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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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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Robin Mckeown

들머리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상무(모임)에 있는 것이 기쁩니다. 저는 (지역 모임의) 이름들을 알아 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저의 발음(상무)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삼일 밤 동안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알게 해 주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도움을 얻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저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그와 관련된 몇몇 문제들을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그럼 우리는 함께 창세기 11 27절에서 12장 마지막 20절까지 읽겠습니다.

창세기 11:27-12:20

11:27~32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2:1~20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아브라함의 연대

아브라함이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 중간 즈음에 산 것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많은 분들이 (직접) 파악하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성경 처음 11개 장()들이 2000년의 기간을 포함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가 약 200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가 2000년의 기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12장부터 신약 시작까지가 2000년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우리의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님임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 없습니다. 그의 중요성은 우리가 신약에서 그에게 이르게 되는 언급의 횟수에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에서 74번 그 이름으로 언급됩니다. 모세는 신약에서 80번 언급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율법과 그의 관련을 생각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모세)가 많은 언급을 갖는 것은 이해할 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은 매우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벗(the friend of God)이라 불렸는데 세 번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 역대하 20 7절에서 여호사밧이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께 주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1 8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신약 야고보서 2 23절에서 우리는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읽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약으로 가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주님의 친구()인 것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언급이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서 요한복음 15 14-15절로 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제자들)은 주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이 아브라함의 특성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정확하게 행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5 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의 참된 특성 중 하나는 여러분이 누군가와 함께 자세한 것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누군가가 나는 그녀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말한다라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친구란 여러분이 (무언가를) 공유하는 누군가라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는 그 특성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창세기 18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리시려 하셨을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함께 그것을 공유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나의 벗(친구)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공유하신 것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할 때 또 다른 것이 그 중앙에 놓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서신은 여기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갈라디아서에서 22번 믿음이라는 단어를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이 이름으로 9번 언급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 요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믿음이 131 언급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이 8번 언급됩니다. 그렇게 많이 갈라디아서 3장에 믿음과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 7절에서 우리는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라고 읽습니다. 오늘밤 이 자리에 계신 구원 받은 형제자매님들 모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녀(아들)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1 한글 개역 성경에는 15번 나옴.

신약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읽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신약에서 4번 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처럼 특징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서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표현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He believed God)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는 것을 증명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함으로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말하는 신약의 네 언급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4 3절과 17절에서 우리는 두 언급을 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 6절 그리고 야고보서 2 23(입니다).

 

말씀 - 믿음 - 맹세

이제 또 다른 신약에 관한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미 아브라함이 그 이름으로 74번 언급되는 것을 말씀 드렸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관련되어 행하신 것 가운데 3가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신약에서 언급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님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臨在)였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그 땅으로 여행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았습니다.

형제자매님들,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매우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임에서 우리는 주님(하나님)의 임재를 압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 16-17절에서 기록하며 그는 지역 모임(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l6).

다른 말로 하면 그(바울)는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경고의 문맥 가운데서 언급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이것은 지역 모임(교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것은 지역 모임(교회)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신약에서 읽는 세 번째 표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중에) 하나라도 결코 어기지 않으신 것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형제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자매님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약속도 어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6 18절은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디도서 1 1-2절에서 우리는 거짓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읽습니다. 민수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23:19)라고 읽습니다.

 

부르심

저는 신약의 언급들을 계속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부르심의 손실비용과 보상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첫째로 그 부르심입니다. 창세기 12 1절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 8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라고 읽습니다. 그는 나오도록 부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습니다. 형제자매님들, 그것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로마서 1 5절에서 믿음의 순종에 대해서 읽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다시 로마서 16 26절에서 그것에 대해서 읽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뒤 곧)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는 그것을 순종했습니다.

여호수아 24 2-3절에서 우리는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2)라고 읽습니다. 그것은 유브라데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24)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3)라고 읽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됩니다.

창세기 12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그 부르심의 손실비용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음을 압니다. 여러분께서는 갈대아 우르가 매우 진보된 문명을 가졌음을 아셨습니까? 그것은 문화의 큰 중심이며 종교의 큰 중심이었는데 () 모두는 이방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곳은 기술과 예술의 큰 중심지였으며 발굴에 있어서 선도자(적 위치)에 있었으며 고고학(考古學)(자들)이 그 유적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름다운 보석류, 고급질의 중국도자기 그리고 매우 아름다운 크리스탈 그릇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선진화된 문화였습니다.

