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2. 25. 13:32 횃불/1990년

주의만찬

A. G. 클라아크

고린도전서 11:20에 나와 있는 주의 만찬이란 용어가 사도행전 2:42에서는 떡을 떼며로도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래 식사에 참여하는 경우에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2:46, 20:11, 27:35~36, 6:41 등과 비교). “은 문자적으로 덩어리를 가리키며, 유대인들은 이것을 쪼갤 때 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비로소 떡을 뗀다는 표현은 주님의 만찬을 가리키는 용어로 특별히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시행되는 미사”(mass)는 순전히 우상숭배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주의만찬의 제정(制定)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이 만찬의 제정에 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네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6~30(경륜적 순서), 마가복음 14:22~26(연대적 순서), 누가복음 22:14~23(덕육적 순서), 고린도전서 11:17~34(본질적 순서). 이 외에도 상관구절로 다음과 같이 세 군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 20:7, 고린도전서 10:16~17.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작별하시기 전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22:19, 고전 11:24~25).

 

주의만찬의 사례(事例)

주님의 만찬이 초기의 제자들 사이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은 사도행전 2:42, 20:7, 고린도전서 10:16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속사도시대(續使徒時代)의 기록들도 이 의식(儀式)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 의식이 보편적으로 준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떡을 떼는 일은 단체적으로, 정기적으로 계속 행해진 반면, 침례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처음으로 순종하는, 단 한 번의, 개별적 의식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교회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단순한 처음의 본을 떠나기 시작했고, 어떤 곳에서는 아주 공들여 개발해낸 의식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우상숭배적 관습과 연관되어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주의만찬의 참여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으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열심은 있으나 구원받은 여부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나 명백한 불신자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바른 교훈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처사입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1~42).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한 부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들을 더 제시할 수 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 5:14), “그리스도인”( 11:26), “형제들”( 11:29), “성도”( 1:7). 게다가 건전한 믿음과 경건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신자들만이 주님의 만찬에 환영을 받아야 합니다(고전 5:11, 요이 9-11, 3:10~l1, 살후 3:6,14 ). 만약 이와 같은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분명한 증거만 있다면 이 이상의 다른 제한들을 둘만한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 중에서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주님의 만찬에 참예할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청하는 것은 경건한 질서에 위배됩니다.

관계되는 각 성도의 마음에 참된 소원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의만찬의 의미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모임의 집회(고전 11:17-21)

떡을 떼는 일은 모임의 하급 집회, 곧 다른 집회들의 부가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집회요, 예배의 중심입니다. 사도행전 20:7은 이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으며, “함께 모인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이나 나오는 고린도전서 11~14장은 이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는 모임의 집회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드로아에서는 제자들이 저 유명한 선교사이자 복음전하는 자인 바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던 것이 아니라 떡을 떼려는특별한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주님이 분부하신대로 그분을 기념하려는 것이 그 성도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생각이었습니다. 소위 교파 교회들에 있어서는 설교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또는 공적 예배의 중심 인데 사실, 이것은 성경적인 의미로 볼 때 전혀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의 만찬은 교회, 곧 그 모든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하신 하늘의 머리와 하나라는 것, 또한 지체들 서로가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이것에서 파생되는 모든 축복들을 함께 나누고 교제한다는 의미들을 아름답게 표현합니다(고전 10:16~l7).

한 떡이 지니는 의미의 이중성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1) 주님 자신의 귀한 몸을 상징함(고전 11:24). (2) 주님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상징함(고전 10:16~17). 고린도전서 10:16~17에 잔과 떡이 뒤바뀐 순서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믿는 자들의 경험의 순서에 기인합니다. , 그들은 먼저 그 속죄의 피(“”)를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그 결과로 그 ”()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고린도전서 11장에 제시된 순서는 주님의 만찬을 실제로 기념하고 나누는 순서를 보여줍니다. (, 주님의 만찬을 실제로 기념하며 나누는 순서를 이라는 뜻임 -역주)

