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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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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만찬

Robin Mckeown

들머리

이와 같이 짧은 여행 중에 제가 가진 문제 하나를 말씀 드려도 될까요? 제가 여러분을 알게 되기 시작할 바로 그 즈음에 저는 떠나야 합니다. 해야 할 말을 하면서 저는 매우 어려운 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제 막 여러분을 알게 되었는데 저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방문초청과 포항 방문 초청을 감사 드립니다. 저는 반드시 여러분을 기억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저를 기억하시고 기도하신다면 저는 매우 영예스럽겠습니다.

저는 오늘 밤 매우 중요한 주제를 상고(詳考)하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중에 많은 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둘러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의 만찬에 대해서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매우 중요한 교훈들을 우리는 매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11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17-34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만찬이 일곱 군데에셔 언급되다

신약에는 주의 만찬을 다루는 구절들이 일곱 (군데) 있습니다. 다른 점에서 저는 주의 만찬이라 불린 딱 한 번을 덧붙여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나중에 좀 더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 일곱 군데 (있는) 구절들 (가운데) 마태복음 26, 마가복음14장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곧 복음서에 세 군데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에 두 군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2 42절과 사도행전 20 7절인데 매우 흥미롭게도 이것들은 (사도행전에서) 첫 번째 언급과 마지막 언급입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어떤 모임(지역 교회)의 두 집회가 있는데 매우 흥미롭게도 양쪽 경우 다 떡 뗌이 언급됩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한 모임(지역 교회)의 집단적인 집회에 대한 첫번째 언급에서 떡 뗌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한 모임(지역 교회)의 집단적인 집회에 대한 마지막 언급에서() 떡 뗌이 언급됩니다. 그것이 언급된 곳은 사도행전 20 7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는 서신서에서 두 군데 (있는) 언급들을 봅니다. 고린도전서 10장과 우리가 오늘 밤에 읽은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잠시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0 1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이것은 떡 뗌에 관한 아주 명백한 언급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한 대로 복음서에 있는 세 번의 언급에서 떡 뗌은 특성상 제정(制定)적입니다. 그 세 기록(복음서)은 만찬의 제정(制定)을 증거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찬 제정(하는 자리)에 물리적(육체적)으로 그리고 몸으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그것(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사도행전 2장과 20장에 있는 두 언급으로 오시면 그것(만찬)은 특성상 기념적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리적(육체적)으로 그리고 몸으로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아, 주님의 영적인 임재(臨在)는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지금도 믿는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재는) 여전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육체적)으로 그리고 몸으로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특성상 기념되셨습니다. 주님께서 만찬을 제정하실 때 주님께서 거기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제자들)은 주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오늘 아침(포항 모임)에는 물리적(육체적)으로 그리고 몸으로 주님께서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그것(만찬)은 기념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0장과 11장으로 오면 그것은 특성상 교훈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오늘 밤 우리가 이 구절들에서 많은 교훈을 받게 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만찬에 대한 좋은(선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뗌과 주의 만찬

그것은 아주 일반적으로 떡 뗌으로 불립니다. 제가 이미 그것이 주의 만찬으로 불린 딱 한 번인 것에 대해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명백하게 주의 만찬떡 뗌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고 떡 뗌주의 만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이며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것을 떡 뗌으로 생각할 때 저는 그것에 대한 단순함을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0 16절에서 그것은 우리가 떼는 떡이라고 불립니다. 형제자매님들,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이것으로 잠시 돌아 옵시다. 그것이 주의 만찬으로 불릴 때 저는 단순함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존엄(위엄)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입니다.

그것에 대한 단순함 (대해) 좀 보겠습니다. 떡 뗌 곧 오늘 아침에 제가 본 것을 저는 좋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매우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위엄(존엄) 또한 있었습니다. 저는 교파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거기서 일어나는 일 곧 그들이 그것에 대한 단순함을 상실한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떡 뗌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성찬식을 집행하는 어떤 사람을 세울(임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떼는 떡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elements)을 나누어 주는 어떤 사람을 세울(임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찬 집전) 사제(司祭)의 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제가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계에 있는 그들이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높은 ()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석류 빛 가운(gown)을 입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어떤 지위가 주어집니다. 여자들은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떡 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떡 뗌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떼는 떡입니다. 형제자매님들, 단순하게 떡 뗌을 지킵시다

그러나 제가 주의 만찬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그것의 존엄(위엄)에 대해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나중에 적지 않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께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약에서 (Lord)라는 말이 두 번 형용사1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매우 정확하게 고유명사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용사로 사용됩니다. 이것이 그 두 경우 중 하나입니다. 주의 만찬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요한 계시록 1 10절에 있습니다. 주의 날입니다. 이것들이 라는 말이 형용사로 사용되는 두 경우입니다.

