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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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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사슴 그리스도

Robin Mckeown

들머리

저는 포항에 () 있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제가 한국에 온 것은 특권입니다. 그것은 세계 이 편으로 (향한) 저의 첫 방문입니다. 그리고 힘든 일이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저는 친숙하리라고 생각되는 성경 구절들을 여러분께서 보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어찌면 여러분께서 이전에 생각하지 않으셨던 관점에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편 22편으로 돌아 갑시다. 그리고 우리는 1절에서 21절까지 읽으려고 합니다.

시편 22:1-21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편에 대하여

그런데 시편 22편은 종종 시편 23편 그리고 24편과 연결됩니다. 이 세 시편은 조화를 이룹니다. 시편 22편은 구원의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목자에 관한 것입니다. 시편 24편은 주권자에 관한 것입니다. 24편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24편에서 어떤 표현이 다섯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왕입니다. 그래서 24편은 주권자의 시편입니다.

시편 22편은 십자가의 시편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주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 십자가는 이 시편 (22)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우리가 볼 것이지만 그 십자가에 (대해서) 전면적입니다. 시편 23편은 목자의 지팡이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24편은 주권자의 면류관(왕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세 시편은 성막의 세 부분과 일치합니다. 시편 22편에서는 () 제단에 대해서 말합니다. 희생제물이 놓여진 그 () 제단입니다. 시편 23편은 현재로 성소에 있는 떡 상()을 말합니다. 시편23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를 기억하십시오. 성막의 성소에는 진설병(陳設餠) ()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4편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보좌를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 지성소에서 우리는 언약궤와 시은좌(속죄소)를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곳입니다.

시편 22편은 주로 과거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22)은 우리를 갈보리(골고다)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22편 후반부(22-31)는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로 우리가 시편 22편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되돌아 봅니다. 시편 23편은 현재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것(23)은 현재 나에게 대한 주님의 어떠함입니다. 그러나 시편 24편은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24)은 바로 땅으로 재림하셔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그 보좌와 만유의 지배를 ()구하시는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시편에는 특히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말하는 네 개의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22편에서 우리는 속죄제(贖罪祭)를 봅니다. 시편40편은 번제(燔祭), 시편 69편은 속건제(贖愆祭), 시편 118편은 화목제(和睦祭)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이 네 시편 가운데서 시편 22편은 특히 십자가에 관한 시편입니다.

C. H. 스퍼전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생각하건대 시편에 대해 가장 좋은 해설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해설서에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계신 동안에 시편 22편 전체를 인용하셨는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제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에는 십자가와 일치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다른 이 시편 (22)의 매우 흥미로운 것은 기록된 시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시편 (22)은 아마 그리스도의 출생 전 약 1050년 가량 전에 씌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께서 저와 함께 이 시편 16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 이제 16절 마지막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를 보십시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음에 대한 명확한 언급입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인데 십자가에 못박음은 이 시편이 씌었을 때는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십자가에 못박음에 의한 죽음은 이 시편이 씌어진 후 1000 (정도 지나서) 로마인에 의해서 도입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십자가에 못박음이 소개되기 1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음에 관해 기록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보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이 시편 (22)은 구원의 주님의 외로운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버려진 분(사람)의 외로운 외침의 부르짖음을 (알아) 듣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이 시편 (22)은 승리를 얻은 분의 승리의 외침으로 끝납니다. 이 시편 (22)의 바로 마지막 말씀 31절 끝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로 번역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외치신 것을 압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은 분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저와 함께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돌아 갑시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서 이 시편 (22)이 이 말씀으로 시작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제가 오늘 밤 여러분에게 종이 한 장을 드리고 여러분 손에 팬을 가지시고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쓰도록 요청 드린다면 아마 여러분은 16절 끝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에서 시작하실 것입니다. 아마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로는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주님의 기록된 일곱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절에 있는 이 외침은 일곱 개 중에 가운데 있는 외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이것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분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그 분이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인 것을 아십니다. 이 두 사건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났습니까?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입니다.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이 시편 (22)에서 그것으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저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고통이 가장 큰 곳(장소)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아픔이 가장 큰 데(장소)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있었던 가장 심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늘 하나님 (아버지)을 기쁘시게 하셨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내가 항상 그(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8:6)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6:38-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버지)께서 하늘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하나님께서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고난과 영광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 시편 (22)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1절에서 21절 곧 21절 전반까지입니다만 이 첫 부분에서 우리는 구원의 주님의 외침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21절 후반부터 이 시편 (22) 마지막(까지)에서 우리는 품는(껴안는) 축복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뒤따라야 하는 영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류의 고난

그런데 이 시편 (22)에서 우리는 세 근원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먼저 6-20절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증오로 인한 고난을 봅니다. 그 다음에는 21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인데 이것은 사단의 적개심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마귀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1-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아버지)의 거룩함으로 인한 고난을 봅니다.

