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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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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거듭난 것이

Robin Mckeown

들머리

베드로전서 1장으로 이동하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1 18절에서 2 3절까지 읽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18-2:3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에 대하여

만일 여러분께서 주석가들의 주석을 보시게 되면 그들 중 다수가 베드로전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눌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을 위해 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것이 기억하기가 쉬운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베드로가 두 번 사용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입니다. 두 번 나옴이 이 서신을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2 11사랑하는 자들아를 보십시오. 이것은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의 첫 번째 나옴입니다. 그래서 이 서신의 첫 번째 부분은 1 1절부터 2 10절까지입니다.

 

거듭나게 하사 - 과거

형제자매님들, 이 서신의 첫 번째 부분에서 믿는 자들이 거듭난 자로 나타납니다. 1 3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를 보십시오. 우리는 추가하려 합니다.

123너희가 거듭난 것이 그리고 2 2갓난(newborn) 아이들 같이를 보십시오. 그래서 이 첫 번째 부분에서 (믿는 자들이) 거듭난 자로 보이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과거와 관련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듭난 때를 돌아 봅니다. 그 때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제가 거듭난 때를 뒤돌아 봅니다. 그것은 저를 과거로 데리고 갑니다.

 

나그네와 행인 - 현재

2 11절로 가십시다. 여러분께서는 그 구절이 사랑하는 자들아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이 211절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4 11절로 끝납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가 다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을 보는 4 12절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은 2 11절에서 4 11절까지입니다.

2 11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로 가십시다. 이 서신의 중간 부분에서 우리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우리를 과거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로서 그것은 우리를 과거로 데리고 갑니다. 나그네와 행인으로서 그것은 현재와 관련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우리 됨입니다. 나그네로서 우리는 (이 땅 아무데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인입니다. 요한복음 17 1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 대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징으로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일 뿐 아니라 2 11절에서 우리는 행인들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들이며 행인들입니다. 나그네로서 우리는 여기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행인으로서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행인은 지나가는 여행 중에 있는 어떤 사람들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이 세상을 통과해 지나가는 여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땅(나라)으로 여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 본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련하려고 오는 시험 - 미래

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십시다 4 12절부터 이 서신의 마지막 5 14절까지입니다. 4 12-1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법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히 결코 십자가의 사법적인 고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의 수혜자(受惠者)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 큰 축복의 수령자(受領者)들입니다.

4 13절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비난을 동반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4:16)이라고 씁니다.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를 주목하십시오.

형제자매님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서 그것은 미래와 관련됩니다. 그 고난이 현재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열쇠(비결)와 인접해있습니다. 이것이 항상 하나님의 순서입니다. 고난이 먼저이고 영광이 나중입니다. 그래서 잠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미래의 영광과 관련됩니다.

 

고난과 영광

이것은 1 11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 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구절 중반에 있는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보십시오. 후에 얻으실 영광을 주목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기다리는 영광은 미래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1 11절에 있는 후에 얻으실 영광이라는 표현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모임(지역 교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없이 영광을 원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고전 4:8)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고난 없이 영광 받기를 원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현재의 고난 없이는 미래에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 이 서신의 주요 주제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의) 각 장에서 고난에 관한 것을 봅니다. 사실 (이 서신에는) 16 (되는) 다양한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언급이 16개이며 영광에 대한 언급이10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서신은 고난과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

우리가 읽은 구절로 돌아가기 전에 제가 여러분께서 주목하시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에서 복음을 네 번 언급합니다. 그는 1 12절과 25절에서 두 번 언급합니다. 그는 4 6절과 17절에서 두 번 언급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이 네 번을 주의 깊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12절 마지막 부분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1 25절 끝부분에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다시 복음 전파를 주목하십시오.

4 6절에서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복음 전파를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복음전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전도자의 책임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임(지역 교회) 안에 있는 책임에 대해 생각합니다. 모든 모임(지역 교회)은 복음 전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서신서에서 여러분께 이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13번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복음을 12번 언급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복음을 12번 언급합니다. 작은 서신서인 빌립보서에서 겨우 네 장()이지만 그는 복음을 9번 언급합니다. 모든 모임(지역 교회)은 복음 전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4 17절에 있는 마지막 언급에서 어떤 차이를 여러분께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말합니다). 잠시 저는 이 순종의 중요성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언급에서는 이 복음이 전도자를 여러분에게로 오게 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복음 전파에 책임이 있습니다. 모임(지역 교회)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확실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4 16절은 여러분에게 듣는 자의 책임을 제기합니다. 듣는 자는 복음을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복음 전파에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 16절에서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라고 썼습니다. 이 구절들 안에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으로 가십시오. 저는 여러분께서 21절 앞 머리에 있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문장을 보시면 영어에는 문장 앞 머리에 인칭 대명사가 보이는데 20절 끝에 있는 인칭 대명사 you(너희)1에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써 보내는 대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접속 표현에 대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2 (라고 말합니다).