1 고전 11:20절과 계 1:10절에서 주의 만찬주의 날라고 표현되는 주의가 헬라어(그리스어)KURIAKOS로 되어 있어 형용사로 나와 있음. 영어로 나타내면LORDLY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음

오늘 밤 이 구절에서 그것이 그 만찬을 기술(記逃)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것이 주의 만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만찬이 주님께 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유격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형용사적인 조항()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만 그 만찬은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아주 옳습니다. 그것은 어떤 만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를 위해 있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역사)은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의 만찬에 대한 표현의 요점이 아닙니다.

주의라는 말은 그 만찬의 소유권을 기술(記逃)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만찬의 성격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그 특성을 가져오는 만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그것에 대해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주의 날로 갑시다. 여러분께서는 그것이 주님께 속한 날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저는 여러분께 이의를 제기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다른 날들은 또한 주님께 속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들은 주님께 속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모두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 날이라는 표현 가운데 있는 그 요점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주님께 속했다는 사실 가운데 기술되는 것이라면 내일 월요일도 또한 사람들은 주의 날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의 요점은 그 날이 주님의 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시대에 대한 표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 큰(중요한) 날이 안식일인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교회시대에서 중요한 날은 주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떠나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전개하고 싶습니다만 우리는 이것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장()으로 갑시다.

 

머리 되심과 주권

우리가 읽은 구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 가기 전에 여러분께 이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16절에서 우리는 머리 되심을 봅니다. 17-마지막 절(34)에서 우리는 주권을 봅니다. 16개 구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봅니다. 아시는바 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장()의 두 번째 반절에 있는 가르침은 좋아하지만 첫 번째 반절에 있는 가르침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 16개 구절에 있는 것을 매우 간단하게 제출한다면 그것은 물론 모임의 집단적인 집회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리고 모임의 집단적인 집회에서 남자들은 가리지 않은 머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가려진 머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동일한 구절에서 남자들은 짧은 머리카락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긴머리 카락을 취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어떤 질문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장() 초반은 머리 되심에 관한 것이고 이 장() 마지막 부분은 주권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그 차이를 우리에게 문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1-16절의 머리 되심은 역할 관계와 관련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 그리스도의 남자에 대한 관계, 그리고 여자의 남자에 대한 관계 그리고 각각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께서 머리 되심은 그 역할과 관계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권에 이르거나 혹은 그것이 머리 되심의 진리를 수반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광범위합니다. 주권은 저의 생활 모든 면에 참작됩니다. 저는 모든 것에서 주님을 주로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이 모든 것의(of all) 주님이 아니면 주님은 전혀(at all) 주님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칭찬하지 아니하다

이제 11 17절로 갑시다. 그런데 17절에서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합니다). 저는 우선 이것에 대해서 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를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22절 곧 그 구절 끝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로 가십시오.

그런데 이 두 표현 사이에서 우리는 고린도에 있는 문제의 나머지를 봅니다. 예를 들면 만일 여러분께서 17절과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를 다시 보시면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심각한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가시는 모든 모임의 집회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이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이 모임의 집회로 함께 모이는 여기에는 그 유익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그 일들이 (오히려) 해로웠습니다.

여러분은 18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를 다시 보십시오. 여러분께서는 그것이 그(바울)내가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고 칭찬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인 것을 아십니다. 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를 보십시오. 지금 저는 여러분께서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8절에서 19절로 논리적인 전개가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분쟁(분열)이 그 모임에 있게 되면 혹은 여기와 같이 복수(複數)로 분쟁(분열)들이 있게 되면 분쟁(분열)에 대한 논리적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분파(sects), 그룹들, 당파(factions)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분파적인 분쟁(분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파적인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 고린도전서 11장으로 가시면 거기에는 사회적인 분쟁(분열)이 있었습니다.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를 보십시오. 우리가 (보통) 가진 자(the haves)와 못 가진 자(the have-nots)라 부르는 말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모임에 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배부른 가운데 있는 한편 어떤 사람들은 시장(嘶腸)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경우(시기) 아래 놓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취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취한다는 것은 거의 믿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고린도에 있는 문제가 이와 같은 것을 아십니다.