 

분리 - 손실비용

형제자매님들, 그것이 아브라함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에게 나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손실이 켰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손실이 큰 분리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고향(본토), 광범위한 가족 관계 그리고 그의 바로 직계 가족을 떠나는 것을 포함합니다.

형제자매님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여전히 손실비용이 큽니다. 신약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많이 읽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5 32절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 2절 그리고 또한 로마서 1 7절에서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모든 삶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낡은 삶의 방식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하나님)(1:15)라고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6 17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들을 불러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정치적으로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세상에서 그리고 종교적으로 세상에서 불러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장래에 한(어떤) 부르심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 4절에서 바벨론과 관련되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종교적인 세상에서 분리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셔서 저를 불러 내신 때를 압니다. 아마 저는 이것을 여러분께 말씀 드려야 하겠습니다. 제가 구원 받았을 때 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세 아들들이 수주 내에 구원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 구원 받고 그 다음에 저의 두 형제들이 그리고 그 이후에 저의 아버지가 수주 내에 (모두 구원 받았습니다).

저는 결코 제가 자란 이전의 어두운 종교적인 체제(제도)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체제(제도)는 제가 줄곧 지옥 가는 길에 있을 때에도 하늘 가는 길에 있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고 계십니다.

 

떠나 - 가라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창세기 11 1절에 있는 두 가지 제안(제의)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에서) 떠나 나오는 것() 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모임(Assembly)이라는 말의 기원은 성경에서 명명되었습니다. 모임(Assembly)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Ekklesia(에클레시아))인데 첫 부분 ek부터(out of)를 의미하며 klesia(클레시아)함께(together)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불러내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불러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잠시 손실비용에 대해서 좀 더 봅시다 아비 집이라는 이 표현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와 제 가족이 구원 받고 (지역) 모임 교제에 참여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가 자란 종교적인 체제(제도)를 떠남에 대해 우리에게 매우 화를 내는 우리 (집안)가족 구성원들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가족에게 말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을 방문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큰 손실 비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님들, 저는 어떤 다른 선택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너무나도 큰 영예 (영광)입니다.

 

너로 민족을

매우 서둘러 보상을 살펴보십시다. 1절에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아브람)를 한 나라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다른(별도의) 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여러분께서 다음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니)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큰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그 민족으로부터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님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내셨을 때 우리는 많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큰 구원의 기쁨을 소유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가집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간직된 유업(遺業)을 얻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보상

저는 여러분에게 분리의 손실비용을 훨씬 능가하는 보상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이제 저는 그 땅에 있는 아브람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 전에 (있었던)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창세기 11장 마지막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31절에 (그들이) 떠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31절 마지막에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여기 (있는) 이것은 우리들을 위한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그는 가는 데까지 갔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약 800킬로미터였습니다. 그러나 거기 하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가 이미 여호수아에서 인용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24:2)였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24:3)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란에 있는 문제는 여전히 강 저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하란)은 큰 강 유브라데 지류(支流)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람은 멀리 갔으나 그는 (완전히)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멀리 여행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강 저편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땅(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땅에) 들어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그것을 신약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어떤)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십니까? 그들은 참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 받은 이후에 그들은 어느 정도 변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완전히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지역) 모임으로 다가가는 조치(행동)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서방 세계로 돌아가서 본다면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들이 있던 죽은 종교적인 제도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적인 교제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멀리 (떠나)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시다

이제 저는 여러분이 그 땅(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을 특징지은 네 가지 일()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12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리는 관련된 6(과 더불어) 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땅(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땅에서였습니다. 하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란에서 아브라함이 완전히(빠져)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빈번하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읽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을 읽는 경우가 적어도 일곱 번 문자적으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땅(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님들, 하나님의 (지역) 모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려야 합니다. (지역) 모임 집회에 (참석해) 있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은 매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단을 쌓다

저는 여러분이 그 땅(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을 특징지은 두 번째 일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를 보십시오). 그 땅(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특색 중에 하나가 그의 단을 고쳐 쌓는 것이었습니다. 분리된 사람이 하나님의 예배를 누렸습니다. 여러분이 하란에서는 단에 대해 (기록이 없어서) 여태까지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역) 모임 안에 있는 특색 중 하나는 거기에 하나님의 예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제가 그 단으로 갈 때 저는 종종 로마서 12 1-2절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모두 하나님을 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쌓은 이런 종류의 단을 갈대아 우르에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란에서도 결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완전히 (빠져) 나와서 그 땅(가나안)에 들어갔을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는 그 단을 쌓았습니다.

 

장막을 치다

(창세기 12) 8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8절 가운데서 그가 장막을 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 땅(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또 다른 큰 특징입니다. 그는 그의 장막을 쳤습니다.

