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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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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Robin Mckeown

들머리

오늘 아침에 우리가 찬송가 가운데 하나를 부른 것을 저는 주목했습니다. 죽을 사람은 아무도 인자(人子)들 가운데서 주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에 대해 노래했습니다.

잠시 동안 저는 여러분께 주님에 대해 말씀 드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전에는 결코 되신 적이 없는 네 가지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요한 복음 1 1절과 14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1, 14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러분께서 주목하시기를 원하는 첫 번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되신 적이 없는 그 어떤 것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1절에서 말씀이 하나님이었다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 이 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전에는 결코 육신이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진리인 것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 3절로 가게 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which was made of the seed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는 것을 압니다.

육신에 대한 언급을 주목하십시오. 로마서 8 3절에서 우리는(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God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라고 읽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육신은 전혀 죄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육신에) 죄 없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육신이 되신 것을 발견합니다.

디모데전서 3 16절에서 (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God was manifest in the flesh)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전에는 결코 그렇게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전에는 육신이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 1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라고 읽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참된 인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1 4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썼습니다. 주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육신이 되신 것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왜(믿습니까)? 여러분은 히브리서에 있는 아름다운 말씀 곧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10:5)를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육신인 한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10:10)라고 읽습니다. 형제자매님들, 만일 주님께서 육신이 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전서 3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말씀 곧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가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육체로 죽임을 당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님들,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가지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받는) 첫째 교훈은 주님께서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육신이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게 되심은

저와 함께 고린도후서 8 9절로 가십시다. 저의 섬김에 음악 반주를 곁들이기 위해 제가 한국에 왔음에 틀림없습니다.1 여러분은 제가 이 음악을 들을 때 이질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저는 이것이 모두 외부적인 소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1 말씀 전하는 중에 위층에 있는 교파 교회에서 악기 연주 소리가 들려 온 것에 대한 Robin Mckeown 형제님의 역설적인 설명의 한 부분임.

고린도후서 8 9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 이전에 결코 되신 적이 없는 그 어떤 것이 되셨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부요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요하신 자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부요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왜 그렇게 되셨습니까? 그것은 육신이 되신 것과 약간 유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 구절에 있는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니라라고 한 것을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우리도 또한 이전에 우리가 가난한 그 어떤 것이 된 적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거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거지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우 부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매우 명백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가난하게 되심을 인하여 우리가 부요케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 여러분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주님 편에서 (기인된) 자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부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부요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경영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재난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는 (좀 전에) 주님께서 육신이 되신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이 태어난 곳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주님이 태어난 곳을 아십니까? , 우리는 그것이 베들레헴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구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는 그것이 들판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어떤 동굴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왜 그렇게 믿는지에 대해 시간이 없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요점은 출생에서 조차 주님은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지갑(전대)조차도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세 돈을 내게 보이라(22:19)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에 대해 성경에서 좀 생각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50편에서 우리는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10-l2)라고 읽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부요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50:13)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여러분께서는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광야 시험 40주야에서 주님은 주리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님의 공적인 섬김의 시작에서 주리신 것은 흥미롭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목마르셨습니다.

이 분은 부요하신 분이시나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가 부요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다시 주님의 가난함에 대해 생각하시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8 20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산으로 가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주님은 저녁에 홀로 계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거기에 혼자 계신 것을 읽습니다(14:23).

주님께서 저녁에 무엇을 보시곤 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새들이 둥지로 오는 것을 보시곤 하셨습니다. 새들이 깃들이는 장소로 가곤 할 때 주님은 그것들을 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아침이 오곤 했으며 주님은 여전히 산에 계셨습니다. 아침에 주님은 무엇을 보곤 하셨습니까? 주님은 밤에 사냥을 마치고 거처로 돌아오는 여우들을 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무엇을 보시곤 하셨겠습니까? 주님은 여우들이 그들의 굴로 가는 것을 보시곤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이 저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제가 부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매우 부합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늘의 기업(유업)을 가지고 있다고 썼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우리는 부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만일 우리가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8:17)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가난에 대해 가장 위대한 표현은 십자가 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거절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로움의 가난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 69:20)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긍휼히 여길 자가 없었고 안위할 자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여기 지상에서 안위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여러분을 위해 주님께서는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

계속 나아 갑시다. 빌립보서 2장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형제자매님들, 8절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되신 적이 없는 그 어떤 것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매우 주의 깊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복종하시고 멈추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이전에 불순종하신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십시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주님께서 죽음에 복종하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더욱 확실하게 죽음에 복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은 주님에 대해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시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요점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께서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요구 받으신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그냥) 복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성경에서 이것(십자가에 죽으심)이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이었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죽음에 복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마지막 절로 가십시오. 요한복음 14 31절입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언급하는 유일한 때입니다.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어떻게 세상은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갈보리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버지가 두 번 언급된 것을 주목하십시오.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복종입니다.

주님께서 이 구절 후반에 말씀 하시는 것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아버지께 복종하는 일을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최종(궁극)적으로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이 구절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다시 보십시오. 이말 곧 (아버지의) ()명이 단수인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단수계명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 장 15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를 보십시오.

10절에 있는 아버지의 계명()(my Fathers commandments)이 복수인 것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이 과거 시제인 것을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지킨 것 같이)(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께서 지켜야 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한 계명이 있습니다. 14 3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as the Father gave me commandment, even so I do)은 현재 시 제 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죽으시는 것인데 곧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증거를 더 원하십니까? 요한복음 10 17절로 돌아가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목숨을 버림이라를 주목하십시오. 요한복음 14 31절에서는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을 복종하셨습니다

이 구절(10:17)에서는 아드님께서 아버지 (하나님)를 순종(복종)하시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아드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랑에 대한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강조하는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0 18절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 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계명은) 단수 계명입니다. 곧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목숨(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그것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순종(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순종하셨고 또 늘 복종(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십자가에 죽으시도록 요구된 (가운데서) 순종(복종)하신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이전에는 결코 되신 적이 없었던 그 어떤 것이 되셨습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마지막으로 매우 간단하게 요한계시록 1 18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을 읽겠습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러분의 한국어 성경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성경은 이 구절이 곧 산 자라(I am he that 1iveth)로 시작됩니다.

아시는 대로 이 구절은 주 예수의 중요한 명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I AM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여러분께서는 I AM이라는 말이 23번 나오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 가운데 일곱 번이 중요한 비유로 연결되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I am the bread of 1ife)(6:35)(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빛이니(I am the 1ight of the world)(8:1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개(10:9,11, 11:25, 14:6; 15:1)는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옮겨 가십시다. 여러분께서는 그들이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18: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18:5)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로라(18:5)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18:6)(라고 되어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로라(I AM)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물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I AM hath sent me unto you)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에 있는 이 구절(1:18)을 다시 보십시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과 제가 이 구절을 기록하려고 했었다면 우리는 아마 주님께서 죽으셨고 이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곧 산 자라(I AM he that liveth)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현재 계속 시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이 살아계신 사실에 큰 강조점을 두셨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1:18)을 하실 때 하늘에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하늘에 계셨습니다. (하늘에서)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1: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이런 적이 없으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 이것은 창세기 1 1절에 있는 같은 태초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거기에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존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전에는 결코 죽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는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0:12)(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내가) 세세토록 살아 있어(I am alive for evermore) (1: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죽지 않으실 것입니다(6:9). 주님은 세세토록(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마무리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세토록(영원히)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축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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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