그들은 큰 성찬(잔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성찬(잔치)이라 불렸습니다(그들은 거나한 식사 곧 호화스러운 식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있었으며 마시고 있었으며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곧 (이것이) 사회적인 분쟁(분열)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서 이것에서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구절에서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한 곳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입니다). 주의 만찬 (함께) 먹는 것이 불가능했습니까? 거기서 주의 만찬을 취한 상태로 참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아무도 취한 상태로 주의 만찬에 참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역시 모두가 분쟁(분열)이었습니다. 이것이 (주의 만찬 참여가)불가능한 이유였습니다. 또는 그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거기 있었는데 바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너희들의 상태로 말미암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다 영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물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의미하는 바를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 고린도에 있는 모임에 파당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파당 분쟁(분열)의 결과의 하나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적인 사람들을 골라낼 수 있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파당 그룹 영역에 있지 않았으므로 여러분 가운데 있는 영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고린도에 계셨더라면 여러분은 그들 가운데서 인정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파당 분쟁(분열)에 들어가는 그들의 거절로 인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두 번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11 2절에 있는 너희를 칭찬하노라와 대비를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여기에 우리를 위한 큰 교훈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을 칭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하는 것으로 확신하십시오. (항상) 칭찬 받을 만한 것을 칭찬하십시오. 그러나 잘못된 것을 결코 칭찬하지 마십시오. 올은 일로 인하여 바울은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이로 인하여 바울은 내가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지 아니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칭찬합니다.

 

모이다

이제 제가 참으로 자세히 보고자 하는 구절들로 갑시다 고린도전서에서 8번 사용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 서신에서 이 표현이 8번 사용됩니다. 그리고 8번 중에 5번이 우리가 오늘 밤에 읽은 구절들 안에 있습니다. 영어에서 그것은 모이다(come together)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들을 살펴 봅시다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 라 (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서 주목하시기를 원하는 첫 번째 일은 만일 주의 만찬이 이것이라면 그것은 모임(지역 교회) 곧 한 모임의 행동(활동)에 의한 집단적인 활동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누가 떡 떼기를 전혀 힘썼습니까? 주님을 믿은 자들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의 만찬은 모임(지역 교회)의 집단적인 활동입니다.

이것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 봅시다. 저는 여러분께서 17-19절에 있는 그 전개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17저희의 모임이(입니다). 이 표현은 18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이 (지역) 모임 입장(지위)으로 모이고 있었던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더 나아간 전개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한 곳에) 모여서를 보십시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주의 만찬이 그들이 한 곳에 (지역) 모임 입장(지위)으로 모였을 때 행하여진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형제자매님들, 그것은 한 모임(지역 교회)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들만이 주의 만찬에 참여 한 것이었습니다.

 

주의 만찬

이것은 열린 상()에 대한 사상을 제거(배제)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일요일 아침에 여기 있는 여러분의 출입문에 와서 그가 구원 받았고 주님을 사랑하나 다른 모임 교제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고 논쟁하는 것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여러분이 주의 상() 혹은 주의 만찬에 그를 영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표현이 떡 뗌에 관한 언급이 아니고 주의 상()이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보실 때 형제자매님들, 신약에서 주의 만찬에 영접은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접은 언제나 그 모임(지역 교회)에 영접입니다. 심지어 방문자들조차도 그 모임(지역 교회)에 영접됩니다. 당장 그들이 주일 방문만 있을지도 모르며 어찌면 그들이 참석할 수 있는 집회가 주의 만찬뿐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그 여행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것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들을 영접할 때 여러분은 주의 만찬이 한 활동으로써 속해있는 그 모임에 그들을 영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권을 나타내다

계속하십시다. 저는 여러분께서 지금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입니다). 그럼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미 이 표현이 한 번만 나오며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이 그 만찬의 특성을 기술(記述)하는 것이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저는 이 장() 마지막 부분 17개 절들에서는 주권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그것이 주의 만찬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 만찬주권과 관련되어야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이제 이 구절들에서 이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20절에서 우리는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을 봅니다.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예수께 받은 것이니가 아니고 주께 받은 것이니이며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가 아니고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예수의 죽으심이 아니고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틀림 없다고 올바르게 말씀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주의 죽으심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를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여러분께서는 우리가 이 표현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이 그 몸(시체)을 요구하기 위해 빌라도에게 갔을 때 그들이 예수의 시체()2을 요구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에서 그 몸(시체)을 내렸을 때 그것은 예수의 몸(시체)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압니다.