3절 초반1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를 주의하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을 십자가 위에서 버리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 예수님께서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 아드님을 버리셨습니다.

1 한글 개역 성경에는 후반에 나옴.

 

시편과 나머지 성경

성경 나머지 부분과 관련하여 시편에 대해서 좀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 처음 다섯 책인 모세 오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전조)를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제단 위에 있는 수송아지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언(선지)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봅니다.

그것에 대한 예를 여러분께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사야 9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를 생각합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사실(事實) 곧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봅니다. 여러분께서 사도행전과 서신서로 오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열매 (결실)를 봅니다.

여러분께서는 복음이 사도행전으로 나아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혼들이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모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들 등() (보내는) 서신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열매(결실)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열매(결실)입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미래(장래) 곧 그리스도의 위대한 미래(장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으로 올 때 그것은 이 모든 것들과 조금(약간) 다릅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감정(감동)을 봅니다. 시편 22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이 시편 (22)은 그리스도의 섬세한 감정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시편 (22)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민감함을 말합니다.

 

새벽 사슴 그리스도

이제 저는 여러분께서 이 시편 (22) 제목이 있는 여러분의 성경상단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두 단어를 보실 것입니다. 실은 히브리어 아앨렛 샤할(Aijeleth Shahar)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밤 이 명칭과 관련하여 저의 주된 말씀을 이루어 가고자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대로 이것은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새벽 사슴2을 의미합니다. 새벽 사슴은 아주 섬세하고 민감한 동물이며 매우 아름답고 작은 동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한 (추측해 보건대) 어린 사슴(young deer)을 조금 닮았습니다. 그것은 특히 새벽(아침)에 눈에 띌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새벽 사슴을 보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새벽 일찍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산과 관련됩니다.

2 흠정역(KJV)에는 The hind of the morning(새벽 사슴)으로 되어 있음.

이것에 대해 제가 의미하는 바를 여러분께 보여 드리기 위해 저는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성경 아가서 2장으로 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9절 초반을 읽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벽 사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아가서 2장 마지막 절 곧 17절을 주목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가서 8장 마지막 절 곧14절을 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발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제가 말씀 드린 대로 새벽 사슴은 새벽과 관련되며 산과 관련됩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책에서 이 동물의 이름을 발견하기 원하십니까? 사실 여러분께서 모세의 책으로 가시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모형(types)으로 사용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께서는 제물을 위한 수송아지 그리고 숫양 그리고 어린 양을 보십니다. 그러나 새벽 사슴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께서는 시적인 책들(시편)로 가셔야 합니다.

 

새벽과 예수 그리스도

이제 저는 새벽 사슴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시편 (22)에서 새벽 사슴의 중요한 대적 넷이 있는 것을 찾아 내려고 합니다. 먼저 새벽 사슴 같으신 주 예수님을 상고합시다 우리는 마가복음 1 35절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읽어서 압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이 구절에 대해 두 가지 새벽 오히려 미명에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새벽 사슴을 찾기 위해 숲으로 가기를 원하신다면 가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이른 새벽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여기서 주 예수님께 대해 한적한 곳으로 가시는 습관을 가지셨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저는 딸이 네 명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제 아내와 저는 어느 날 아일랜드에 있는 한 공원에 갔습니다. 그 공원 높은데 있는 나무들 사이에 많은 사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사슴 같은 어린 사슴이 한 둘 있었습니다. 우리는 멀리서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저의 둘째 딸은 동물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제게 아빠 더 가까이 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작은 동물에게 더 가까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벌써)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한적한 곳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을 여러분께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8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른)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성경을 편 채로 있으시다면 요한복음 7장 마지막 절 곧 53절을 보십시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7:53)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8:1)(라고 말합니다). 새벽 사슴처럼 주님께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새벽)에 주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1 38절에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새벽)에 성전에 나아가더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새벽 사슴 같으신 분을 보실 것입니다. 백성들이 새벽 사슴 같은 분께서 계신 데를 안 듯이 보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이른 새벽(아침)에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24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있었던 부활에서도 주 예수님께서 새벽 사슴이셨던 것을 아셨습니까? 우리는 마가복음 16 2절에서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라고 읽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자들이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무덤에 간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나 더 충분히 할(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새벽 사슴 같으신 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마가는 그 부활에 대한 기록에서 해 돋은 때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새벽 사슴이라는 이 명칭은 동틀 녘 사슴이라고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동틀 녘(dawn)은 해가 돋는 것입니다. 해가 돋는 새 날의 동틀 녘인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그 부활에 대한 기록에서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20:1)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그 주일 첫 날 매우 일찍이 부활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새벽 사슴이신 것을 아십니까? 22 16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오실 때 주님께서 새벽 사슴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명한 새벽별이 되실 것입니다. 새벽별은 새 날을 예고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요한복음 21 4절에 있는 제자들이 그 밤에 고기 잡으러 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성경은 주 예수님에 대해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새벽 사슴 곧 아름다운 새벽 사슴이셨습니다.

