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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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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 에베소 교회

안녕하십니까? 강서 모임에 오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매우 현대적이고 아늑한 건물을 가지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여기 저기를 구석구석 둘러보았습니다. 홍형제님과 여러 형제들과 함께 건물 전체를 여기저기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건물에서 주의 진리의 말씀이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저의 기도가 여러분들의 기도도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바랍니다. 현재 일본에서 겪고 있는 문제를 위해서 여러 성도님들이 기도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 가족과 저의 자매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자매가 매우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자매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셨고 그래서 더 일본에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둘째 아이가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또 여러가지의 크고 작은 시험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아이가 다리가 부러졌으니 한국에 가지 말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얘기 그만하고 잔 다음에 내일 아침에 이야기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자매가 말하기를 좋아요 한국에 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 10~2 7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어제 김포모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드러내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같은 것을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1장 뒷 부분에 있는 것을 본 다음에 2장 첫번째 에베소 교회에 나가는 편지를 보겠습니다. 10절의 보면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보면 매우 고유한 표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아도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도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서신들에 나오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그 날을 말하는데 그 날에는 휴거로부터 그 이후로 진행되는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 주의 날이 가리키는 사건은 대환난을 말하는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주의 날은 성격이 다릅니다. 이 주의 날은 주님의 날인데 주님의 성격을 나타내는 그러한 날입니다. 이것은 주일(일요일)입니다. 다른 표현을 보면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을 볼 때도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의 만찬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것을 아시죠.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의 주장을 그 만찬과 날 자체에다가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의 날이 안식일과 같은 날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휴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듯이 주의 날은 여러분들이 쉬기 위해서 주어지는 날은 아닙니다 일주일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일이 가장 바쁜 날이기도 합니다. 다른 날들보다도 어떤 형제님들은 주일날 가장 더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주의 날에 주의 만찬과 주님 자신을 즐깁니다. 이 주의 날에 요한은 주의 만찬을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밧모섬에는 지역모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은 오직 지역모임에서만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에 타고 있을 경우에 만찬을 떼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은 오직 주의 날에 지역교회에서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 만찬은 특정한 정해진 무리가 정해진 장소에서 떼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만찬 이후에 그 떡과 잔을 들고서 병원으로 가서 그 사람에게 따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억할 것은 주의 만찬은 주의 날에 한 자리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예식입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은 주의 만찬을 떼고 있지는 않지만 주의 계시를 보고 있습니다. 나팔 같은 소리가 요한의 등 뒤에서 들렸습니다. 저는 왜 소리가 뒤에서 났는지 궁금합니다. 한가지 생각을 제시해봅니다. 요한이 바랬던 것은 주님의 큰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요한에게 하실 말씀은 장차 있을 큰 왕국의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일을 요한에게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요한은 미래에 있는 왕국을 바라보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뒤에서 현재의 상태에 있는 소리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너 보는 것을 일곱 지역모임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3:15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은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며 디모데서를 썼습니다. 지역모임은 특정한 지역에 특정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형제들은 한 도시에 한 지역모임만 있어야 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로마서를 보게 되면 로마라는 한 도시에 여러 개의 지역모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정한 한 지역에 어떤 한 무리의 성도들이 모였다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신약 교회의 중요한 점은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역적인 고려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상태입니다. 한 장소에서 활동하는 지역모임이 있습니다. 그 한 지역에서 성도들이 하나로 모여 하나님의 집에서 활동합니다. 지역모임을 생각할 때 이 두 가지 지역적인 위치와 영적인 상태를 고려하며 활동해야 합니다.