2 27:58, 15:43. 23:52, 19:38 참조.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바울은 그 만찬의 특성을 인정할 필요를 이 고린도인들에게 알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입니다. 그것은 주의 죽으심입니다. 그것은 주의 잔입니다. 그것은 주의 몸과 피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생활)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나쁜 행동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29절 초반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를 보십시오.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8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그것이 이 부분을 주권에 대한 것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 주권주의 만찬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고린도인들이 그것에 대한 지식을 님과 관련 지어 가졌더라면 그들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종종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있었던 다소의 사울을 생각합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소리3 나는‥‥예수라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3 한글 개역 성경에는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9:6)로 되어 있으나, 흠정역(KJV)에는 And he trembling and astonished said. Lord, what wilt thou have me to do?(그리고 그는 떨면서 놀라 말했습니다.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로 되어 있음.

저는 참으로 이 주권의 주제가 전개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빌립보서 2 10-11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때로 형제자매님들, 현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예수 그리고 예수 라고 말하기를 계속합니다. 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사도행전 2 36절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주권주의 만찬에서 저에게 어떤 영향(효과)를 끼쳐야 되겠습니까? 먼저 형제자매님들, 저는 그 만찬에 오는데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때때로 사람들이 순수한 어려움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보면) 항상 늦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저의 자리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주의 만찬(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존엄(위엄)입니다. 저는 주님을 위하여 늦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찬에 있는 주권의 영향(효과)에 대해 여러분께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축구 경기에 가는 복장으로 주의 만찬에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거기에는 만찬에 대한 존엄(위엄)이 있습니다.

어느 때 저의 아내와 저는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으로 가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왜 초대 받았는지 참으로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버킹엄 궁전으로 가는 초대가 주어진 이유를 정말로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저의 직업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격식 갖춘 초대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격식 차린 봉투에 들어 있었는데 매우 두꺼운 봉투였습니다. 그 봉투 안에 있는 것은 그냥 초대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봉투 안에는 안내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내서 중에 하나는 복장에 관한 것이었는데 우리가 여왕 폐하 앞에서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가게 되는 것이 (저의 원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분들은 그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제 아내는 영국인(English)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는데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장 옷 형식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이것이 버킹엄 궁전에 있는 집회를 위해 요구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의 존엄(엄위)이 얼마나 더 위대합니까? 더 나아가 만일 제가 그 만찬의 특성을 인정한다면 제가 기도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저는 주의할 것입니다. 저는 틀에 박힌 말(어법)로 그것을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저를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사랑하는 형제님들이 기도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그것이 주의 만찬이며 존엄(엄위)이 요구되는 것을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일본과 한국에 있었던 시기를 아십니다.

제가 참으로 아드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일어서기를 원하였을 때, 적어도 저는 저의 마음으로 이 사랑하는 자매님들 같이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소리를 내서 제가 감사 드리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주께 받은 것이니

옮깁시다 주의 만찬이 집단적인 모임 활동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특성을 곰곰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입니다. 이제 23-26절에서 그것을 위한 그 명령 혹은 그 권위를 보십시다. 23내가를 보십시오. 인칭 대명사 (I)는 헬라(그리스)어에서 강조적입니다. 바울은 권위를 가지고 만찬에 대해 그들에게 쓰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는 여러분의 신약(성경)에서 이것이 주의 만찬에 대한 처음 기록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 기록들은 고린도전서 이후에 씌어졌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방법입니까? 그것은 내가 베드로, 야고보 혹은 요한으로부터 이 정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았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바울은 그의 복음을 갈라디아서 1장에 따라 받았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바울은 에베소서에 있는 몸인 교회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바울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그것(주의 만찬)에 대한 권위를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에서 형제자매님들, 그들은 이전에 이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그것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에서 한 교훈을 얻읍시다. 우리는 말씀이나 가르침을 다시 그리고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을 기록으로 제공했습니다.

