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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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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9. 11:46 횃불/1982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15)

죤·리치

광야②

마라

이곳은 하나의 더 깊은 시련을 의미한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15:23).

처음 볼 때에는 마치 구원을 주는 것 같았던 것이 사실은 쓴 것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이 주실 것을 기대하는 대신 세상의 것에 매달리는 마음이 얼마나 않은가! 그러나 주님은 이런 것을 허락하시기에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망상적인 기쁨을 쓴 것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순례자의 생을 시작한 이후 마라를 통과하여 왔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정에서 보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보았다. 사랑하는 부모가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등지는 모습이나, 한 때 도와줄 것으로 바랐던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소하던 모습들은 참으로 쓴 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같이 냉랭하고 잔인한 세상의 불쾌함을 견딘다거나 우리가 축복하려던 자들로부터 의심의 눈총을 받는다는 것 등은 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고분이 약속하신 것이며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고 전날의 성도들과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이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16:33),”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16:33, 14:22).

스스로 주님의 것이라고 천명하는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가는 쉬운 길을 찾아서 세상으로부터 우정과 인정을 얻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그리고 고난당하던 그분의 성도들이 밟았던 그 옛길은 아직도 마라가 있다. 그 길 밟기를 주저하는 겁장이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바울을 보라. 그는 고난당하고 있던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려고 가던 도중에 회심하고, 즉시 예수님을 위하여 그가 얼마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9:16). 그리고 이 고난이 어떤 것인가는 고린도후서 11 23~28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다. 베드로전서는 성도를 특별히 광야를 통과하는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으며 고난이라는 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 19, 3 14~17, 4 12~19절을 읽어보라.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상 또한 어떠한가를.

 

마라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보여 주셨는데 이것을 물속에 던졌을 때 그 물이 달아졌다. 얼마나 그 쓴 물의 가까이에서 단 나무가 발견되었는가! 베드로전서 221~23절과 3 17,18, 4 13절에서 볼 때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께서 고난받는 나그네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

그 나무는 물속에 있었고 그 물은 달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사랑스런 발이 한 때 밟고 지나가신 동일한 사막을 밟고 있다. 우리는 그분이 당하신 동일한 종류의 시련들을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과 그러한 교제를 갖고 있는 그 길을 누가 밟아 나가기를 두려워하겠는가!

그 무섭고 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주님 홀로 마시었다. 그와 같은 고난에 우리는 결코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주님께 임한 그 고난, 즉 악한 세상에서 받은 하나님의 증거로서의 고난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걷는다면 우리도 참여할 수 있다. 앞서간 많은 분들이 그 고난에 참여했다.

바벨론의 풀무불에 던져졌던 세 히브리 청년들을 보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고귀한 증거를 그들은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불가운데 홀로 걷도록 버려지지 않았다. “형상이 인자 같으신 분이그들과 함께 하셨다. 누가 주님의 이같은 동행하심을 방해 할 수 있겠는가!

빌립보 감옥에서의 바울과 실라를 보라, 먼저 잔인한 대우를 받고 착고에 채워졌다. 이것은 마라였다. 그러나 그 나무는 물속에 있었다. 밤중에 감옥에서 찬양이 울려퍼졌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잘 안다. 마라의 물은 달게되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이것이다. 감옥을 옮기거나 불을 끄는 것이 주님의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들을 인내하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주님의 방법인 것이다. 주님은 시련으로부터 우리를 면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이것은 일상생활의 수많은 사소한 일들에까지 적용된다. 그는 가시를 제거하지 않고 은혜를 주어 견디게 하신다(고후 12:8,9). 그렇게 하여 쓴맛을 달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 5:3).

 

엘림

마라에 이어 열두 개의 우물과 칠십주의 종려나무가 나온다. 이곳은 사막의 푸른 지점으로서, 시련 후에 왔기에 더욱 반길만한 곳이다. 엘림은 가나안이 아니다. 오히려 도중에 있는 쉼의 장소이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될 때 누릴 기쁨의 시식(試食)이며, 종려나무 그늘 아래에서 초막절을 지킬 것에 대한 기대를 가져다 준다. 우리에게 그것은 장차 올 영광을 말해준다. 그 영광은 광야 길이 끝난 후에 있을 것이나, 이제도 우리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 중에 바라는 것이다. “복된 소망을 그렇게 꽉 붙잡고 본향의 기쁨을 동경하는 것은 쓴물을 마실 때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니 그 이유는 시련은 약속을 달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난과 영광은 베드로전서 1 2, 4 13, 5 1,10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 우리의 마라와 엘림도 서로가 매우 가까이 있다.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폭풍 후에 주님께서 주신 고요함을 즐길 수 있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은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슬픔과 눈물 뒤에 재연합의 잔치에서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 생의 폭풍을 잔잔케 하시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본향에서 주님의 영접을 받을 때 그렇게 될 것이다. , 거기에 있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는가!

 

거기, 생명의 수정강가에서,

거기, 생명의 경이스런 나무 밑에서,

거기, 구름이나 불화가 없는 곳,

어린 양과 영원히 있게 될 영광의 상속이여!

너와 나를 위한 그 어떠한 소망인고!

 

(1982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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