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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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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

로빈 매키온

여러분과 함께 여수에 있는 것이 저에게는 영예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진정으로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나가는 말씀이 우리들을 정말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 1~10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저는 성경을 자세히 볼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이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쓴 최초의 서신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연대적으로 살펴보면 이 서신이 신약성경의 최초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가 처음 서신입니다. 이것은 아주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는 위대한 복음의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먼저 와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축복이 도래합니다. 바울이 옥중서신을 쓰기 10년 전에 이 서신을 썼습니다. 바울이 구원받고 17년 째 되던 해에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전도를 나간 지 7년째 되던 해에 이 서신을 기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지 22년 째 되던 해에 이 서신을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B.C 315년경에 건설되었습니다. 이 도시를 구축한 사람은 카산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처남이었습니다. 카산다 부인의 이름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그래서 카산다는 그의 부인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이름을 지었습니다. B.C 168년에 로마가 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큰 로마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큰 항구도시였으며, 군사적인 요충지가 되었고, 상업적인 주요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한 매우 부도덕한 도시였습니다. 역사는 이 당시의 인구가 약 20만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중에 약 6,000명 정도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나찌에 의해서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배경이 바로 이러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것은 두번째 전도 여행 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17:1~9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짧은 기간에 방문을 했습니다. 전도자의 주변에 핍박이 일어났고 또한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붙잡히고 법정에 잡혀갈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밤에 몰래 이 성을 빠져 나와서 나른 성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짧은 동안의 방문이었기 때문에 그 모임은 영적으로 아직도 어렸고 주로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핍박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서신에서 애정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2:7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앞 부분에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7절에 보면 바울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바울의 그들에 대한 열정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서신은 두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난이고, 또 하나는 주님의 오심입니다. 여기는 큰 고난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말하고 있으며 각 장에서 그 의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한편에서는 환난이고 한편에서는 주님의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모임을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예를 들어 2: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두번씩이나 가기를 힘썼습니다. 그 때마다 사단이 방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첫째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두번째는 자신이 가지 못함을 인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디모데가 그들을 방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가지 못함을 인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편지를 쓸 때 또 다른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그들에게 빨리 가기를 원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습니다. 두번째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미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에 새로 구원받은 자들은 염려했습니다.

3장에서 5번이나 이 두가지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 핍박 가운데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나 염려를 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 도시는 부도덕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임 안에 젊고 어린 성도들에 대해서 대단히 염려를 하며, 도덕적으로 보호될 것에 대해 큰 염려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이와 같이 음란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모든 음란은 불법입니다. 이 서신을 쓴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성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난 성도에 대한 슬픔과 이 성도들이 관련이 되어 있어 그들을 위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4: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지 않는 자와 같은 슬픔을 갖지 말라고 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1장으로 가서 세 부분으로 나누겠습니다.

1~3절은 인사와 감사입니다.

4~6절은 이들을 택함에 대한 이중적인 증거입니다.

7~8절은 여기는 두 가지의 모본이 있습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9~10절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바울과 믿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하는 보고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믿지 않는 자가 보고하는 보고가 들어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여기서 사도됨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의 사도직분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또한 여기는 거짓교사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도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실루아노를 말하고 있습니다. 실루아노는 데살로니가전후서에만 나오는 사람입니다. 실루아노가 유대인이라는 것과 형제 중에 인도자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며 믿음에 좋게 서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는 디모데를 봅니다. 디모데의 이름은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와 디도서를 뺀 서신에서 디모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 자신의 믿음의 자식입니다. 어떤 면에서 디모데는 바울에게 특별한 형제였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디모데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바울을 복음의 방어를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직접 하나님께 계시 받은 것을 말했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에서는 복음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바울은 어떤 사람과도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디모데도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에도 디모데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에베소서는 몸된교회의 위대한 진리를 나타내는 서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몸된교회의 진리는 주님께 직접 받았기 때문에 디모데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서신에서는 사도라는 말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처음 소개하는 서두 부분에서의 서술은 항상 합당합니다. 1절의 설명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말로 썼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두번째 서신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를 이 두 서신에서만 바울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데살로니가인에게 속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지역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의 단순한 의미는 이 지역모임이 데살로니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절로 돌아가서 이중언급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의 이중언급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레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마지막에도 이중언급이 있는데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 있기를 바라노라-흠정역)

