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성막(7)
번제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모두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것들은 진 밖으로 가져가지 않고 제단 위에서 온전히 살라지거나 혹은 제물을 드린 자와 제사장에 의해 나누어졌습니다.
번제는 종종 “위로 올라가는 제사(ascending offering)”로 불려집니다.
그 이유는 번제에 대한 원어인 홀라(holah)라는 단어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몫이었습니다. 그것이 제단 위에서 온전히 불살라지면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여호와께로 올라가 그분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번제의 특징은 그것이 온전히 여호와를 위해 드려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으로 드렸으며 그분은 그것을 통해 기쁨을 취하셨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속죄제를 드릴 때 그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여호와께 죄를 범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죄의 재판장되신 하나님께 나아왔습니다. 번제물을 제단으로 가져올 때 그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제물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아주 귀한 것이었으며 다른 것으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번제는 주 예수님의 남김 없는 헌신과, 삶과 죽음에 있어서 자신을 온전히 굴복시키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
번제는 오직 여호와를 위한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제물을 드리는 자의 열납을 위해서도 드려졌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마치 “저에게는 헌신된 마음도 없고 아무 귀중한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 열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이 제물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손을 희생 제물이 될 짐승의 머리에 둔 채 서있었습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는 그가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있는 순간 끝이 나고 그가 드리는 제물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게 될 것인가? 이것은 여호와께 열납 될 것인가?
한 영혼이 이 모든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요! 그의 죄인의 신분은 이미 끝이 났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아담의 자녀로 간주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그의 자아는 이제 도말되었으며, 그 이후로 영원토록 그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아름다우심과 귀하심과 진가는 그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는 그의 대리자 안에서 열납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사실을 당신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지만 만일 진리의 성령께서 능력으로 그것을 당신의 영혼에 깨닫게 해주시면 당신은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안개와 비구름이 밀리 도망가듯 당신의 영혼 안에서 배회하는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들은 멀리 쫓겨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여러분 중에 낙담과 두려움의 시간들을 가져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당신은 평안과 기쁨을 잃어 버리고 “의심의 성”으로 도망가 “절망이라는 이름의 거인”의 압제 아래 있었을 것입니다(천로역정에서 인용됨)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은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이렇게 탄식했을 것입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정말 주님께 속해 있을까?” 당신의 무가치함은 당신의 영혼의 애가(哀歌)가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의 결핍에 관한 기억은 당신을 절망으로 몰고 갔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그런 경험들을 경히 여겨야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배우는 것은 영혼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경험입니다. 그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참으로 거듭난 영혼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도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으며, 우리를 어떤 위치에 두셨으며,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알기를 더 원합니다.
번제에 대해 다시 한번 요약해 본다면, 먼저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기의 무가치함을 충분히 자각하고 자기 대신 희생당할 짐승을 제물로 드립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짐승을 여호와 앞에서 죽여 가죽을 벗기고 여러 갈래로 나눕니다. 그러면 그 짐승의 여러 부분들은 빛 가운데 안팎이 다 드러납니다. 그 다음 그것을 제단 위에 올려놓으면 그것은 구리 그물망 위에서 불에 살라져 향기로운 냄새(혹은 “안식의 냄새”)가 되어 여호와께로 올라가며, 그 제물을 드린 자는 드려진 제물의 가치에 따라 여호와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말했던 대로 그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자기 품 속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할 어린 양으로 쓰시려고 찾아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아드님이었을까요!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우리 인간의 혀로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가장 기뻐하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진가를 온전히 아셨으며, 우리는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분 안에서 열납되었다는 점입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레
주 예수님의 죽음은 이상의 두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분은 아무 흠도 없이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분이셨으며 그 제물은 좋은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셨으며” (고후
이 모든 것은 주 예수님의 모습을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지요! 그분의 생각, 그분의 힘, 그분의 애정, 그분의 모든 삶은 전부가 다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분은 이것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실행하셨습니다.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고, 그분이 설교를 하거나 병을 고치시면 그것은 인간들의 축복을 위함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시간과 힘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편함과 안락함, 또는 손해나 이익 따위를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산 위에서 밤새껏 기도하신 일이나 배 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 일은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여호와를 항상 자기 앞에 두셨으며,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일과 “자신의 모든 것을 주의 제단에 드리는” 일을 경솔하게 말하거나 찬송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자로서의 표준과 모범이 되십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표준들은 모조리 가짜요 잘못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침)례를 받으시려고 요단강에 섰을 때, 그리고 그 거룩한 산에서 몸이 변화했을 때, 아버지의 음성이 하늘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분의 모든 것은 과거나 현재나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자기 백성의 대표자가 되십니다. 그들 모두는 그 분 안에서 발견되며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에게 울려 퍼진 그 음성은 곧 우리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열납되었으며,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신다”(시 149:4) 라는 뜻입니다.
의심에 빠져 힘이 없는 성도 여러분, “열납되었다”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신실함 안에서 열납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열납된 것입니다. 그분 안에 아버지의 모든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장 연약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꾸며져 있으며, 그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분이 사랑을 받으시는 것처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당신은 이 사실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며 매일 매일 그 축복을 즐기고 게십니까? 이것보다 “더 차원높은” 삶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삶이며, 모든 성도들의 정상적인 신분이며, 모든 하나님의 가족들의 생득권(生得權)이요 분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즐겨야만 합니다. 당신의 발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열납되었다”라는 말씀 위에 굳게 올려놓으십시오. 그것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어떤 흑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비록 검고 가련하고 악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순결하고 아름답고 거룩하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1984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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