 

[2] 주님 자신을 기념함(고전 11:24~25)

이것을 행하는것은 회고(回顧)의 문제가 아니라 기념의 행위이며,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나를 기념하라”).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죽은 지 오래된 한 민족의 영웅이나 혹은 어떤 대의(大義)를 위해 몸바친 유명한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식에 비유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주일 첫째 날에, 곧 주님이 돌아가신 날이 아닌, 부활하신 날에 함께 모여,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성취하시고 무덤에서 승리의 부활을 하신 후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분을 기쁨으로 경축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오랫동안 떠나 계신 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 계시고 약속하신대로 함께 계시는 분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18:20).

 

[3] 주님의 사랑의 징표(고전 11:23)

요한복음 13:1도 참조하십시오. 섬기기(serve)주기(give)를 기뻐하는 사랑의 크기는 그 희생의 정도로 측정됩니다. 우리가 만찬에 참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기회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더 많은 자극을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새로이 자각하는 가운데 그분에게 더욱 헌신하도록 하십니다.

 

[4] 그분의 언약의 보증(고전 11:25, 22:20)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명백한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언약의 보증()은 매주의 안식일이었습니다( 31:13,17, 20:12,20). 새 언약의 보증()은 우리가 만찬 때에 참예하는 잔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언약을 비준하기 위해 흘리신 그분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9:15~22). (더 나은) 새 언약에 관하여 더 많은 가르침을 얻으려면 히브리서 7:22, 8:6~13, 10:16~18, 12:24, 13:20, 고린도후서 3:6~18을 참조하십시오.

 

[5] 주님의 잔치에 참여함(고전 11:26)

(“먹으며····마실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만찬을 잔치로 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이해력을 가지고 보기만 한다면 그 단어를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된 기쁨을 표현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15:22~24). 물론 이 화목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만 가능해졌습니다( 5:10~11). 이것을 화목제의 의미와 비교해 보십시오( 3, 7).

떡과 잔에는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참예해야 하며, 이것은 가져가라 먹으라-마시라-행하라, 네 가지의 명령에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만찬”(the Lord’s supper)은 더 넓은 개념을 나타내는 주의 상”(the Lord’s table)의 상징입니다(고전 10:21). 우리가 종종 취급하는 것과는 달리 이 두 용어는 상호 교환 가능한 용어가 아닙니다.

()”은 주님이 구속(救贖)받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마련하신 모든 은혜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이 상 앞에 항상 앉아 있습니다( 23:5 참조). 이에 반해 그들은 만찬상 앞에는 일주일에 한 번 앉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주의 상귀신의 상이 대조되어 있는데 후자는 귀신이 자기 추종자들을 위해 마련하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물론 이것에는 도덕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신과 연관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간증을 타협하거나 또는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잔치의 주인이자 연회장이시며( 2:9) 그 잔칫상은 우리에게 거저 베푸신 것이긴 하지만 그분이 막대한 값을 치르고 마련하신 것입니다. 은 또 풍성한 은혜와 너그러움을 시사합니다(삼하 9).

 

[6]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함(고전 11:26)

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는 보여주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물론 이 때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 아니라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실물교수법(實物敎授法)으로 전하는 것과 일반입니다(고전 15:3~4). 동일한 헬라 원어가 고린도전서 2:1 9:14에서도 사용 되었으며,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침례도 역시 사람들의 시간에 전해지는 복음이며, 그 강조점은 우리 주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이에 반해 주님의 만찬의 강조점은 우리 주님의 죽음에 있습니다. 이 두 규례의 합동 증거는 대단히 강력합니다.

 

[7] 그분의 다시 오심을 예언함(고전 11:26)

오실 때까지라는 바울의 말은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이며, 우리는 바로 이 영광스러운 극치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모든 참 신자들에게 너무나 귀중한 그 규례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준수되어야 합니다. - 다음 호에 계속

 

(1990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