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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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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교회에 보낸 편지

 

오늘 이곳에 와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2 12-17절 말씀을 통해 버가모 교회에 주신 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들은 전에 사랑이 결여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핍박 가운데서도 여전히 충성했던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해이와 타협으로 특징지워지는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악을 용납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1. 버가모 교회에 계시된 주님의 모습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이 교회를 평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이 교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절에서 우리 주님은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고, 13절에서는 내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날선 검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모든 문제들이 판단받고 해결받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과 견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교정받는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합니다. 이 말씀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가족적인 관계와 친구관계, 개인적인 열망 등으로 인해 모임 안에 타협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지역교회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13절에서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모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지역교회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행사를 평가하시고 살펴보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21절에서 모임 안에서 편벽됨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8 21절에서 재정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 살펴보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4장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십니다. 다른 성경말씀에서도 우리는 다른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고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2.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버가모 교회

주님은 버가모 교회의 상황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버가모는 학문과 지식으로 인한 교만으로 특징지워지는 곳입니다. 주전 29년에 가이사를 위한 성전이 지어진 곳입니다. 수많은 종류의 우상들이 있었고 부도덕이 횡행하던 장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사단의 역사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지 않았다면 버가모 교회는 이 도시 위에 사단의 위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연관되어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지성주의로 인한 교만의 풍조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에게 이용되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가이사를 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살기 어려운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많은 부도덕이 이 도시에 성행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도전과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3절 말씀에서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안디바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디바를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충성된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는 위협이 있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이사가 주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증거했고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말씀에서 지역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역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고수하고 붙들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책망

14절과 15절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보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는 비성서적인 교훈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결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의 위가 있었고 지역교회를 향하여 그 포문을 열었습니다. 사단은 이 지역교회가 가지고 있던 성별의 벽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또한 사단은 성도들 사이에서 구분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과 짝하도록 만들고자 시도했습니다.

 

1)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먼저 우리는 악한 교리의 침투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있었지만 일부가 악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용납했던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수 없음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핍박을 통해서 모임을 멸망시키고자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단은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압 민족과 결합하게 해서 우상숭배를 하게 하고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게 했던 것입니다. 역시 사단은 여기서도 이 모임을 세상과 짝하게 해서 지역교회의 간증을 손상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별이라고 하는 진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여러 가지 규례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별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분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본연의 모습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도 상반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뭍과 물을 분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날을 다른 날과 분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상과 분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친족들과 분리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을 분리시키셨습니다. 전 세기에 걸쳐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오는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별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성별은 개인적인 성결이 있고 모임적인 성결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성별이 없다면 모임의 성별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의 성별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태도에 있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세상과 분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젊은 형제라면 모임의 교제 가운데 있지 않은 여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며 이성에 대해서 거룩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세상을 향해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만족한다고 선언했다면 어떻게 내가 그들이 만족을 느끼는 것들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는 나의 복장이나 행동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입고 행동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날의 세대는 그 전 세대보다 더한 시험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흩트러뜨리고자 여러가지 동원가능한 방법들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과 모든 읽는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어떠한 인상을 남깁니다. 우리가 세상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면 나도 모르게 그 음악이 담고 있는 가치관에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영화나 비디오를 본다면 세상의 가치관에 노출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인터넷에 빠져 있다면 그 위험 속에 내가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같은 소설이나 잡지를 본다면 그 위험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립되어 살 필요는 없지만 성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즐기는 것을 그대로 즐기면서 동시에 나의 마음을 경건하게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성별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게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진미를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그러한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했을 때 갈대아의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보다 열배는 지혜로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별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유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임의 집합적인 성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종교와 결합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사단이 핍박으로 인해 모임을 파괴할 수 없다면 모임 주변의 종교와 모임을 결합하게 함으로써 모임을 파괴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파적인 종교세계와 연합하려 한다면 모임의 간증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어떠한 교파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교파보다 조금 더 나은 교파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이 갖고 있는 진리보다 조금 더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은 모든 다른 교파와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이름 외에는 취할 이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취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이 아닌 어떠한 그룹의 이름으로 모일 때는 타협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사명 가운데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침례의 방법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매들의 머리를 가리우는 것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다 제사장들이라는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타협이 될 것입니다. 형제들의 은사발휘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타협이 될 것입니다. 복수장로제도 대신에 한 사람이 다스리도록 한다면 우리는 모든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서 타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는 어떠한 일에도 동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실패와 연약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이 검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모임 안의 문제로부터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또한 이 버가모 교회 안에 외부의 종교세력과 연관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이 니골라당이 성직자제도의 도입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일반 성도들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 위에서 다스리기 시작하더니 목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것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이 없이 지금도 이러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지역교회를 향하여 원하시는 모범적 유형이 바뀌시지 않았습니다. 모임의 인도자들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 것에 대해 바뀌시지 않았습니다. 복수의 장로들이 다스려야 하고 성품과 행동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며 그들은 상호존경하고 상호협동 가운데 모임을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장로들 가운데는 지도장로(leading elder)나 핵심장로(main elder)가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도와 도움을 얻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인도할 따름입니다. 장로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독이라고 할 때는 그들이 행하는 일을 말합니다. 인도자는 양들을 먹이는 존재로서 양들 앞에 가서 양들이 갈 길을 인도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장로들이 서로 다른 능력의 범주 안에서 양들을 인도하도록 고안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사단의 방해가 들어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단은 발람의 교훈을 통해 세상과 연합하도록 유혹합니다. 사단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통해 성도들 안에서 다른 계층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는 영접이나 침례에 있어서 타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별의 삶에 있어서 타협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행동에 있어서 타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임 안에서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러한 것들을 지적하실 때 우리는 바로 교정해야 합니다. 토론할 시간도 없고 용납할 시간도 없습니다. 바로 교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교정하지 않을 때 직접 개입하셔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직접 그 문제를 다루시겠다고 하십니다. 모임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교정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4. 이기는 자

버가모 교회에 주신 편지에서도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만나와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각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기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14절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만나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우상과 관련된 것을 거부한 사람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채움받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덜 알고 주님에 대해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주님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또한 흰 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흰 돌은 이 돌을 가지고 있을 때 축제의 절기 때 함께 하며 즐길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흰 돌이 주어지는 사람들은 세상이 와서 즐기라고 할 때 거절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내가 주는 아름다운 것을 누리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돌에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새 이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지만 제 의견에는 이 새 이름은 주님께서 각 성도들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오실 때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4:5).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가게 될 때 주님께서 각 사람을 칭찬하시는 그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리를 타협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성별의 간증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A.J. 히긴즈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