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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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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5. 10:23 횃불/1984년

광야의 성막(8)

죤·리치

소제

소제는 주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삶, 그분의 이 땅 위의 삶 가운데서 보여주신 온전한 인격을 의미하며 그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사장들의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루는 거친 것이나 고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 찧거나 체로 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인성(人性)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도 온전하신 분이셨으며, 그분에게서는 타락한 인간의 속성 따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징계와 채찍이 종종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만들지만 우리의 복스러운 주님께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없었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데 있었으며, 온유하심과 복종하심은 원래 그분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한결같았습니다. 우리는 한 때 순종하다가 그 다음엔 짜증을 부리고, 한 때는 담대하다가 다음 순간 소심해지며, 한 때는 열정적이다가 이내 냉냉해지지만 우리의 주님은 항상 동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분의 순종은 그 영광의 언덕에서나 그 고난의 통산에서나 똑같았습니다. 그분의 온유하심은 어린 아이가 그분의 팔에 안겼을 때나, 그분의 원수들이 그분을 재판하기 위해 그분의 주위를 둘렀을 때나 똑같았습니다.

 

기름이 그 위에 부어졌습니다.

기름은 성령의 상징입니다(요일 2:27, 고후 1:21~22)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으셨습니다( 10:38). 그분은 모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 그분의 책망과 위로, 그분의 섬기심과 고난 당하심은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되어졌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 9:14).

 

유향을 그 위에 놓았습니다.

이것은 순결과 좋은 향기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불에 점점 살라질수록 그 향기도 점점 드높아갔습니다. 주님도 또한 그러하셨습니다. 그분의 슬픔과 고난, 특히 십자가의 고난은 그분의 성품의 좋은 향기를 뿜어내게 만들었으며, 그분의 실질적인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누룩은 부패시키는 물질이며 성경에서는 항상 악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에게서는 악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분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소제물에는 꿀을 넣지 말지니누룩이 부패하고 시어빠진 인간 본성을 상징한다면 꿀은 인간본성의 달콤함을 상징합니다. 꿀은 이 땅 위에서 가장 달콤한 물질 중의 하나인 만큼 다른 물질과 섞이면 쉽게 부패해서 변질됩니다. 주 예수님에게서는 이와 같은 성질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타고난 애정처럼 쉽게 식어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기에 허리를 굽혀 자기를 배반할 자의 발과 자기를 저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사이에 주고 받는 사랑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이내 발효하는 꿀과 같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그저 자연적인 달콤함이어서 방해를 받거나 약간 무시를 당하면 쉽게 변해버립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랑에 근거한 우정과 교제는 잘 사그라지거나 실패합니다. 충성스런 상처가 없는 사랑은 주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칭찬을 하던지 비방을 하던지 간에 사랑의 대상을 끝까지 붙들고, 자신의 즐거움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대상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 때로는 책망도 하고 고쳐도 주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소금도 소제물의 한 성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본래 방부성이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4:6). 이와 같은 특성은 우리의 주님 안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충성스런 사랑으로 마르다와 베드로를 나무라셨으며, 껍데기뿐인 바리새인들의 종교를 그들의 면전에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분은 은혜가 충만하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가 결코 무작정 관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분의 책망은 너무 야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화목제