 

잡히시던 밤에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다음 표현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에서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마태복음 26 26절을 읽으신다면 여러분은 이 말씀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를 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께서‥‥떡을 가지사라고 기록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만찬을 제정하시기 위해 떡을 가시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예수님이 이제는 주님으로 가르쳐집니다. 그래서 그 분은 주 예수님입니다.

저는 바울이 이것을 주의 만찬의 특성 때문에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구절에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the same night in which he was betrayed )를 보실 것입니다. 이 것은 우리가 미완료시제라 부르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주 예수님께서 만찬을 제정하기 위해 그 떡을 가지신 바로 그 순간에 이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자리에서) 나가 유대 지도자들과 교섭 중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룟 유다가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명확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바는 주의 만찬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는 유월절 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요한은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l3:30)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에게 가룟 유다가 주의 만찬과 제정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명백히 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팔리고 있는 동안에 그 만찬이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축복과 축사

이제 저는 여러분이 24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을 기념(기억)하기 함께 모이는 때에 관하여 약간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은 축사하시고(when he had given thanks)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서와 함께 감사 드리는데 사용된 두 가지 다른 말을 이 구절에서 취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주님께서 떡에 이르렀을 때 사용된 말이 우리가 eulogeo(축복)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종 장례식에서 현장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죽은 자에 대해 eulogeo(축복)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에 대해 좋게 말합니다. 사실 그들이 죽은 자에 대해 너무 좋게 말하여 종종 죽은 자에 대하여 거짓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잔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그 말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헬라)eucharisteo(축사)입니다. 그 말이 나타내는 의미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단순히 감사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둘 다 곧 좋게 말하는 것과 감사 드리는 것을 상기시키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들은 주의 만찬에서 찬송하며 노래합니다. 그리고 형제님에 이어서 한 형제님이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두 가지를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발을 해야 하는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드님에 대해서 좋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드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주의 만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침묵가운데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매님들은 그 만찬에서 잠잠합니다. 자매님들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과 그 십자가의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자매님들의 마음 속에서 자매님들은 주님에 대해서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의 마음 속으로 자매님들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찬은 주님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이며 주님께 감사 드리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는 몸이니

저는 여러분께서 이 구절들에서 다른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4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Take. eat. this is my body, which is broken for you)를 보십시오. 여러분께서는 너희를 위해 찢어지는(which is broken for you) 앞에 오는 말 너희를 위하는(for you)을 주목하십시오. 24절의 마지막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를 보십시오.

25절 끝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를 보십시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만찬을 제정하실 때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 단어 곧 너희를 위하는(for you)에 초점을 맞춥니다. 형제자매님들, 이것이 아마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특별히 그것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로 가심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죽으심을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거의 전부)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저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주님은 그것을 저를 위해 하셨습니다. 저는 24절 중반과 25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았습니다. 그것(24절 중반)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25절 끝 부분)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합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 참으로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모든 것을 생각하면 저는 그 만찬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주의 만찬에 빠지는(결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저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제시하면 주님께서는 그 만찬에서 주님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은 부분에서 또 다른 것을 여러분께서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강조하신 이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인격)입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형제자매님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기념(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 자신(인격)에 대해 주님의 모든 속성을 기념(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하늘에서 오심과 세상으로 들어오심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 자신(인격)에 대해서 기념(생각)합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를 다시 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해서만 기념(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기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님 되심에 대해서만 생각(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하신 것도 생각(기념)합니다. 주님의 주님 되심은 주님 그 자신(인격)이십니다. 주님의 하신 것은 주님의 고난, 주님의 고통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념(생각)하는 모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를 다시 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보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자신(인격)을 기념(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 행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고난, 주님의 고통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생각)합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생각(기억)합니다. 주님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성경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현시대에서는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걱정이 되실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현시대에서는 여러분이 세상의 현 상태를 볼 때 여러분은 염려가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확신할 수 있는 성경에서 여러분께 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땅 위에서 모임(지역 교회)의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거기로부터 많은 전도자들이 과거 수년간 밖(외국)으로 (나가) 있던 영국(UK)에 있는 진상을 아실 것입니다. 영국으로부터 많은 전도자들이 과거 수년간 온 세계 바깥으로 (나와) 있었던 그 영국의 진상을 말입니다.