1 한글 개역 성경에는 21절 앞 머리에 너희는이 바로 나옴

2 흠정역(KJV)에는 Who by him do believe in God로 되어 있음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베드로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고 쓰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라고 썼습니다. 인칭 대명사 him(그리스도)3 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3 한글 개역 성경에는 바로 고유명사 그리스도로 되어 있음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문맥이 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19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를 읽은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한 구속(救贖)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라고 발하고 있는 그 문맥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시킬 수 없으며 옆으로 제쳐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으나 하나님은 믿는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잠시 3 1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요한복음 14 6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운전하고 있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BBC 라디오에서 종교 관련문제를 다루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저는 매우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상담자)가 하늘은 마치 산꼭대기 같은데 그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이 많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이르는 방법은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은 그들의 방법으로 그 산으로 올라가고 있으며 그들은 하늘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교도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올라 가고 있으며 그들은 하늘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으며 그리고 불교도들도 그들의 방법으로 올라 가고 있는데 그들은 하늘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힌두교도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올라 가고 있는데 그들은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구도자들도 그들의 방법으로 올라 가고 있는데 그들도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전반적으로 이 세상 종교를 껴안습니다. 그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자매님들,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배척)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배척)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아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1 22절로 가십시오. 베드로는 믿는 자들을 회개 시()로 데리고 갑니다.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은 회개 시()로 데리고 갑니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실제적인 측면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가 회개 시()로 돌아 가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22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구원 받을 때 깨끗함으로 돌아 가고 있습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전인적(全人的)인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여기에서 생긴 일에 대해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진리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12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를 다시 보십시오.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었으며 순종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순종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원 받았으며 그 복음을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 5절을 쓰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 복음이 모든 민족들이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끝맺는 이유입니다. 16 26절에서 이것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저는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지 저는 동일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진리를 순종함으로(벧전 1:22)를 보십시다. 지금 저는 복음의 진리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12절에서 남을 섬기기 갈망하는 바울은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1 13절에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분명하게 에베소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씁니다. 이 말씀 즉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주목하십시오. 베드로전서 122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순종했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므로

베드로전서 2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2 8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아니 하므로 넘어지나니를 보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순종함에 대해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의 책임에 대해 생각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거기는 언제나 사람의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요한복음 3 36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복음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아무도 사람 측의 책임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순종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을 보십시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만일 우리가 22절에서 복음을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순종의 믿음 가운데서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순종으로 시작하여 순종으로 계속 나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1 22(성령을 통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로 돌아갑시다. (성령을 통하여)4를 다시 보십시오. 1 12절의 마지막 부분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로 돌아 갑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복음이었으며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1 22절에서 그들은 진리 곧 복음의 진리를 성령으로 순종했습니다.

4 흠정역(KJV)에는 in obeying the truth through the Spirit로 되어 있음.

형제자매님들, 복음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책임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순종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입니다. 복음을 순종함 없이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役事) 없이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 사랑하기에

그것이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아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될 때 죄인들이 구원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매우 중요한 것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구절 다음에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에 구점(句點)이 없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교훈이 아닙니다. 이 구절 마지막에 교훈이 있는 것이지 이것은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모든 회개에 자동적으로 존재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한 개인이 성령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순종할 때 거기에는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가 자동적으로 존재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이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제가 구원 받기 전에 저는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일로도 관계를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피했습니다. 저는 저의 세상적인 친구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리스도를 믿은 순간부터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까이 다가 가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세상 친구를 끊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설명하겠습니까? 이 구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순종되는 바로 그 순간에 거짓 없이 형제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저는 왜 그렇게 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령이 언급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잠시 요한1 3 14절로 돌아 가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이 구원 받은 증거를 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구원 받았다는 것에 대한 큰 증거입니다.

요한1 3 14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는 큰 증거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왜냐하면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1 4장으로 돌아 갑시다. 요한1 4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거듭난 증거가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증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 22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로 돌아 갑시다. 이 말 곧 형제사랑은 그리스(헬라)어로 빌라델비아입니다. 그것은 형제다운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3 8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를 보십시오. 형제사랑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제가 여러분께 설명한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 9절로 돌아 가십시오. 우리는 이 구절에 있는 매우 이상한 선언을 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도록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4 8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을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이것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내주 하시는 성령입니다. 로마서 5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로 돌아 가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이것이 그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가운데 내주 하시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를 주목하십시오. 베드로전서 1 22절로 돌아 오십시오. 그 말씀이 (성령으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로 시작된 것을 주목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것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제 우리는 베드로전서 1 22절 끝 부분으로 가서 교훈(을 말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마음으로(with a pure heart fervently: 순전한 마음으로 뜨겁게)를 주목하십시오. 마음으로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이 구절 서두에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는 것과 관련됩니다.

