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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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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2. 07:35 횃불/1986년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7)

 윌리암 윌리암즈

소년들은 이내 저의 변화를 감지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2년 후 제가 그 조선소를 떠날 때까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는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핍박은 배가(倍加)되었습니다. 저는 십장이 없으면 조립 공장으로 들어가기를 꽤 무서워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큰 펌프 라이너를 위해 천분의 1인치까지 치수를 재려고 거기로 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십장이 공장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저의 도착은 장난이 시작되는 신호였습니다. 한 명이 물고기 상자 위에 올라가 복음 전하는 것을 흉내내자 이내 군중이 그 주위로 몰려 들었습니다. 저는 수지(獸脂)와 쓰레기, 널과 물고기 상자의 연발 사격을 받으며 골라야 할 치수들이 있는 기관으로 갔습니다. 다수의 기계공들이 그 큰 기관 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목사의 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콧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천 분의 일 인치까지 치수를 재는 일은 안정된 손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당시 마이크로미터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아들은 몹시 성을 내며 큰 망치를 들고 제가 만약 계속하면 제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다행히도 십장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저는 간신히 그 일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관 뒤에서 걸음을 옮겼을 때 6피이트의 높이로 무거운 꼬리 굴대를 옳기던 기중기가 하마터면 제 머리를 때릴 뻔했습니다. “비켜라, 윌리암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네가 바라는 것보다 더 빨리 너를 천국으로 보내 주겠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마지막 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조선대 위에 있는 배의 선미재(船尾材)에 구멍을 뚫는 책임을 맡은 기관장이 출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배는 곧 진수 될 예정이었으므로 십장은 저에게 가서 그 일을 떠맡아 끝을 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세 명의 더 어린 견습공들과 한 명의 숙련공이 그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전 내내 아무 일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내를 가로질러 오는 저를 보자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이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려움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주님을 바라보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일장연설을 했습니다. 저는 ()”이 아니고 5년째의 견습공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절대적인 복종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 그 연설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들은 병든 ()”이 그 일은 토요일 정오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월요일까지 공장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일을 토요일 정오까지 끄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많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함이 없이 저 거친 소년들을 다룰 수 있을까? 제가 만일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기관사 스타일로 첫 번째 위반자를 두들겨 눕힌 다음 비계 아래 바다 속으로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완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일을 시작하도록 감시했습니다. 기계는 잘 작동했습니다. 주수기(注水器)에서 일하는 견습공으로부터 날아온 뜻밖의 비눗물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은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한 소년이 피곤해지자 저는 그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금요일 정오까지 쉽게 끝낼 수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금요일 아침 일찍 일을 끝냈으므로 천공기(穿孔機)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공기는 배의 후미 굴대를 위해 터널 안으로 들어간 긴 굴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밖에 있는 체인 도르래 장치로 그것을 달아 올리는 동안 저는 두 소년을 보내 굴대를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게 했습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담배만 피워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을 볼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오히려 굴대를 반대로 잡아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하나 더 보내며 엄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을 거스르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하루 더 끌 심산이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사람을 안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하지만 역시 조용했으며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저는 바깥에 앉아 어떻게 하면 혼자서 굴대를 끌어낼까 궁리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굴대를 들어 올릴 뿐만 아니라 끌어내기까지 하려고 선대(船臺)와 도르래 장치를 조정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잘 해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네 명이 온 힘을 다했어도 그 굴대를 1톤이 넘는 도르래 선대에 역행하여 잡아당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굴대는 반증 밖으로 나왔으며 저는 위치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강철 틀 위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굴대가 갑자기 기울어지면서 제 팔이 구멍의 날카로운 날에 걸렀습니다. 2인치 길이만큼 깊이 베인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저는 구멍 안에 있는 굴대를 낮추었습니다. 소년들 중의 하나가 선체의 펌프 입구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다가 제가 다쳤다는 것을 알리고는 사무실에 있는 적십자로 갔습니다. 상처를 치료 받고 돌아왔을 때 소년들은 이미 굴대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놓고 천공기를 내린 다음 모든 것을 트럭 위에 실어 놓고 기계공장으로 갈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때가 금요일 오후 3였습니다. 그들은 잘못을 후회한다고 말했으며 일어났던 일들을 사장에게 말하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저와 함께 기계 공장으로 곧장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그들이 욕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십장은 그 일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미끄러져서 팔이 구멍에 걸렸었다는 말은 했지만 그 이상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 소년들과 아주 친해졌습니다. 조선소에서는 오직 현실만이 중요시되었습니다. 사무실과 공장과 상점 안에서는 어느 정도 질서와 존중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검은 분대사이에서는 빨갛게 단 리벳 (rivet)을 모자에나 머리 또는 목에 갖다 대는 것은 오직 왁자그르한 웃음만을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어린 견습 기관사들은 펜 생활에 맞지 않은 입회식을 치뤄야 했습니다. 감독과 십장은 신병을 모집하는 하사관들처럼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떤 친분도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나중에 우리가 캐나다 기계공장과 조선소에서 본 것들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선소들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몇 명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거칠고 일손이 빠른 조선기사들 사이에서 구원받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가정이나 외국에서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맥의 전도를 통해 두 세 명의 젊은이가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그들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 구내에서 저와 함께 일했던 40명 남짓한 도제들 중에서 구원받아 계속 주님을 위해 산 사람은 제가 헤아려 보는 한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저는 아마도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들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간증은 제로였습니다. 많은 햇수가 흐른 후에 저는 저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 크롬비라 불리던 한 젊은이가 케이프 타운과 영국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몹시 애석했습니다. 그가 보조 기관사의 자격으로 남 아프리카로 가는 기선을 타려고 애버딘을 떠나는 날 저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간청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자기는 그것을 숙고해 보았으며 첫 여행을 마치고 애버딘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리스도를 믿을 작정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그의 유해는 바다 속으로 던져져 바다가 죽은 자들을 내어 놓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은 동 아프리카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는 원주민들을 너무나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의학적인 도움을 소용없게 만드는 어떤 것을 그에게 먹였습니다. 그는 애딘버러에서 수술을 받은 후 자기가 살았던 삶대로 큰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 그는 제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정한 기관사들조차 분개하는 일들을 입에 담거나 저질렀습니다. 그는 비겁한 자였으며,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자였으며, 목사관의 슬픈 산물이었습니다 ♠ - 계속

 

(1986 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