 

민첩한 새벽 사슴

형제자매님들, 새벽 사슴은 매우 아름다운 동물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전체가 사랑스럽습니다. 새벽 사슴의 또 다른 생김새는 말씀 드린 대로 매우 아름답고 매우 우아하며 매우 민감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새벽 사슴을 나타내는 또 한 가지는 매우 빠른 발입니다. (새벽 사슴을) 잡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새벽 사슴은 매우 민첩 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주 예수님에 관해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430절에서 여러분께서는 그들이 주님을 붙잡아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보는 30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라고 읽습니다. 새벽 사슴 같으신 분께서는 그들 앞에서도 민첩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 사슴께서는 피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주의하십시오.

요한복음 10 39-40절에서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새벽 사슴께서 가버리셨습니다. 그들은 그 분(새벽 사슴)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새벽 사슴)을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새벽 사슴)은 걸음이 빨랐습니다. 그 분(새벽 사슴)은 요단강 저편으로 가버리셨습니다.

 

에워 싸인 새벽 사슴

이제 시편 22편으로 가십시다. 저는 우리들이 지금 새벽 사슴의 큰 네 대적에 대해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11절을 보십시다. 이것은 구원의 주님의 외침입니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이 구절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아주 비슷한 말인 19절로 내려가 보십시오. 여호와여 별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그런데 형제자매님들, 거기서는 피하려 하지 않으시며 요단 저편으로 가려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사이로 통과해 지나가려 하지 않으시며 길을 만들어 도망가려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십니다. 때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사슴께서 어려운 가운데 계십니다. 저는 지금 이것을 그림 언어로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이 구절에 있는 두 가지를 주목하십시오. 먼저 환난이 가깝고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잠시 이것을 보고자 합니다. 다시 11절 끝 도울 자 없나이다를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저는 여기서 땅(세상)에 계셨던 저의 구원의 주님에 대해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디에 가시든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찢어진 마음들을 고치셨습니다. 나인 성의 과부는 장지로 그 아들을 데리고 가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있었던) 주님의 도착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7: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과부에게 주신도움에 대해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환난(고난)에 처해 계시며 거기에 도울 자가 없습니다. 성경이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69:20)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이것을 강조합시다. 곧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아무도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고난 당하시고 피 흘리시고 그리고 홀로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으려고 하셨던 것을 생각하니 제 마음이 미어집니다(녹습니다).

다시 19(22) 마지막 속히 나를 도우소서를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환난이 가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11(22)에서 도울 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19절에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있는 이것을 마음에 두십시오. 11절과 19절 사이에서 우리는 둘러 싸인 새벽 사슴을 봅니다.

 

황소와 힘센 소들 - 유대 지도자들

이제 12절로 갑시다. 여기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첫 번째 그룹이 있습니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택한 말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둘러싸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편의 명칭 새벽 사슴과 일치합니다. 이 잔인한 짐승들이 새벽 사슴을 구석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그 짐승들이 새벽 사슴을 둘러 쌌습니다.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아모스 4 1절을 아십니까? 거기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는 바산 땅이 갈릴리 동록에 놓인 것을 아십니까?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떡 바구니(광주리)로 불립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풍부한 목초지와 비옥한 땅 때문입니다.

