내용입니다. 많은 이동이 이민으로 이동이 되는데 이민에는 두 가지 형태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이민을 가라고 압력을 가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이민을 오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민을 밀어 부치는 요인이 있고 이민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민을 끌어들이는 쪽에서는 우리 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나오미는 이민을 가라고 밀어내는 요인에서 이민을 오라고 하는 요인쪽으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미에게 이민은 가라고 하는 요인을 봅시다. 거기는 죽음과 장례가 고통과 슬픔이 바로 나오미로 하여금 가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모압에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한 한쪽에서는 오라고 하는 요인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이 소식이 나오미를 오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늘 우리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복은 신구약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여기에 돌아가다는 동사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6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즉 모압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하고자 했던 하나는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10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1장 마지막을 보면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모압지방에서 돌아왔는데, 다른 말로 하면 그가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돌아갔습니다. 19절을 예를 들면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그녀는 완전히 베들레헴까지 돌아갔습니다. 그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을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모임에서 일단 떠나갔다가 나중에 돌아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떡집으로 완전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베들레헴까지 완전히 돌아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2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다른 말로 말하면 떠나 있던 그곳으로 완전하게 돌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돌아올 때를 보면 애굽에서 나와서 그가 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완전하게 돌아왔던 것입니다.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보리 추수할 때는 유월절과 관계되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다시 오순절과도 연결됩니다. 보리추수 시작할 때는 유월절과 연결이 되는데 그녀는 유월절 즈음에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며, 십자가로 돌아온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있던 십자가로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십자가로부터 떠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21절에서 나오미는 떠난 것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첫번째 책임은 남편 엘리멜렉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어떤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13절 마지막에서 대단히 오묘한 어떤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미가 하는 말이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너희를 인하여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모압에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임했기 때문에 무덤이 세 개 있었습니다. 이 두 여인은 직접적인 책임이 없지만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이들이 연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징계는 룻과 오르바에 대한 징계가 본래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믿는 사람들을 징계하실 때에 어떤 경우에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고 엘리멜렉이 이렇게 말했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명칭을 전능자(엘 샤다이)라고 사용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강력하게 나오미를 다루셨습니다.

21절에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데 여기에 1인칭이 단수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로 돌아오게 왜 나오미가 우리로 돌아오게 하지 않고 나로 돌아오게 라고 했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책임을 통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나갈 때는 풍족했는데 지금 손이 비었다는 것은 기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만약에 아내와 자식과 함께 풍족하게 나갔다가 돌아올 때 아무 것도 없다면,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나로 돌아오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의 하나님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갔지만 여호와께서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21절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나로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그녀는 10년 동안 모압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는 모압이 결코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거기에 결코 소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베들레헴 그 고향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회복은 영적인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있을 때 조차도 그는 영적인 면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열심이 룻과 오르바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조차도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일 때에는 어떤 경우에 영적 영성을 띠고 있을 때를 잠깐 볼 수가 있습니다.

7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여기는 두 자부를 분명히 함께 데리고 갑니다. 8절 마지막에 나오미는 아직도 여호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룻과 오르바를 생각하며 8절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이 두 자부는 나오미에게 좋은 자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서 같지 않은 멍에를 메고 있었습니다. 9절에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절에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오미에게는 이 두 자부에게 감명을 주는 어떤 특징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14절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에 있는 주님의 어떤 것을 룻은 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들 중에 하나인 16,17절을 보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 뭔가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의 백성과 나오미의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15절과 대비시켜 보면 오르바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백성과 그 신이 룻의 백성과 신이었습니다. 여기에 룻의 회개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오미에게 가장 감명을 주는 곳은 17절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입니다. 19절에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여기에 나오미의 그 영적인 어떤 것이 룻을 이끌었습니다.

잘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임에 영적인 양식에 관한 이 경고를, 모임이 어렵더라도 모임에 남아서 계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 2 4() 여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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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