그 땅(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였으며 행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창세기 23 4절에서 헷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고 말한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께서는 그가 그의 아내를 장사할 어떤 땅도 소유하지 않았음을 아십니까? 그는 헷 족속에게서 장지를 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는 자였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 2 11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적인 특징입니다. 한 나그네로서 그것은 우리가 (땅에) 속해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행인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한국에 있는 저의 경험이 이것을 설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러분 가운데 있지 않다는 (관점에서) 저는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한 나그네입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러분 중에 있는 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하면 저는 여기서 나그네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도 저는 일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요점은 제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시민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외국인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그네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전혀 주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협의(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하늘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행인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우거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저는 곧 머지 않아 한국을 혀나 제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머지 않아 이 땅을 떠나 하늘 본향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행인들입니다.

한 나그네로서는 소속되어 있지 않은 어떤 사람입니다. 한 행인으로서는 (오래) 머물고 있지 않는 어떤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장막의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 땅(가나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땅(가나안)에서 그는 그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예배자였습니다. 그 땅(가나안)에서 그는 장막에서 거하였습니다. 그는 나그네와 행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그리고 다시 12 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께서는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는 이 구절 8절 마지막에 있는 네 번째 특징을 보십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그 동일한 이름을 부릅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4:12)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지역) 모임의 중요한 특색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며 다른 이름을 취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파(denomination) 라는 말이 한국어로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동사 ~라는 이름으로 칭하다(to denominate)를 아셨습니까? 그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이름을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역) 모임은 어떤 교파(denomination)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취하는 것을 거부(거절)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이름을 손상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가지 시험(Test)

이제 저는 우리가 아브라함이 받은 세 가지 시험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거기에 기근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땅(가나안)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거기에 불화(마찰)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13 7절에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거기에 그의 가족에 대해 그의 믿음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22:2)(라고 말합니다).

 

시험1 - 기근

기근의 시험으로 갑시다. 창세기 12 10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그 구절 마지막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를 보십시오. 이것은 지독한 기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시험이었습니다.

때때로 형제자매님들, (지역) 모임에 기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기근이 있었던 (지역) 모임들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단히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 중에 얼마는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역) 모임을 떠나는 것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지역) 모임을 떠나는데 대해서는 성경적인 권한이 없습니다.

이 기근은 매우 혹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0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라고 읽습니다. 그는 그 땅(가나안)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그 땅(가나안)을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읽지 못합니다.

그것은 기근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10절이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저에게 들리기로는 그(아브라함) (그 땅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역) 모임에 거한다면 그들은 결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아브라함에 일어나는 세 가지 일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애굽으로 내려갈 결심의 결과로써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사람이 이 첫 시험에서 매우 잘못 행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다음 말 나는 죽이고를 보십시오.

 

평온함을 잃다

이것은 애굽으로 내려간 결과(귀결)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무엇인가를 잃었습니다. 그는 그의 평온함(침착함)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의 평화로움을 잃었습니다. 그의 평화로움은 두려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는 죽이(리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니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형제자매님들, 애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영적으로)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역) 모임을 떠나 세상으로 가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평온함을 잃을 것입니다.

 

신뢰를 잃다 - 하나님에 대한

1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가 또 다른 것을 잃는 것을 발견합니다. 13절은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그의 아내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만일 우리가 (지역) 모임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 간다면 염려컨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 구원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것(영혼 구원)을 말씀 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으면 여러분은 그것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세상으로 감)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는 영향을 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지금 그의 믿음을 그의 아내에게 둔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밤 여기에 계신 사랑하는 자매님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라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비판입니다.

 

신뢰를 잃다 - 자신의

그 다음에 그는 매우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13절에서 그가 그녀에게 말한 것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를 보십시오. 그는 그의 신뢰성을 상실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녀가 누이인 것이 아니냐고 말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이복 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말하고 있는 요점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대는 나의 () 누이라라고 말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제가 의미하는 바를 아실 것입니다. 그 구절 마지막에서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아브라함이 사라가 그의 친 누이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바로를 속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저는 세상으로 간 믿는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첫 시험에서 교훈을 받읍시다. 저는 여러분께서 제가 아브라함을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됨됨이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제 13절 초두에 일어난 일을 보십시다. 이것은 상당히 () 문제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야 할 옳은 일이 아니었으며 곧 바로 도망쳐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나그네의 특성을 상실하다

저는 여러분께서 또 다른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3절에서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에굽에서는 결코 언급되지 않았던 장막이 다시 나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어떤 믿는 자가 세상으로 가면 그는 나그네 특성을 상실합니다. 3-4절을 다시 보십시오.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된 회복입니다. 그는 그 장막으로 돌아왔으며 그 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4절 끝에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애굽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서 읽지 못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단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읽지 못하며 우리는 장막에 대해서도 읽지 못합니다.