바산의 소들은 크며 강했습니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를 다시 주목하십시오.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로 갑시다. 마태복음 26 57절 이하에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57)(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산의 소들의 모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대제사장 그리고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새벽 사슴이 그 한 가운데로 끌려 옵니다. 그들은 새벽 사슴을 대제사장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마태복음 2667절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라고 읽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새벽 사슴을 얼마나 미워하는가를 (나타내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도 그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이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새벽 사슴을 조롱했습니다. 그것이 27 413입니다.

3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제 저는 시편 22편으로 돌아 가고자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12)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3). 이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그것은 (그들이) 내게 그 입들을 벌림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칭대명사4 그들은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입이라는 말은 복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히브리어에는 단수5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하나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에서 한 사람 같이 전적으로 연합되었습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이것이 비유인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귀는 찢고 부르짖는 사자로 묘사(描寫)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주 예수님께서 이 독자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8:44)다고 말씀하신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특징이 그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절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그들의 아비 마귀 같습니다.

그리고 내게 그 입을 벌림이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그 묘사(그림)에 어울립니다. 그것은 새벽 사슴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짐승들이 새벽 사슴을 삼키려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베드로가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것이 그들의 입이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새벽 사슴을 삼키기 원합니다.

4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흠정역(KJV)에는 They gaped upon me with their mouths와 같이 복수임.

5 흠정역(KJV)에는 They gaped upon me with their mouths와 같이 복수로 나와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단수로 되어 있음.

 

개들 - 이방인

이제 옮깁시다. 새벽 사슴이 바산의 힘센 소들에 둘러싸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새벽 사슴의 대적인 두 번째 그룹을 보십시다. 16절을 보십시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를 주목하십시오. 그와 같이 개들도 새벽 사슴을 에워쌌습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the assembly of the wicked have surrounded me)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다비(Darby) 방식의 번역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구절에서 새벽 사슴을 묘사하는 두 가지 말 곧 에워쌈두름을 봅니다.

먼저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그 다음에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입니다. 여기에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그들이 주님을 에워쌌으며 그들이 새벽 사슴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둘렀으며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제어하였으며 그들이 (주님을) 죽입니다. 16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를 보십시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사슴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둘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주님을 손에 넣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새벽 사슴에 대해 그림 언어로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들은 누구입니까? 저는 바산의 힘센 소들이 유대인 지도자들인 것을 분명히 압니다. 저는 동일하게 개들이 이방인들과 관련되는 것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이 말씀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는 이방인들 곧 로마 군인들에 의해 행하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葬事)에 관해 지금 막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지적해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을 (직접) 죽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을 돌로 쳐 죽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만일 유대인들에게 주님을 직접 죽이는 것이 허락되었다면) 그들은 주님을 돌로 쳐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로마 사람들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을(직접) 죽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약간 좀 () 주목하십시오. 로마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죽이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장사(葬事)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사람들의 장례 방식은 그 몸(시신)을 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장사(葬事)가 허락되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19:40) (따른) 그 장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것에 대해 일어난 모든 일임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셨습니다.

개들의 의미에 대해서 계속하십시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여러분께서는 16절 초반에 개들이 복수인 것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제 20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로 갑시다 (여기서 개는) 단수입니다. 만일 개들이 그 개(단수)이어야 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언급인 것이 분명하다면 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저는 그것()이 본디오 빌라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방인 개였습니다.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여러분께서는 본디오 빌라도가 주 예수님께 요한복음 19 10절에서 내가 너를‥‥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세력)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 것을 아십니까?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다른 말로 하면 황소들과 개들이 함께 바로 그 중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황소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나타냅니다. 개들은 이방인들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관계(거래)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면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우수한민족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했습니다. 거기에 바산의 힘센 소들 곧 황소들과 함께한 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사슴을 에워싸기조차 하였습니다.

 

사자 - 사단

21절 처음 부분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로 가십시오. 이것이 사단에 대한 언급이라는 데에는 하등의 의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베드로전서 5 8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를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단에 대한 언급입니다. 베드로는 우는 사자 같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은사자 같이 갈보리에서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사단이 얼마나 구원의 주님께 가까이 다가 왔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3 2절에서 우리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읽습니다. 사단은 열두 (제자)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단은 구원의 주님께 (직접)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13 27절에서 사단이 그(유다) 속에 들어간지라라고 읽습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새벽 사슴 안에 있는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새벽 사슴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상대 (필적)가 안됩니다.