저는 이 사랑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큰 집안에 속해있습니다. 그 집안에는 육신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이것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 22절에 있는 사랑은 구원 받기 전에는 아무도 가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출생으로 온 것이 아니므로 육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인 출생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3절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이 영적인 사랑은 영적인 출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랑은 육신적인 출생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뒤돌아 보게 하는 2 1그러므로로 가십시다. 여러분께 간단히 제시해 드리자면 2 1절은 우리에게 1 22절을 상기 시킵니다.

 

버리고

그리고 2 2절은 우리에게 1 23절을 상기시킵니다. 이것 곧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를 상고합시다. 형제자매님들, 2 1절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 부정한 것 곧 다섯 가지 악을 봅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부정한 것은 영혼을 깨끗하게 한 사람들과 양립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진리를 순종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다섯 가지 부정한 것들과 관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과거 시제라 부르는 것입니다. 동사(버리고)의 시제는 우리가 한 번에 모두 이 부정한 것들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주 하는 그 무엇입니까? 아닙니다. 형제자매님들, 그것은 이 동사 시제 이면에 있는 그 의미가 아닙니다. 이 동사의 시제는 우리가 한 번에 모두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다시 버려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이미 영원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과 관계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 해 전에 지금은 하늘에 가 계신 어떤 아일랜드 형제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2 1절에 있는 다섯 가지 악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더럽고 냄새 나고 낡은 옷과 같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벗어서 걸어 놓고 그리고 다시 입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옷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것을 불에 던져 넣어서 불로 태워 없어지게 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악()을 영원히 끝내야 합니다. 이제 바로 그것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가 모든 악독입니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말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그들 자신의 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궤휼은 그 의미가 속이는 것입니다. 속임은 부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순종하여)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외식과 시기를 보십시오. 왜 믿는 자들 가운데 시기하는 문제가 존재합니까? 저는 여러분을 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마 여러분이 저보다 더 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좋은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아마 저는 여러분을 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보다 더 큰 영적인 은사를 가졌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을 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는 여러분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태도와 관련이 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님을 넘겨준 것은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 때문에 그들이 주님을 시기했습니다. 무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함께 모였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로 주님을 넘긴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인 모든 비방하는 말을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서로 비방하는 것은 더 나뿐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진리를 순종하여)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한 사람이 어떻게 동료 믿는 자들을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어떻게 서로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다섯가지 부정한 것들은 1 22절에 있는 사람들과 양립될 수 없습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이제 2 2갓난 아이들 같이로 가십시오. 베드로는 그들이 갓난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사실 이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상당히 여러 해 동안 구원 받은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오순절 날에 구원 받은 이들이 있음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드로전서 초두에서 언급되는 장소들로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있었던 이들이 풀어진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은 갓난 아이들 같이 되어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이었음 직합니다. 요점은 그들이 구원 받은지 오래 되었건 얼마 되지 않았건 그들이 갓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라는 말을 서신서에서 3 (정도) 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것을 보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책망하는데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히브리서 5장에서 다시 보시게 되는데 책망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사랑의 열정의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갓난 아이들 같이를 주목하실 것입니다. 갓난 아이는 그 모유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갓난 아이가 모유를 찾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갓난 아이로서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우리는 갓난 아이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말씀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뛰어남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 22절에서 그것은 진리의 순종이었습니다. 1 23절에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1 25절에서 오직 주의 말씀이라 말하고 25절에서 다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언급하고자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1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제 2 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합니다. 이 구절들은 출생과 성장에 대한 것들입니다. 2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를 주목하십시오.

 

자라게

어떤 이들이 거듭나게 되면 소문이 주변으로 퍼지고 그것을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누구나가 다 기대하는 것은 성장 곧 자람의 증거입니다. (이전에) 제가 하고 있던 직업에서 실무를 보면서 관리자 일을 했습니다. 때때로 작은 어린이와 갓난 아이들의 건강에 대해 기록된 의사의 보고서가 제 책상에 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매우 의미심장하고 염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수 개월(個月) 수 주()가 되었는데 그 근황 보고서에는 성장 결핍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아이가 자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성장 발달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여러분이 성장 결핍과 발달 결핍인 데에는 그 이유가 틀림 없이 있을 것입니다. 거듭남을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고 성장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만일 자람과 성장에 결핍이 있다면 거기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2 1절에 있는 다섯 가지 악은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들이 형제를 비방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2 1절에 있는 악은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우유)인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을 촉진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2 1절에 있는 악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 문제가 2 2절에 있는 성경(말씀)의 양육 결핍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2 3절에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보았으면

여전히 욕구의 문제(의미)인 것을 주목하십시오. 맛보았으면이라는 말은 시편 34 8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우리는 주님을 맛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누리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욱 더 누리게 됩니다.

2 3절에서는 주님 그 자신이었음을 주목하십시오. 2절에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둘은 함께 나아 갑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 48절에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무리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주님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였으며 주님의 말씀을 받아 들였습니다.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2 1절에 있는 어떠한 악도 주님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누립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누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누릴 때 우리는 주님을 누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하였으며 우리가 거듭났다는 증거를 우리들이 보이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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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