요한은 돌아보면서 자기가 본 것을 보는데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촛대는 일곱 금 등대입니다. 12절에 일곱 금 촛대(등대)가 나와있습니다. 11절에 말하고 20절에 나온대로 일곱 교회는 일곱 금 촛대입니다. 우리가 고려해야 될 두 가지 지역모임의 면이 나와있습니다. 촛대로 나와있는 일곱 등대는 지역에 놓여있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역모임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상징이 있습니다. 두번째 상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일곱 별입니다. 일곱 별이 있고 일곱 등대가 땅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서 지역모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등대는 땅에 빛을 비추도록 구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별은 하늘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일곱 등대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별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영역에 더 가깝게 존재해 있습니다. 별들은 무엇이며 등대들은 무엇입니까? 촛대는 지역에 위치한 지역모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별들은 지역모임에 대한 천사를 나타냅니다. 이제 성경의 어려운 부분으로 저희들이 들어왔습니다. 지역모임의 천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모임의 가장 아름다운 자매님을 아! 천사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저의 자매가 가끔 천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가끔 아니기도 합니다마는 천사는 물론 가장 아름다운 자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의 목자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찾아보면 한 목자가 무리 전체를 이끄는 그런 목자는 없습니다. 장로들 중에 수석장로가 있고 나머지 장로가 있는 그런 개념은 성경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장로들은 항상 복수로, 여러 명으로 표현하지 한 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 천사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여자도 아니고 한 명의 장로도 아니라면 정말 실제의 천사를 말하는 것일까요? 실제 천사를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2장과 3장을 보면 주님께서 직접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천사(사자)더러 너에게 이런 면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강서모임의 사자에게 바로 너에게 이러이러한 것이 문제다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말의 사자가 영어에는 천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하고 있는 것임) 결국 천사는 여자도 아니요, 장로도 아니요, 남자도 아니요, 실제 천사도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하고 그만둘까요?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천사가 있었다고 기록된 사실을 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왔을 때 문을 두드렸을 때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왔습니다. 다른 성도들은 그는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정말 실제의 천사가 있었다고 믿었을까요? 히브리 말에서 종종 천사라는 말은 실제의 천사 이외에도 대표, 표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은 자를 멸시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 10절에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소자를 위한 천사가 존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소자에 대한 대표하는 무엇이 항상 하나님 앞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의 경우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천사의 경우를 보았는데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면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의 사자에 대한 개념을 잡기가 좀 더 쉬울 것이라고 봅니다. 지역모임에 도덕적인 상태, 또한 영적인 상태의 표시로 이 사자를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한가지를 말해 보겠습니다. 중국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은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캐나다에 있는 사람들은 동양에서 온 사람들은 다 똑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물론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중국사람이라고 할 때 대표적인 얼굴, 한국사람이라고 할 때 대표적인 얼굴, 일본사람이라고 할 때 대표적인 얼굴, 그 얼굴의 대표적인 특징 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 특징이 그 나라의 특징을 대표합니다. 성경의 계시록에 있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중국사람의 천사, 한국 사람의 천사, 일본사람의 천사, 즉 대표성을 가진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2,3장에 나오는 사자와 천사의 의미를 좀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모임에 있어서 지역모임의 사자(천사)로 불려지는 이 사자가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서 지역모임의 상태를 대표하고, 땅에서는 촛대로서 빛을 비춥니다.

요한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일곱 등대 사이를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2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왔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이상을 보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7절에 보면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나요? 마태복음 17장에 하셨던 동일한 일을 주님께서 계시록에서 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변화하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이 여기 계시록 17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자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먼저 손을 대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친근하고 매우 다정하고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환경에 눌리고 하나님의 특징에 압도되어 죽을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다가오셔서 손을 대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만짐의 능력을 저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낙심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와서 손을 잡으며 힘내십시오 하면 다시 열심히 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뿐만 아니라 저희들에게도 주시는 주님의 손대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엎드려 기도하실 때에도 주님께서는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가끔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를 만져주십시오.” 아이들이 밤에 놀라서 흥분해 있을 때 할 일은 손을 대 주는 일입니다. 제가 일본에 처음 온 첫날 밤이었습니다. 세 살 짜리와 한 살짜리 아들 둘이서 밤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밤에 지진이 났습니다. 건물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아기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들 둘 사이에 제가 누워서 두 아이에게 손을 각각 얹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 둘이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잠을 못 잤습니다.