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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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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편지

 

오늘은 요한계시록 3:7-13절 말씀을 통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빌라델비아 교회

오늘 우리가 살펴볼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해서 이 모임은 주님을 이렇게 기쁘게 해 드렸을까요? 이것을 안다면 내가 속한 우리의 모임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규모의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교회에는 많은 은사가 있었다거나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쉬운 시대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 교회 근처에 다른 지역교회가 있었는데 북쪽에 있는 사데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였고, 남쪽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많은 문제로 책망받았던 모임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도시 자체도 다른 도시들처럼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던 도시도 아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이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7절과 8절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7절과 8절 말씀을 통해 이 교회에 말씀하고 계신 분이 거룩하고 진실한 분이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따라 이 모임도 거룩하고 진실한 모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모임은 주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임은 주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모임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의 말씀에 충성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교회에는 사단의 반대가 격렬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네 번이상이나 ""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십니다. 내 말(8), 내 이름(8), 내 인내(10), 내 이름(12)이 그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12절에서 네 번이나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통해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것을 지키는데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

7절 말씀에서 우리는 이 서신의 참된 저자되신 주님께서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이심을 봅니다. 거룩은 악한 것들 가운데서의 순결이고, 참됨은 오류 가운데서의 참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은 또한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이사야 22 22절 말씀을 보면 동일한 구절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하늘의 보화의 창고를 열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께서 한 번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3. 열린 문

1) 더 많은 순종의 기회

8절에서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결과 얻게 된 축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신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이 문이 '더 많은 순종의 기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더 많은 순종의 기회가 또한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역대하 29장 말씀에서 히스기야가 성전 안에 아합이 들여왔던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여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는 순종을 행했을 때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말씀을 순종하며 또 다른 순종의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역대하 34장 말씀을 통해 유다왕 요시야가 선대의 왕들로 인해 더럽혀진 여호와의 성전을 정결케 하였을 때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다시 유월절을 지켰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한단계 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했을 때 그들이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서 읽기를 요청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 그들은 율법책에 있는 대로 초막절을 지키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8참조).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순종은 더 많은 순종의 기회를 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거절하면 하나님께서는 더많은 진리를 열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2) 더 많은 봉사의 기회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봉사에 더욱 활동적이 될 수 있도록 문을 여십니다. 우리 모임이 복음전파를 위해 기회를 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세대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대입니다. 이 세상의 신을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복음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복음집회가 어떠한 효과가 있느냐는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을 위한 말씀집회가 중요하듯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복음집회는 여전히 중요한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꾸준히 복음집회를 갖고 여러가지 복음전도의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인 전도의 방법은 지역적인 형편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가가방문(seed sower)의 방법이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옥외전도(open air)의 방법이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3. 주님을 기쁘시게 한 빌라델비아 교회

1)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킴

8절 말씀에서 보듯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모임이 너무 작아 주님을 섬기기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임이 작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나아가거나 거기에 더하게 되면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대해 논의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8절에 나타난 이 말씀은 10절에 있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말씀과 유사한 말씀입니다.

 

2)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함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했습니다. 보통 영예롭게 하는 것(honoring)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 사람의 업적을 존경하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에서의 의미는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 사실이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이어 '어느 교회에 속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교파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근본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교회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모인다면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성교회 가운데도 신실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을 수 있고, 복음전도에 있어 은사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상당분량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모이는 조직과 체제에 속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 20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님이 충분하신 분으로 알고 모이는 것입니다. 또한 지역교회의 건물에 붙어 있는 이름이 주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건물에 '성소' '성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임 - 옮긴이주). 우리가 모이는 장소를 중요하게 여길지라도 그 건물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한 교회(a Church,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됨 - 옮긴이주)가 아니라 지역교회(local church)입니다. 이것은 성소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8장과 9장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의 사역과 부활하심으로 인해 하늘에 성소를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지상의 성소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심을 돌릴지라도, 건물 자체는 우리가 모이는 곳에 편의를 제공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교파의 이름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주님을 영예롭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하늘의 성도로 인도하신 주님의 말씀의 종성(finality)을 인정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역교회의 여러가지 실행에 있어서의 순종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에서 자매님들이 머리를 가리고 형제님들이 가리지 않는 것을 통해 우리는 머리이신 주님을 영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점을 손상시킨다면 주님을 영예롭게 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천사들이 이러한 손상을 본다면 주님의 머리되심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수장로제도를 지킴으로 주님을 영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 4절에 있듯이 목자장은 주님 한 분이시고 지역교회의 장로들은 이 한분이신 목자장 아래에서 양들을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한 명의 장로가 목사(pastor)가 되어 다스리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 못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그 분이 주님(Lord)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분의 주님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을 영예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진정으로 그 분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가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라는 진리에서 벗어난다면 주님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실행은 주님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분을 영예롭게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때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4. 대적하는 무리 가운데서 일부가 구원받음

그리고 우리는 9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사단의 반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됨을 봅니다. 여기에 사단의 회 즉,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이 모임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말씀을 통해 격려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대적하는 무리 가운데서 주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시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 교회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을 향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대할 때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타협하면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수도 있을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지켜나갈 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나는 지역교회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이 모임을 향해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고 하실 때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또한 가족을 사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지역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개개인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인 가족을 사랑하시고 지역교회를 사랑하시며 몸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모임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줍니까? 주님께서 지역교회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여기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가 속한 모임을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까? 내가 이 모임을 향해 행하는 모든 봉사와 일들을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개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전은 황폐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리라'는 것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를 나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모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지역교회 안에는 자주 실패하고 연약한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모본을 따라 순종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실패와 연약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교정과 회복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임의 연약에 눈을 돌리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내 모임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모임이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모임으로서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수준에서 항상 너무도 모자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6. 이기는 자에 대한 상급

우리는 10절 말씀에서 휴거에 관한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10절과 11절에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읽습니다. 또한 12절과 13절 말씀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에 대한 보상에 관한 약속을 읽게 됩니다. 주님의 보상은 첫번째로 이기는 자로 하여금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이기는 자 위에 기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지역교회는 디모데전서 3장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을 지니고 있는 모임입니다. 그들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이제 이땅에서 진리의 기둥이 된다면 영원한 세상에서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이 땅에서 잠깐 사는 동안 기둥같은 간증을 보인다면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원한 기둥이 될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이 땅에서 내 이름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들 위에 기록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초반부에서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보존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새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시작부분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우리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계시에 잘 반응하고 그것을 잘 드러내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계시를 이 땅에서 잘 드러내었으므로 이제 그들에게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더한 계시를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잘 드러낸다면 영원한 세상에서 나의 어떠함을 더욱 보여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약속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삶을 살 때 영원한 세상에서 이 놀라우신 주님을 더욱 새롭게 알게 되고, 영원한 세상에서 한 순간이라도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된 주님으로 인해 놀라지 않을 순간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이러한 주님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A. J. 히긴즈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