 

들소 - 그리스도의 고난

우리는 잠시 동안 (시간이) 필요합니다. 21절 마지막 부분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활에서 (구원하셨나이다)로 가십시오. 이것은 이상스런 언급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압니다. 비록 황소들이 십자가에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비록 문자적인 개들이 십자가에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비록 문자적인 사자가 십자가에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들소가 십자가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 시편 (22)의 명칭 곧 새벽 사슴 때문에 분명히 고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들소를 설명하는데 잠시 (시간을) 쓰겠습니다. 들소는 험하게 가지가 난 뿔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 뿔들의 끝은 예리합니다. 이것은 사형집행의 방식이 되곤 했습니다. 범죄자를 붙잡아 다가 그의 두발을 함께 묶고 그리고 그의 두 손을 묶어서 그리고 들소의 가지 난 뿔 하나의 끝에 그의 두 발을 묶습니다. 그리고 그 어깨를 들소의 가지 난 뾰족하고 예리한 다른 족 뿔에 묶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범죄자)는 그 뿔들에 가로질러 묶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은 그 들소를 풀어 놓습니다. 들소는 돌진합니다. 들소는 짓밟습니다. 들소는 찢습니다. 들소는 이 사람 곧 이 범죄자를 그 두 뿔에서 떼치려 합니다.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비유적인 말(언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들소 뿔에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감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무시무시한 외침을 듣습니다. 이것이 그 언어()인데 사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히브리서 5 7절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읽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이제 새벽 사슴의 네 번째 그룹에 대해 생각하십시오(새벽 사슴의 대적은) 힘센 ()소들, 개들, 사자 그리고 들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20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로 가십시오. 이것은 사람의 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칼입니다. 이것은 저로 하여금 스가랴 13 7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를 생각나게 합니다. 얼마나 엄숙합니까?

이것이 시편 22편이 시작되는 방식 곧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위에 있었던 구원의 주님의 궁극적인 비탄과 슬픔과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산의 힘센 황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으며 개들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었으며 사자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었으며 들소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칼이었습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를 보십시오. 3주는 거룩하시니이다를 보십시오. 지금 매우 의미심장하게 15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그런데 잠시 우리가 그것(15)을 읽기 전에 16절 마지막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를 다시 보십시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5절 끝은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시편에 (있는) 가장 중요한 선언 중 하나입니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를 주목하십시오. 여러분께서는 힘센 황소들, 개들, 사자 그리고 들소를 보십니다. 그들이 주님을 진토(塵土)가 되게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방금 전에 우리는 사나운 동물들이 새벽사슴을 파멸시키려는 () 시간 동안에 (잠시) 있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더라면 주님을 대적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놀라운 외침입니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塵土)에 두셨나이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은 모두 그들이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주님을 죽였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

이제 아주 빨리 아주 간단하게 이 시편 (22) 마지막 부분을 다룹시다. 22절을 보십시오. 형제자매님들, 갈보리(골고다)의 모든 고난은 그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를 주목하십시오. 그런데 회중(혹은 모임)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를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16절에서 보았습니다. 주님은 악한 무리(회중) 가운데 계셨습니다.

악한 무리가 주님을 둘러 쌌습니다. (이제) 주님은 결코 다시는 그러한 무리 가운데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결코 다시는 주님을 둘러싸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자매님들, 지금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둘러 싸여 계십니다. 내일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모일 때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둘러 싸일 것입니다.

 

회중에서 주를 찬송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서 또 다른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찬송이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용되는 것을 보는데 저는 그것이 네 번 정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2절 마지막에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절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25절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그리고 26절에 겸손한 자는 먹고 매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입니다. 힘센 ()소들과 개들로부터 멸시 받고 조롱 당하고 비웃음 당하신 바로 그 분께서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에서 또 다른 어떤 것을 주목하시기 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보리(골고다)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축복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

27-28절을 보십시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27)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主宰)심이로다(28). 만일 우리가 23절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본다면 27-28절에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축복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봅니다. 십자가 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미래(장래)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마무리

형제자매님들, 저는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모이는 내일 시편 22편에 대한 우리들의 상고(詳考)가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우리를 도와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으로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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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