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모든 손이 제 위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진정 영혼을 손대주시는 것을 그 때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그리고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주셨습니다. 첫번째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흥분해 있을 때 저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처음이자 나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삶 가운데서 주어지는 목적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할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돌보아야 될 아픔이나 약함이나 두려움이 여러분들을 두렵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이 두려워 말라는 말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300번 이상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희들 가운데 두려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혹시 두려움이 있습니까? 건강 때문에 혹시 걱정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패역한 세상에서 자녀들이 자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하십니까? 사단이 지역모임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십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실 많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주님께서 이미 정복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5절에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하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종종 제 마음 가운데 상기시키는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순간 살아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있습니다. 사망은 우리 몸의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옥은 영혼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이 사망과 음부 두 가지의 열쇠를 주님께서 다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 열쇠를 가졌는지 성경 전체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열쇠를 가진 자라는 표현을 다 살펴보면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권세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을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천국의 열쇠를 가진 것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권세를 부여 받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죽음이 여러분들의 가장 큰 두려움입니까? 정말 그러하며 더 큰 것이 있습니까? 암에 걸리신 분이라면 암이 다시 재발할까 다시 재발하여 자기 생명을 위협할까 항상 두려움을 갖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무언가 이상이 보이면 이것이 암이 아닐까 걱정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통증이라도 느끼게 되면 이것이 암 때문인가 걱정합니다. 내가 죽어가는구나 하는 내재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망과 음부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을 의지해도 될까요? 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고 항상 살아계시고 그리고 처음이자 나중이신 이분을 내가 믿는 다면 나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계시록 전체에 대한 개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간단하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습니다. 맨 첫 부분은 이제 내가 본 일입니다. 1장이 네 본 것으로 첫번째 것이고 2장과 3장이 현재로 이제 있는 것입니다. 4장부터 마지막까지가 바로 장차 될 일입니다.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간단한 분류방법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이제 현재 지역 모임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제 있는 지금의 일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머지 계시록은 장래에 관한 일입니다. 장차 일어날 일 중에는 매우 끔찍한 일들이 있으며 끔찍한 일들의 일부는 일본에서 얼마 전에 일어난 일과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큰 대환난을 직접 통과하지 않는데 대해서 저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는 물론 아닙니다만 여러분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충분히 혼자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부분을 큰 쓰나미와 큰 지진이 쓸어버린다 할지라도 저희들은 그 때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때 저희들은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앞서 먼저 휴거 되어 들림 받습니다. 계시록 4~19장에 있는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에 제가 그 땅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같이 감사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의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 중에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땅에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제 큰 아들은 아직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가 걱정이 됩니다. 저는 휴거 받습니다. 저도 매일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매일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셔야 될 것이 주님 아이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들이 구원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저는 항상 기도를 드립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은 기록된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날 끔찍한 사건들의 첫 단계가 매우 가까워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이 큰 환난을 통과하셔야만 합니다. 구원받지 않으신다면 이 지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환난들을 모두다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이 있으며 이것은 실제입니다. 이 땅에 떨어지는 실제의 심판이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된 자만이 곧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말하기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3월의 일본에서 일어난 그 쓰나미를 보고 믿을 수 없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계시록 4~6장은 실제로 일어날 일이며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 오늘밤 피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차 올 진노로부터 여러분들 피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구원의 길은 단 하나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원히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때 여러분들이 이 땅에 있으면 그들 가운데서 심판 받으십니다. 제 마음이 두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걱정해서 두렵습니다.