오늘 날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아십니까? 작은 모임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나라들은 베네수엘라와 남미입니다. 저의 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땅 위에 모임(지역 교회)의 증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바로 그 때까지 우리는 주님을 기념(기억)하는 성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에 있는 아주 핵심 요점은 이미 우리가 말하고 있었던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ti11 he come)입니다. 이것은 이 구절4이 끝나는 자초지종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때마다(for as often as)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 앞에 주의 만찬의 계속성을 제시합니다. 그것(주의 만찬)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지속성입니다.

4 한글 개역 성경에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로 되어 있고, 흠정역(KJV)에는 For as often as y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e do show the Lords death till he come로 되어 있어 그 위치에 차이가 있음

 

자기를 살피고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두 (구절인) 27-28절로 갑니다. 우리는 만찬에서 요구되는 영적인 상태의 조건을 봅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은 잘못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 형제자매님들, 이것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이어지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를 주의하십시오.

이 말 곧 범하는 죄는 법률적인 말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결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만찬을 위한 올바른 영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8절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답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번 당신이 주를 기념하기에 합당한지 아닌지 결정하는 데에 당신 스스로 살피기를 언제 시작하는 지를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주의 만찬을 위해 여러분 스스로를 준비하기 시작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연로하신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십니까? 그는 여러분이 바로 요전 만찬(자리)에서 떠나자 마자 (다음) 만찬을 위해 준비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사이에 놓여있는 주일 내내 여러분은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위한 (합당한) 상태를 가집니다. 여러분께서는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아십니다. 이것은 그가 집에 앉아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가 그런 상태에 있어 그가 그 주간을 통하여 주님 앞에 그의 잘못이 느껴진다면 그는 무릎을 굽혀서 그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아주 빨리 마지막으로 29-32절을 봅시다 우리는 주님과 관련된 징계를 봅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매우 엄숙합니다. 29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5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입니다). 이 사람은 28절을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28절을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5 한글 개역 성경 난하주(欄下註)에 보면 판단이라 나와 있고, 흠정역(KJV)에는damnation(저주 혹은 벌) RV(개정역)에는 judgement(심판)으로 번역되어있음

그는 거저 육신적이거나 영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9절에서 그는 그 자신에 대한 죄(심판)을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현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는 불행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의미하는 바를 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불행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30이러므로 혹은 이것 곧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를 봅니다. 이것은 그 자신에 대하여 먹고 마시는 그 심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서 이 30절에서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것 하나는 많고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 모임(지역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저는 때때로 이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 어떤 형제님이 나는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수의 나쁜 행동이 때때로 그 무리에게 징계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여러분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좋지 않은 건강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건강 가운데 있는 얼마는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이것을 주의합시다. 그것은 사랑하는 형제님이 뇌졸중(腦卒中)에 걸린다거나 사랑하는 자매님이 암으로 진단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히 사랑을 받는 어떤 성도들은 매우 많이 좋지 않은 건강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 특별한 경우에서 좋지 않은 건강과 죽음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형제님이 한번 그리스도인은 그의 때(가 오기) 전에 죽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때(가 오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 자신에게 자초(自招)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다음 구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를 보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형제자매님들,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심으로 말미암아 고통(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고쳤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징계의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판단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조치가 우리를 판단(심판)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방금 말씀 드린 것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에서 설명됩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다비씨는 징계를 받는(chastened)훈련을 받는(disciplined)으로 번역합니다. 우리가 판단(심판)을 받을 때 우리는 훈련(징계)을 받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기서 말하는 바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백성과 세상 사이에 구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고린도전서 3 17절에 따라 거룩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 징계 조치를 하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징계)이 시작됩니다(벧전 4:17). 그리고 여기 고린도에 있는 모임(지역 교회)에서 그것(심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르게 함의 징계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주권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무리

그러나 형제자매님들, 하나님의 모임(지역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놀라운 영예(榮譽)입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의 참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영예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최고의 신실함으로 대해주시고 매우 잘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과 성경에 대한 부지런함을 기억합니다. 0형제님께 형제님의 도움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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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