 

시험2 - 불화

서둘러 다음 시험으로 가십시다 이것은 불화 혹은 진짜 다툼의 시험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시고 같은 장 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부한 두 사람을 다루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그렇게 부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나는 약간의 부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만일 여러분이 (부를)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부가 잘못이라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불화(다툼)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6절은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라고 말합니다). 동거함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동거함에 대한 첫 번째 언급입니다. 우리는 지난 밤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 133:1)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7절은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지역) 모임 안에 불화(다툼)가 있다면 그것은 슬픕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역) 모임 안에 있는 인도자들 사이에 다툼(불화)이 있다면 특히 슬픕니다. 이 다툼은 목자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떼에 책임을 진 자들이며 양과 다양한 떼들을 맡은 자들입니다.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슬픕니다. 특히 (지역) 모임 안에 있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무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이 다음 7절 끝에 발생한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왜 이것이 소개됩니까? 형제자매님들 경건하지 않은 자들 앞에서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슬픕니다. 이들은 주변에 있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과 롯 주위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다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역) 모임 안에 있는 다툼은 지역적으로 그 증거를 망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조치

저는 여러분께서 8절에 있는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롯이 아브람에게 말하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영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람)가 먼저 조치(움직임)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여러분께서는 그들이 다툼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그것(다툼)을 모른 체 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고 (나서는) 피합니다.

영국에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한 표현이 있습니다. 알프레드 낼슨경(Alfred Lord Nelson)은 영국인으로 위대한 선원이었습니다. 어느 때 그는 그의 망원경을 그의 보이지 않는 눈에 갖다 대고 그는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지역) 모임 안에서 여러분은 형제들에게 문제를 알게 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아무 문제도 보이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의 (지역) 모임 안에 있는 다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형제자매님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못 본 체 한다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면으로 대하는 것이 더 낫고 그것을 다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 (다루지 아니하므로) 어려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다루는 조치를 취합니다. 다툼은 올바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가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는 너나 나나라고 말하지 않고 나나 너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공격하거나 롯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다툼을 다룰 영적인 사람 또는 영적인 사람들이 요구됩니다. 다음에 그가 우리는 한 골육(형제들)2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brethren(형제들)이라는 말의 최초 언급입니다. 만일 제가 올바르게 기억하고 있다면 다툼도 최초 언급일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아브라함의 논의는 다툼이 합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는 한 골육(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2 한글 개역 성경에는 골육으로 되어 있으나 흠정역(KJV)에는 brethren(형제들)로 되어 있음.

형제자매님들, 하나님의 (지역) 모임 안에서 다툼이 정말로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한 골육(형제들)이기 때문에 다툼이 (지역) 모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최근에 저는 북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성경낭독(Bible Reading)을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야고보서 4 1절에 있는 그 어려운 구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역) 모임 안에 있는 싸움과 다툼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또 다른 것을 여러분께서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9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두 사람 중에 여태까지 더 부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어떻게 합니까? 그는 롯이 (먼저) 고르게 했습니다. 그는 롯이 결정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내가 땅의 이 부분을 취하려고 하니 이 부분 말고 너는 나머지 부분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툼을 다루는 방범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택하게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롯이 선택하게 함으로 말미암는 위험부담이 없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영적이었고 롯은 영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영향

그리고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곧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믿음의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10)(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그의 선택이 전적으로 육적인 지각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선택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적인 고려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보십시오.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10)(라고 말합니다). 그가 한 결정은 심판 받기로 되어있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10절인 같은 구절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전체 난()에 있는 슬픈 말 중에 하나입니다.

()를 애굽으로 데리고 내려간 것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문제는 믿는 자()가 세상으로 갈 때입니다. (그러나) ()가 세상에서 다시 나올 때에도 때때로 세상(적인 것)이 어느 정도 그()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롯의 선택은 애굽에 있었던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12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그가 그의 장막을 쳤던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여전히 조금 나그네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14 12절을 보십시오.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라고 말합니다). 그는 장막을 (버려) 두고 떠났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그네적인 특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9 4절에서 여러분께서는 그의 집에 대해서 읽으실 것입니다. 더 이상 그는 장막에 거 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시험3 - 독자와 경배

형제자매님들, 아브라함에 대한 이 표현들은 우리를 위한 교훈들로 가득합니다. 저는 이삭과 관련하여 이삭을 드림에 있어서 믿음의 시험에 관해 약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22장으로 가십시오. 이것은 매우 소중한 하나님 말씀의 부분입니다. 이 창세기 22장에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많은 위대한 성경 말씀들이 창세기 22장에서 최초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라는 표현을 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의 동사 사랑하는(to love)이라는 말을 봅니다. 우리는 경배(예배)라는 말과 번제라는 말을 봅니다. 이제 1절을 보십시오. 실은 제가 형제님에게 처음 4개 구절을 읽도록 요청 드립니다.