화목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여호와와,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 모두가 각기 자기 몫을 가졌다는 점에 있으며, 이 점이 번제와 다릅니다. 번제는 오직 여호와의 몫이었으며, 번제물은 만 위에서 온전히 불살라졌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몫을 받으시고 만족하게 여기신 후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교제를 위한 제사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화목제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같은 몫을 나누는 것은 교제의 분명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큰 특권이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그 노인의 탕자처럼 우리는 그분의 마음에 영접을 받아 그분의 식탁에 함께 앉혀졌으며, 이 모든 것들은 온전한 의와 온전한 화평으로 되어졌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이 화평과 교제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영혼의 즐거움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흔들거리거나 깜박거리는 경험이 아니며, 어떤 영적인 경지에 도달했거나 고결한 인격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실재이며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사역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셨을 때 율법과 공의가 우리에게 부과한 모든 죄과는 그분에 의해 해결되었고, 우리의 부족한 모든 덕행은 그분에 의해 채워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화목제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내면의 온전하심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름은 단 위에서 모두 불살라졌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몫이었습니다. 소제의 모든 유향처럼 화목제의 모든 기름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 땅의 그 누구도 평가하지 못할 것이 숨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곧 주님 안에 감추어진 내면적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분의 거룩하신 영근 안에 숨쉬던 사랑의 크기와 헌신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훌륭하심을 온전히 평가하신 후 우리를 그 아드님 안에서 열납하셨음을 아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콩팥도 함께 드려졌습니다.

이것들은 내부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콩팥은 때때로 폐부(肺腑)로 번역되어지기도 합니다. 오직 주 예수님만이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그 살피는 눈을 자신있게 청하여 자기 내부를 살피도록 보여드릴 수 있었으며, 오직 그분만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연단하소서”( 26:2)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의 큰 고난의 시험을 통과하셨을 때 그분이 외면적으로는 물론 내면적으로도 단련하셨음이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레는 그렇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거듭나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재단에 드려지기에는 부적당합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육적인 마음,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히 하나님과의 화평을 손상시키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합니다. 만약 화목제의 효력이 없었다면 내면의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영혼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우리의 무가치하고 죄악된 자아는 자기 눈 앞에서 모두 도말되었고 장사되었으며 우리 안에 거하는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가리움을 받았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그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 가운데 교제를 나눌 수 있음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빛 가운데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전혀 죄를 범하지 않았다거나 우리 안에 죄가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기때문입니다. 우리의 발은 구속의 굳건한 토대 위에 서 있으며, 우리의 화평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영원히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번 봉납(奉納)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으며, 그 효력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해 하시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제 입니다.

우리의 고결한 마음이나 혹은 영적인 어느 경지에 이른 것이 그 화평의 토대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들은 쉽사리 동요하는 불완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그 온전한 사역만이 화평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화목제 안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희생제물은 여호와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피는 제단에 뿌려졌고 기름과 내장은 향기로운 냄새를 위해 불살라졌으며, 이것들은 여호와의 몫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몫을 먼저 받으시고 나면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도 자기 몫을 각각 받았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만족히 여기셨다는 뜻이며 그러면 이내 식탁이 마련되고 이미 제단에 드려졌던 희생제물이 식탁에 공급됩니다. 그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이며, 그 식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장소입니다. 십자가와 주님의 만찬과의 관계도 그와 같으며,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식탁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찬식은 바로 십자가에서 성취해 놓으신 일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성도들이 교제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운 제사장들이 교회 안에 제단을 쌓아놓고 그 주위에 있는 산 자나 죽은 자들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얼마나 참람한 모욕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곧 믿음의 기초들을 뒤엎는 행위이며,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으신 사역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식탁에서, 사랑하는 아드님 위에서, 우리는 화평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또 다론 사람들과도 교제를 나눕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모든 눈은 그리스도 위에 고정이 되고, 모든 마음은 만족히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내면의 귀중함과 헌신됨을 올바로 측량하실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그분의 사랑과 능력의 상징인 흔든 가슴든 어깨를 먹으며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가슴은 지친 머리를 위해 얼마나 부드러운 베개가 될 것이며, 그분의 권능의 어깨는 힘없고 미약한 영혼에게 얼마나 강한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제사를 살펴보면서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교훈들을 간단 간단히 공부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의 보좌 앞에 섰을 때,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었을 때, 죄와 타락한 인성의 마지막 자국이 지워지고 없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온전하신 희생제물, 그 크신 화목제물의 진정한 가치와 귀중함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1984 9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