1절에서 영어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주 예수 그리스도가 두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으로 놓고 서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중언급의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3: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여기에도 다시 이중언급이 나와 있습니다. 이 절은 특이한 표현입니다. 다른 말로 직행하다는 동사가 있는데 단수동사입니다. 문법으로 말하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가 복수이기 때문에 이 동사를 단수동사로 사용하면 안되지만 단수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두 인격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한 단수동사로 언급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단수동사를 사용해도 되는데 이것이 잘못되었겠습니까?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인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행하다는 동사가 단수동사인 것입니다. 10:30에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동사는 단수동사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1:1의 표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인 것입니다. 1절에서 주목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이 이중언급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중언급은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그마한 전치사 안에가 있는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핍박의 두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을 주목하면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확신을 해주기 원했습니다. 사실 이중 안전장치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중언급을 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인인 것입니다. 첫번째 부분에서의 안전이 있는 아버지 안에서의 안전이 하나 있고, 두번째 안전장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이중 안전장치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10장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도 주님이 이중언급을 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아무도 내 손에서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라고 이중언급을 하셨습니다. 거기도 이중선언이 나와있으며 이중 안전이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중 안전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잃어버려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저의 영원한 구원은 제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데 달려 있지 않으며 주님이 나를 붙들고 있는 그 붙듦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그 주님의 손에서 저를 떼어갈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의 손에서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두번 언급되는데 이것은 또한 특이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과는 달리 예수님의 완전한 전체 이름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한다는데 주목하기 바랍니다. 다른 서신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는 합니다만 이 서신에서 특히 24번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몇가지 구절에서 4가지의 전치사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2감사하고 너희를 말함은

3기억함이니

4아노라의 동사의 말을 통해서 전치사와 연결시키겠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여기는 세 사람의 전도자가 있는데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입니다. 이 표현을 잠시 보면 우리가 감사하고 이 감사는 항상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예수님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드물지만, 물론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인해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한가지 모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것이 바로 감사의 순서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항상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선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감사했습니다.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여기서 바울은 다시 감사하고 있습니다.

3: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5:18 범사에 감사하라

바울은 항상 감사했고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하나님께 매일 감사해야 합니다.

1:2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바울은 감사를 늘 기도와 연관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 없이 감사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감사 없는 기도를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는 감사 없는 기도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려 할 때에 감사없이 기도해서 어떻게 축복을 받겠습니까? 기도하고 구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의 특징을 아시는지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서신에서 보게 되면 사람들이 감사치 아니하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도 로마서 1장에서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감사치 아니한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충분히 하는 사람도 되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3가지 짝이 있습니다. 5절에서도 3가지 짝이 있습니다. 또한 8절에서도 3가지 짝이 있습니다.

3기억함이니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세번 방문하려 했지만 사탄이 막았습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라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논리적입니다. 기억을 하면서 무엇을 기억했습니까? 그들에게 방문했을 때의 일들을 기억했습니다( 17). 그들이 회개한 그 때를 기억하며, 순종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거듭나게 된다면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3가지를 살펴봅시다.

바울은 무엇을 쉬지 않고 기억했습니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 짝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는 자주 신약에서 서로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5: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잘 보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마감할 때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마감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가지는 우리들의 믿음 생활의 기본적인 세 가지인 것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믿음의 역사(役事) 행위를 봅시다. 행위로 즉 역사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 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았다는 증거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가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그랬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믿음이 행위가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역사 즉 행위는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사랑의 수고 이것도 믿음과 함께 속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수고는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땀을 흘리는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정도로 수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망의 인내(인내의 그 소망)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처해 내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인내를 가진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2장의 에베소에 관한 말씀에서 주님의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의 행위를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수고도 안다고 했으며, 인내도 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슬픈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믿음인데 역사도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수고를 했지만 사랑이 없는 수고였습니다. 인내를 했지만 소망이 없는 인내였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그들이 첫사랑을 버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행위를 했고 계속해서 수고를 했으며 또한 그들은 인내를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빠져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바로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모임에 오고 수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도 인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어떤 요소가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모임은 정말로 생동적이고 살아있는 성도들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사랑에 의한 수고였습니다. 그들의 인내는 소망으로 인한 인내였습니다.

4절 여기서 택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안다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계시로 아는 것입니까?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까? 여기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킴으로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증거를 했으나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3절에서 왜 기억하는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바울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아라고 말을 했는데 18번 이 서신에서 나옵니다.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택하심에 관한 극단적인 적용이 때로는 눈에 뜨입니다. 택하심은 간단히 말하면 선택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택한 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선택된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때때로 택함은 봉사와 연결됩니다. 이 문맥에서 보아도 택함은 섬김과 관계가 됩니다. 택하심은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택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택하심에는 사람의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9절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이것은 능동적인 능동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능동태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5,6,7절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5절에서 바울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또한 그들을 방문을 해서 복음을 다시 전했습니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여기에 또 셋으로 된 짝이 있습니다.

능력, 성령, 큰 확신으로 이 큰 확신은 전도와 관련이 됩니다.

바울은 우리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언입니다. 그리고는 능력, 성령, 큰 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전언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의 특징입니다. 능력, 성령, 큰 확신이라는 특징이 복음 속에는 들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이 부분은 복음을 전하는 자이며,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복음이 중요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4절을 보면 아노라고 되어있습니다. 4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아는 것인데,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가져간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복음을 가져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언의 특징이 중요하고 그와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도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줍니다. 여기에 참된 증거를 봅니다.

