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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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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까이 함께 하시는 주님

나이토오 히데오

 

지난 밤에는 빌립보서로 말씀을 나누며 빌립보에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특별히 인도했던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빌립보서가 쓰여진 경위를 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성도들이 낸 물질을 가지고 빌립보 모임이 세워진 지 10년쯤 되던 해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 곳을 찾아갔을 때 바울은 그것을 받고 감사하는 뜻으로 빌립보서를 썼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모임의 상황을 들은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 즉 지역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빌립보서 내에 썼습니다.

1장에서 복음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의 능력임을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교회도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빌립보서 1장에서 말했습니다. 빌립보서의 문제 중에 하나로 두 자매 간에 일치가 없었던 것이 4장에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사랑과 일치가 있기 위해서는 형제자매들이 피차간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필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원래 일치라는 것은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성령의 하나됨, 즉 성령의 일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치라고 하면 상대방에 맞추거나 또는 타협을 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일치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일치는 성령이 주는 일치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치에서 교제의 모본으로서 바울 자신과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를 가지고 제시했습니다. 이 세 사람 다 목숨을 걸고 믿음생활을 한 분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참된 모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을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을 보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임은 인간적인 일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새삼스럽게 써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모임 안에 여러가지 방해가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바울은 쓰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3 2-3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여기에 모임 안에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이 빌립보 모임 안에 들어왔습니다. 손할례당은 일본어에서는 육체만의 할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모임에 장애를 주었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구약성경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안디옥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에서 믿은 사람들 중 일부가 안디옥에 와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로 아볼로와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상의를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의 근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빌립보에 들여온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말했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바울은 스스로를 말했습니다. 7,8절을 보게 되면 바울은 바리새인이 된 자기의 옳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지위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이야기 하게 됩니다. 9절을 보게 되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는 선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를 받는 것입니다. 의의 옷을 입힌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의 옷을 입으려고 바리새인으로서의 최첨단을 달렸지만 그것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었다고 바울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내에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 행위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임에 방해를 주는 것이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19절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라고 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곧 초대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첫 번째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린대로 율법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아시아라던가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교회에 방해를 주었던 사람들인데 여기 기록되어 있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고방식은 일반적으로 그노시스, 즉 영지주의자라고 하는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들의 한 파와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분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여러가지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러워져 있다는 사상을 그 사람들 관심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가진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천사가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렛에서 몸을 가지고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사상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요한일서에서도 요한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천사숭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을 가진 구속이 놀랍지만 그러한 사상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사탄이 원류이지만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상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여호와 증인이 그 중에 하나라고 보면 됩니다. 여호와증인의 예수님에 관한 관점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지만 예수님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구속을 지우는 것입니다. 지상에 왕국을 건설한다고 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여호와증인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젊었을 때 여호와증인과 변론을 자주 했습니다. 말씀에 그런 자는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씀처럼 그 사람들은 땅의 왕국을 생각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정말로 이대로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얼른 보면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며 말로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이러한 가르침에 동요될 때에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는 바로 22,21절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그렇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바울은 이것을 잘 기억하도록 빌립보에 써 보낸 것입니다. 여기 계신 우리들은 시민권(국적-일본어)이 같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각각 국적에 대한 자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자랑은 7,80년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시민권의 자랑은 영원합니다.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행복을 이어받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이 영원한 것을 상속받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받았고 참여되고 있습니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명예 시민권(국적)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실제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 있는 복을 가지고 유혹하는 사람들로부터 흔들리지 말라고 바울로부터 써 보낸 것입니다.

21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의 몸과 우리들의 지혜는 모두 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날 때 우리들의 몸은 영광의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에도 동참을 할 것입니다.

12-14절을 보면 바울이 이 영광을 추구해서 위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모임 전체가 점과 흠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권하는데 반해서 3장에서는 바울 자신 스스로도 주님을 만날 것을 예비해서 푯대를 향해서 전적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위에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일심으로 좇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3장에는 지역모임이 그 지역에 있지만 사실은 그 지역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저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완전히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우리도 동일하게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임이나 우리 개인도 땅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닌 것입니다.

 

4장에 가면 빌립보 안에 있던 실제적인 문제로 들어갑니다. 2절에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자매가 일치가 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라고 하는 분파적인 사고가 나왔습니다. 여기서는 유오디아나 순두게 어느 한 쪽을 편들지 말고 양쪽을 다 도우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 세상의 조직에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회사에서는 사장파라든지 전무파라든지 나누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는 한쪽을 편들지 말고 양쪽을 다 도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울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도우라고 하고 있습니다.

4절은 지역모임에 필요한 것을 바울이 써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모임에 기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본래는 기뻐해야 할 터입니다. 저도 연륜이 얼마 안되지만 만약에 모임에 왔는데 기쁨이 없다면 모임에 오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정에 돌아갔을 때 부인되는 자매님이 남편에게 오늘은 식사준비를 하는데 어떤 자매가 이런 말을 했다, 저런 말을 했다고 말하는 적이 없습니까? 그것은 모임에 기쁨을 없애는 작은 원인 중에 하나가 될지도 모릅니다. 보통 모임을 떠나서도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도 그 사람 쪽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강한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모임에 기쁨을 없애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이 모임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16번 나옵니다. 한 서신 안에 로마서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19, 고린도후서가 20, 빌립보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세 번째로 기쁨과 관련되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로마나 고린도나 세상의 힘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도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황제를 예비하는 예식이 행해지지 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임 가운데서 기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바로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분쟁과 불만은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모임 안에서는 다투면 안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우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권했습니다.

5절에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넓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관용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16번이 나오는데 그 중에 14번이 바울이 사용한 말입니다. 한 번은 사도행전에서 더둘로라는 변사가 듣는 청중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즉 불신자인 더둘로가 왕을 향해서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야고보서에 등장합니다. 의외로 야고보는 엄격한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유대에서 믿는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판단한 사람은 야고보였습니다. 이 야고보가 관용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외에는 바울이 편지 가운데 관용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관용하는 사람이었겠습니까?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도중에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가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2차 전도여행에서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바울은 한결같이 일하지 않은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섰습니다. 안디옥에서의 일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마치 이방인과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했는데 이것을 바울이 지적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 바울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의 바울은 타협은 안된다고 하는 믿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관용을 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게 되면 서로 의심이 있을지라도 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주님이 여러분들을 용서하심 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불만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받아들이셨으면 우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경험을 통해서 모임에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서 써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써 보냈습니다.

뒤에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3:20절에 "거기로서"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는 날이 가깝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의 또 하나의 의미는 만찬 이후 주님이 우리 주변에 아주 가깝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그와 같이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신데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거절하는 일들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쁨도 관용도 성령의 열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기도는 모임의 특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만찬 예배 때 한국어를 모르지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제가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순종하고 있다라는 것을 제 마음 깊이 깨달았습니다.

7절에서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1절부터 나오는 것들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평강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말씀은 말씀을 실행함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1-14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이 서신의 마지막에 모임에 꼭 있어야 할 것을 말한 다음에 빌립보 모임이 준 선물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써 보내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각가지 상황이 전개됩니다. 저는 앞으로 올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을 우리 앞에 전개될 상황을 통해서 알게 하려 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각가지 시련에 직면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생애 자체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주 안에서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모임이 처한 상황에서 각가지 시련이 있지만 주님을 기다리라고 하는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빌립보서를 써 보내고 5,6년 뒤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빌립보서가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4장에서 주님은 우리 가까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써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2014 5 4일 강서모임 -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