제가 원래 복음을 전하려고 지금 이 시간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몇 분만 용납해 주십시오. 2천년 전에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어느 책을 보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2천년 전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 땅을 다녔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어떻게 그 사람이 다니면서 행동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신뢰할만한 증인들입니다. 그 각각의 기록들이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혀 죽었는지,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은 것과 그 때에 해가 가리워졌다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셔야만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제 믿음은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실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십시오. 나는 안 믿어요.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을 준비하시고 여러분들을 만날 준비를 오늘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그런 주님을 만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심판자로 만나기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거듭나셔야 되고 구원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믿는 자들에게도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참 인내심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께서 이제 금 촛대(등대) 사이를 다니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지역모임 가운데 다니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한 지역 모임이 있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여기서는 또 하나의 진리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십니다. 모든 지역 모임 사이사이를 다니시고 계십니다. 주의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역모임들은 하나의 연맹으로 연결되도록 된 것일까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제를 가지게 됩니다. 제가 속해 있는 삿보르 모임은 강서모임의 어떤 연맹이나 연합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까운 교제를 갖고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지역 모임들 간에 교제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의 연합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동아시아의 지역모임의 연맹에 속해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동아시아 모임 연합의 대표장로를 뽑는데 저희는 투표하지 않습니다. 지역모임간의 교제는 한 단체나 연맹에 속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모임은 하나의 독립되어 서 있는 등대로서 독립되어 존재하고 또한 다른 독립되어 존재하는 등대들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과는 다릅니다. 성막 안에는 하나의 등대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줄기에서 가지들이 나간 등대였습니다. 이것은 한 민족의 증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촛대는 한 나라에 연결이 되어 있는 촛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들이 보고 있는 촛대(등대)들을 각각 독립되어 있는 촛대들입니다. 이 땅 위에 몇 개의 등대들이 있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서울에는 몇 개의 등대가 있습니까? 모릅니다. 저는 모릅니다만 분명한 것은 각 등대는 독립되어 서서 주님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역 모임들끼리 뭉쳐야 된다고 가르치는 교사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것에 동의를 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혹시 하나가 잘못될 수가 있으니 지역 모임들을 통제하고 조율해야 될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은 인간의 조직으로 대체를 합니다.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기 위해서 조직은 필요합니다. 모두 같은 방향을 보게 하기 위해서 의자를 조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시간에 한 사람의 교사가 말하도록 하든지 한 시간에 열 사람씩 나와서 여기저기서 떠드는 그런 일이 있지 않도록 조율이 필요합니다. 적당하고 규모있게 하기 위해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지 조직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런 사람의 조직하고 정돈하는 능력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나 인도하심을 대체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랍니다. 저는 2 1절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부터 물러나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활 할 때에 주님께서 각각 독립 된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존재하시는 이 지역 모임에 내가 있어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께서 각각의 지역 모임에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터키 땅이 되어있는데 아시아의 밧모섬에 있는 아시아해 해안을 바로 마주 보고 있는 도시가 바로 에베소입니다. 이 에베소에 있는 모임은 매우 놀랍고 큰 역사적인 일을 가졌습니다. 능력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결과로 말미암아 에베소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책들을 태움으로 큰 부흥이 일어났던 것과 에베소 모임을 위해서 따로 편지를 써 보낸 것을 기억하시죠. 디모데서를 써 보낼 때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큰 지역모임으로 생각합니다. 시작할 때는 순수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옛 삶을 정리해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여러 유명한 형제들이 에베소를 방문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 있었는데 물론 에베소 모임이 시작하기 전이었을 것입니다만 아볼로 또한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에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놀라운 출발을 했고 말씀을 배우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큰 복음집회가 있었고 큰 규모의 말씀집회가 또한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 지도된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에베소 장로들을 바울이 불러서 장로들을 따로 가르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에베소를 당시에 방문하고 돌아갔다면 ! 에베소는 정말 대단한 곳이야!’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그 능력을 너희들은 경험해봐야만 해. 성경공부 시간에 그 형제가 말한 것을 한번 들어보았는가? 디모데라는 형제는 정말 훌륭한 복음전도자였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당시에 우리가 에베소를 보고 왔다면 당신도 한번 보고 와야만 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임에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좋은 행위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네 행위와 네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아노라이 에베소의 에너지()를 느끼십니까? 이들에게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거짓된 것을 드러내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에 들어와서 가르칠 때 성도들과 장로들이 저 사람은 가짜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용납지 아니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에는 완벽한 미움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즉 악한 것을 미워했습니다. 악한 가르침을 미워했습니다. 제가 만약에 에베소에 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 10분 전에 도착해서 조용히 성경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 형제가 여기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울이 보낸 서신을 여기에 서서 읽고 있습니다. 모든 모습이 잘 조화되고 완벽해 보입니다. ‘야 이것은 하늘나라와 다름없구나 완벽하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지역모임을 내가 멈춰버리겠다. 네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이 지역 모임에 더 이상 너희 증거가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의 행위는 완벽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단 한의 문제입니다. 이 단 한의 문제가 지역모임의 증거를 멈춰버립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행위와 완벽한 미움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제 마음을 보시며 제 행위를 보십니다. “네가 모든 것을 옳게 행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모임 안에 사랑이 없구나. 