2: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여기 또 하나의 셋으로 된 짝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행한 것인데 이 세 말에 주목해 봅시다. 왜 거룩해야 하느냐고 하면 하나님 앞이기 때문에 거룩해야 되는 것입니다. 옳고는 의로운 것인데 이것은 사람 앞에서 옳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 즉 복음 전하는 자의 행위는 옳아야 하며 또한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복음은 바로 복음입니다. 능력, 성령, 큰 확신은 이것은 복음의 특징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전도자가 복음을 듣는 자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6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신약 성경에 본이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우리를 본받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만 왜 그렇습니까? 그들 가운데 바울이 어떤 사람이 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행위는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선한 모본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6절은 놀라운 선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언급하기보다도 물론 그리스도를 말해도 문제가 없습니다만 우리와 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5번 주라고 말했는데 일부러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고 주라고 표현한 것은 주님의 주권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을 본으로 삼고 주님을 본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를 받아 도를 받는 것은 회개입니다. 이것은 씨뿌리는 비유와 관계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땅은 복음을 좇는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사람과 같으며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도를 받는 것은 받는 사람 속()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말씀이 있습니까? 물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증거입니다. 2: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마지막 부분에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너희 속에서 했기 때문에 말씀을 안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역사한다는 이 동사는 현재형이고, 지속형이면서 계속 역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 대단한 순간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축복이 없습니다. 이 서신의 특징을 환난과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가지가 신약에서 병행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환난과 기쁨이 있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환난 받는 것은 알고 기쁨을 누리는 것은 모릅니다. 환난과 기쁨이 함께 가는 명백한 증거를 성경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예를 들면 행 16장에서 바울과 실라는 분명히 고통 가운데 착고에 채여서 옥중 깊은데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불만을 터뜨렸습니까? 한 밤중에 기도했습니다. 주를 높여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고통가운데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때 간수들이 그 찬송을 들었습니다. 간수가 어떻게 죄수가 찬송하는 것을 들었습니까? 옥중에서 이전에는 그런 찬송을 간수들이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경우에 감옥 안에서는 저주와 독설을 퍼붓든 것을 듣던 간수가 두 사람이 거기서 찬송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고 하니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하셨습니다.

6절에서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했으며 7절에서는 하나의 실예(實例)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모본이 안되면 그 사람에게 실예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러 갔다면 복음을 들은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에 여기 없었습니다. 이 새롭게 믿는 자들이 바울과 같은 본을 따랐던 것입니다.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이것은 현재형이면서도 진행되는 시제인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데살로니가에서 계속 바깥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계속 구원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회개가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일이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매주마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볼 때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본을 따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은 본을 따랐습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통하여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속에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 그들을 통하여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로 들어갔습니다. 6절에서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말씀을 그들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7절에서는 그들 속에 있는 말씀이 그들을 통하여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8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너희를 통하여 말씀이 세상으로 더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기점으로 해서 말씀이 나갔습니다.

8절은 7절에서 그들을 통하여 나간 조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각처에 퍼지므로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와 연관되는 말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을 봅시다. 8절 후반과 9,10절입니다만 특히 9,10절은 믿지 않는 자가 보고하는 보고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를 직면했는데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누가 우리입니까? 이것은 전도자이며 여기서 쭉 연결되는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바울과 바나바는 씨를 뿌리는 자로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9절에 보면 저희라고 했는데 저희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아닙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도 너희도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한 자들이고 너희는 회개한 자들이고 저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8절 초반에 너희 믿음의 소문이 퍼져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알았고 명백한 증거를 가졌습니다. 9절에 저희가 저희 스스로가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다른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저희 자신이 우리에게 스스로 보고하기를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2: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여기서도 바울이 그들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저희가 알았다는 9절의 말씀은 안믿는 사람들이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이 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9절 중반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이것은 누구나가 아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된 생활이었습니다. 아주 귀중한 것을 보겠습니다. 우상을 버리고(from idols, 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회개는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것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인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냥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우상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여러분 우상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상은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우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상은 살아있지 않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죽은 우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습니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우상의 문제는 우상적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거짓에서 참으로 옮긴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서 산 자에게로 옮겼습니다. 여기에서 놀랍지 않습니까?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섬긴다고 했습니다. 돌아왔다는 것은 시제가 과거이고 이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섬기는 것은 현재입니다. 여기에 어떤 현재가 또 있습니다. 10절에서 또 하나의 현재는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새롭게 회개한 자가 있는데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면서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으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우신 주님을 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괴롭게 못할 것입니다. 이제 거기서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기다릴 뿐만 아니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면서 섬기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영예로운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그 진노에서 구원하실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각 장에서 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 진노에서 우리는 이미 지옥 가는 것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올 진노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진노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은 앞으로 올 진노를 이 세상을 심판하실 7년 환난을 마음에 두고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여기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의 심령에 풍성한 축복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009 2 3() 여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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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