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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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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4. 21:06 횃불/1984년

느헤미야(2)

성별의 벽

찰스 스텐리

4장에서는 세번째 형태의 방해를 보게 된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근심과 비웃음이 있었고 성을 건축하자 이제는 크게 분노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성벽을 중건하는 백성들에 대한 산발랏의 분노가 아무리 컸다 해도 참된 중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든 영혼들의 신령한 울타리에 대한 저들의 가혹한 증오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뭐라고? 우리 교파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 모든 무리들을 배척한다고?”

산발랏이····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저들도 역시 산발랏처럼 말한다. “이 미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려는가?” , 성벽을 쌓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마리아 군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미약한 그리스도인들도 거대한 기독교 집단의 군대에 비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분노는 네번째 형태의 방해로 이어진다. 산발랏이 유다 백성을 조롱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와같이 그 원수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심히 증오하며 경시하고 조롱한다. 이것 역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상이다.

그러나 대적들의 근심과 비웃음, 분노와 조롱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되어 나아간다. 영혼들은 그 신성한 울타리 안에 있는 귀하신 선한 목자 그리스도에게로 계속 모여들고 있다. 거기에서는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는 모든 것은 배척을 받는다.

이제 산발랏과 그의 무리는 무엇을 했는가? 다섯번째의 형태의 방해가 나타난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소란하게 하자 하기로····”(4:7,8).

우리는 지금까지 대적들의 근심, 비웃음, 분노, 조롱을 보아왔는데 이제는 싸움, 즉 하나님의 사역에 반대하는 심한 공격을 보게 된다. 이것도 역시 현 시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 집단의 모든 교파들이 다 함께 연합하여 그 성별의 벽을 더 이상 건축하지 못하도록 싸움을 걸고 공격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산발랏과 그 무리들이 함께 의논하여 유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주 달려들어 쳤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원수들이 잠입해 들어가 악한 소문을 퍼뜨리며 그 사역을 어떻게 해서든지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잡은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적대 행위가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붙들게 되고 그 역사는 더욱 진행될 것이다.

5장은 매우 심각한 장면이다. 남은 백성들의 실패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다. , 하지만 그 찬양받으실 그분께로 우리를 모아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셨다면 아무도 그분께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6:45). 아버지께서는 실패하는 사람에게로 영혼들을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아들에게로 모으시고 계신 것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로마, 영국, 스코틀랜드 등 무수한 집단의 교회를 만들어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잃어졌던 진리를 다시 회복시키셨는데 그것은 곧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그 중심으로 인정한다는 진리이다. 인간의 집단과 구별하는 그 성별의 벽이 세워지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 기독교 진영이 있는 반면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성별된 울타리 안에 모인 거룩한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이제 여섯번째 형태의 방해를 주목해 보기로 하자. 느헤미야가 성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그의 무리들이 무엇을 하였는가?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그러자 느헤미야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6:2,3)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근심, 비웃음, 분노, 조롱 그리고 싸움과 같은 다섯가지 형태의 방해를 보아왔는데 이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교활이라는 형태의 방해를 보게 된다. 그들의 말은 마치 너무 그렇게 속이 좁고 배타적으로 놀지 말고 너희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오노 평지 한 촌으로 내려오라 우리가 거기서 서로 만나 타협하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산발랏은 한두번이 아니고 네번씩이나 그의 사자를 보내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종들을 꾀어 그들의 배타심을 포기하게 하고 그들의 성벽을 떠나 낮은 수준의 오노 평지로 내려오게 하려고 힘썼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그들을 지키셨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6:4). 하나님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큰 일이었다.

산발랏은 자기 생각대로 그의 사자에게 다섯번째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게셈)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는 자답게 분명하게 대답했다. “너의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만일 느헤미야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교만하여 이같이 행했다면 그야말로 편협하여 접근할 수 없는 비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답고 충성된 것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운동에 관한 묘사가 아닌가? 그리스도께 모인 몇몇 미약한 성도의 거룩한 담이 있다. 그리고 희랍, 로마, 프로테스탄트의 큰 진영이 있다. 느헤미야 시대 당시 아직도 많은 유다 사람이 사로잡혀 있었던 것같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큰 진영에 잡혀 있다.