 

창세기 22:1-4

22:1~4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이제 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행하도록 요구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2절에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 시작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를 주목하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여러분의 영적인 삶 가운데서 보증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서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시험 받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다툼으로 시험 받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지역) 모임 안에 영적인 기근이 있다면 시험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 모임 안에 다툼이 있다면 시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모든 시험 중에 가장 큰 시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마음에 가장 사랑하는 것을 취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주목하십시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님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마음에 가장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것으로 여러분을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4 3절에서 우리는 이미 오늘 밤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주 철저하게 이삭을 도로 바칠 것을 그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삭이 어떻게 이 세상에 출생하였는지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은 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라도 아기 낳을 시기가 지났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잉태와 이 세상에 출생이 기적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말합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잉태하는 힘을 주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11:11).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삭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나에게 돌려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다시 하나님이 사용하신 그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제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므로 (이삭은) 그의 독()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3 35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고 읽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5장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그의 독()자였습니다.

바로 성경에 있는 말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only son) 이삭을 데리고3를 보십시오. 실은 아들에 해당하는 두 번째 말은 원어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탤릭체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유일한 이삭을 데리고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이삭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날 아브라함의 마음을 얻으셨습니다.

3 한글 개역 성경 독자가 흠정역(KJV)에는 only son으로 되어 있는데 son이 이탤릭체로 되어 있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형제자매님들, 만일 제가 비슷한 시험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종종 아름다운 성경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를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이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신속하게 보기를 원하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저는 여러분께서 이 시험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서 아브라함의 응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실 때 그는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친구)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벗(친구)이 여러분에게 말하면 여러분은 보통 재빨리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3절을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3절 시초를 주의 깊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만일 그것이 나였다면 저는 그 날 아침에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전날 저녁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머리가 무거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마음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머리를 감싸 앉고 잠자리로 가려고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말합니다). 그 시험은 대단했으며 그 손실비용은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사람은 잠시도 (그것을) 껴안지 않았습니다. 조금도(결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삭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이제야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11절 끝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시 그는 반응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12절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응답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들 그 독()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삶이 이 아들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이레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라고 말씀 하십니다). 동사 행할 것(to do)이 아니라 이같이 행하(였은즉) (thou hast done)인 것을 주목하십시오.

믿음이 동적()이 된 것을 기억하십시오. 야고보서는 바로 이 문맥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 장(22)에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함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는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으로 정의(定義)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응답이었습니다. 18절 마지막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가 나오도록 부름 받았을 때 그가 순종한 것을 처음에 이미 주목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아들을 드리는 요구인데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삭이 드려지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삭이 드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중지시킨 것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스스로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드린 것으로 여기 셨습니다.

 

저기 가서 경배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조금 더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드러난 그의 믿음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특히 한 두 가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5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여기서 그는 사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나귀와 사환들을 두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사환)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선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아브라함이 불과 나무와 칼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삭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사환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종류의 믿음입니까? 이것이 무슨 종류의 믿음인지 성경이 여러분께 말하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11 17-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살리실 줄로

이것은 그 자체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큰 선언입니다. 그의 자원하는 마음은 그 씨(자손)에 대한 모든 약속이 충족될 그 독생자를 드렸습니다.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를 주목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형제자매님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100퍼센트 통과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만일 이삭이 단() 위에서 죽는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줄을 믿었습니다.

19절 끝을 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삭이 어떻게 세상에 출생하게 되었는지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돕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우리가 죽은 상태에서 이삭을 얻은 곳을 실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사라의 태는 죽은 것 같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유로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얻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이삭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 분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무리

이제 마지막으로 함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보고) 우리는 마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창세기 22 8아들아 번제 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드림에 있어 순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순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나의 벗(친구)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상합니까? 이 묘사(기술)에 부응하기 위해 (성경을 찾는다면) 우리는 온 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상(최고)의 시험에서조차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했습니다.

여러분의 인내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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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