그래서 네가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옮기겠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지역 모임을 심으시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심으신 지역모임을 없앨 권세도 갖고 게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강서지역에 지역모임을 심으신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강서모임에 주시는 경고는 주님께서 이 모임을 없앨 권세도 갖고 계십니다. 저희들은 저희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 1~3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3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마음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 가운데 바람을 들으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결혼했을 때를 내가 기억한다. 너는 나를 매우 순수하게 사랑하였도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제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변해버려서 그들의 행위가 변질되었습니다. 에베소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점점 냉랭해져서 주님께서 너희들의 증거를 없애버리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한 기억하시기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놀랍게 구원해냈다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억해주고 계십니다. “네가 나의 피로 값 주고 산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라.” 우리가 주님의 백성인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여호수아 23 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약속하신 땅에 들어왔으니 이제 여화를 사랑하라. 여호수아서는 승리로 가득 찬 책입니다. 23장에서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더 싸워서 또 한 번의 승리를 쟁취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열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열정도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사랑하고 계시면 진정한 열정이 나올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열심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물리적인 공간에서 열정은 항상 사랑을 수반하지는 않습니다.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매우 가슴 아플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사랑을 갖고 계신다면 또한 진정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열정이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저희들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하시고 그에 따르는 행위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의 삶을 한 번 보고자 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으며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서 귀를 벨 수 있을 정도였고 원하면 목도 벨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아침이 오기 전에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열정과 열심이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여한 복음 21장을 보게 되면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매우 당황스럽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물론 헬라어로는 조금 차이는 납니다만 그것이 지금 중요한 관건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베드로 속에 사랑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은 보고 계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이전에 베드로는 열정이 있었지만 사랑이 부족했었습니다. 이제 이후에 베드로 안에 있는 사랑을 주님께서는 보셨고 그 후에 베드로가 어떻게 자기의 삶을 드려 주님을 증거하게 되기까지 열정을 갖게 될 것인지도 주님께서는 보셨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돌아보시기를 권면해 드립니다. 여러분들 모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습니까? 모든 집회들이 좋습니까? 여러분들끼리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잘 되고 있습니까? 한국의 가장 모범적인 모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리고 저의 마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이 땅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가 미워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이것이 좋다라고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저희들 마음을 주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집회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그제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의 모임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후에 하늘에 있는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강서에 모이는 무리들을 보라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질서 있는 모습보다는 주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7절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고 각각 개인에게 이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부름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부름입니다. 이것은 즉시적이고 듣는 저희들에게 바로 이 순간 적용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에베소 교회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듣는 각자의 책임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특별한 축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말씀드리는 것은 이 일곱 교회에게 주어진 편지 가운데 이기는 자는 전부다 진정한 믿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믿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믿는 각자를 말합니다. 2등급 믿는 자들은 없습니다. 진정한 믿는 자 아니면 믿는 척 하는 가짜일 뿐입니다. 참된 믿는 자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에게 주님께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생명나무의 과실은 영생의 상징입니다. 이 낙원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낙원이 세 번 나옵니다. 십자가의 옆에 매달렸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의 낙원이 나옵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들어갔을 때 내가 낙원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같이 있습니다.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는 어떠한 특별한 그룹에 믿는 자들이 아니라 참으로 단순하게 진정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 질문으로 여러분들이 진정 믿는 자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내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라고 하시면 나는 거듭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저는 믿음이 약한 분을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진정 믿는 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참된 영생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로 영생을 얻으시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이 계시록에서 볼 때마다 저는 좀 당황스럽습니다. 이 시간에 제 자신을 조금 드러내었습니다. 저는 외식하는 자일까 봐 항상 두려워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면서 저 자신을 비춰봅니다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가? 이 말씀 집회가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말씀 자체가 제 자신에게는 어떤 일을 해줍니다.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해도 제 자신에게는 영향을 줍니다. 이런 집회가 끝나고 나면 저는 달려가서 제 방에 콕 틀어박혀 숨고 싶습니다. 제 자신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부족함을 느낍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밤 여러분들이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의 사랑이 그리스도께 다시 불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되는대로 흘러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 깊이 흐르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그()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합니다. ()가 우선이고 나는 마지막입니다. 이 사랑을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먼저이고 나는 나중이다. 그리스도께서 우선이다. 오늘 에베소 교회를 보고자 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희들 가운데 이런 동일한 문제가 있다면 오늘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 5. 7(토) 강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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