이같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벧후 2:13).

 

이토록 무섭게 묘사해 놓은 예표가 우리 목전에서 성취되었다. 그것이 비록 오늘날 가장 존경받는 직업의 하나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아닌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호색하는 길을 따르고 있다. 당신이 좀 더 사마리아의 현대적 진영의 기록을 알려면 디모데후서 3장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 진영에서도 역사하여 많은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그분은 희랍에서, 바벨론에서, 로마에서 역사하실 수 있다.

사단은 옛날 산발랏과 같이 이런 환경을 이용해서 오노 평지로 내려오라고 반복하여 유혹하고 있다. “당신의 편협한 배타성을 버리고 공장(工匠)으로 내려오라. 우리를 시인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붙잡을 수 있다. 다만 그곳에서 나오라. 만일 당신이 내려와서 우리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역시 우리와 같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종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배타적이다. ,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의논하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성별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은 너의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교파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모아 놓은 자들, 곧 주의 이름과 그 영광만을 구하는 자들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마리아의 군대와 함께 하면서 동시에 중건(重建)된 성의 거룩한 울타리 안에 있는 적은 무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3).

데 교회(프로테스탄트 주의)에서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에게로 간 자들, 곧 빌라델비아 교회( 3)에 있는 미약한 자들에게는 그 거룩한 울타리가 있었다. 그러나 귀하신 주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온통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집단이 있다.

당신은 다수와 부요함을 자랑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집단 안에 있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당신은 그분의 능욕을 지고 그분께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당신에게 명백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영문 밖에 있는 그리스도께로 모인 성도가 어찌 내려가서 오노 평지의 공장(工匠)들을 시인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오노 평지의 수많은 공장(工匠)들도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는 크다. 느헤미야로 말미암아 하셨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진영에서 구별되어 예루살렘 성 안에 남은 자들은, 기독교 집단의 진영에서 구별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모인 영혼들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이같이 모인 그들은 그리스도께 더욱 참된 것이었다. 그분 주위에 모이는 것이 유일하고 참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포기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일곱번째 형태의 방해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내부에 있는 위험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단의 교활성을 말한다. 산발랏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만난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성전의 문을 닫는 것은 우리의 등불을 말 아래 감추는 것과 같다. 그 유혹은 우리의 선한 간증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줄 확신하고 낙심하거나 위축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가장 큰 위험은 거짓 형제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6:12).

그 원수는 성이 건축된 것을 알았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6:16). 그러나 그 안에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 “유대의 귀인들조차도 여러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저희에게 이르렀으니····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겉으로는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잡혼(雜婚)을 했던 것처럼 주님 안에 있는 몇 형제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릇된 교리와 섞으려 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이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며 또한 큰 시련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고 이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겠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20:30).

 

이와같은 자들은 바른 길을 찾아 나오는 영혼들에게 크나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로 모여든 성도들은 오늘날의 가장 큰 위험이라 할 수 있는 그와같은 그릇된 연합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일곱가지 형태의 방해를 알아보았다. 원수의 근심(2:10), 비웃음(2:19), 분노(4:1), 조롱(4:3), 싸움(4:8), 교활하게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5:19), 내부에 있는 위험(6: 10).

여러분도 이렇게 말하리라. “나도 지금까지 그와같은 방해들을 많이 보아왔어.”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막는 방해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성벽은 마침내 완성되었듯이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모였고 성곽이 세워졌으며 문짝들이 달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지키도록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거듭되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로 모이는 거룩한 가르침을 보존해 주신 것이다. 모든 찬양을 주님께 드리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우리의 대적 산발랏은 그 힘이 훼파되었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이 일곱 방해, 즉 거듭되는 방해는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성별의 벽은 결국 완성될 것이다.

 

(1984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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