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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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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6. 11:09 횃불/1993년

어린이 가정집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가시기 직전에 유언같은 당부를 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을 떠나는 부모가 마지막으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남기는 가장 귀중한 잊어서는 안될 유언의 말씀과도 같은 것이다. 아니, 그 보다도 수천 수만배 더 귀중한 거룩하신 주님의 말쯤이다.

언젠가 나는 멀리 미국 땅을 떠나 낯선 땅 한국에 선교사로 오신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주님의 말씀에 온 천하에 다니며····전파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감동을 받고 복음의 불모지 한국 땅까지 선교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가만히 앉아서 또는 마냥 기다림으로 영혼들에게 전도되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다녀야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전능하신 주님께서 영혼들을 찾아 다니셨거늘 하물며 무능한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야 전도가 되겠는가?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1:38,39).

교회가 양적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니며 전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기다리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참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아가는 것이지 양이 스스로 찾아 오기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잃어진 영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찾아 내려가야만 한다. 저들 스스로는 찾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영적 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그들을 만날 수 있는가? 멀리 바다 건너 산 넘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찾아갈 것인가? 그것도 좋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현주소에서부터 증인의 삶을 펼쳐 나가야 한다. 삶으로, 입술로!

어떤이들은 삶으로 증거한다며 입술로는 말하지 않는 편협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함으로 복음의 진보를 더디게 한다. 또한 어떤이들은 삶의 간증이 따르지 않는 입술만 무성한 능력없는 전도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생활과 함께하는 전도! 이것은 참 증인의 모습인 것이다. 일년에 몇 차례 전도집회를 하는 것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주소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그리고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펼칠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그들의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는 불신 부모들을 알아야 한다. 불신 부모들 중에는 그릇 행하는 교인들로 인한 상처와 실망으로 자기의 자녀들까지도 교회에 보내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많은 종교인들의 자녀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에 찬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영적인 무관심으로 교회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황금만능 물질주의 세상에서는 한 시간이라도 더 배우게 하려는 강한 출세 경향으로 교회가 조금만 멀어도 꺼려하는 것이 지당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잃어진 생명들을 일깨우고 구원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려는 열정과 잃어진 영혼들의 비참한 현실과 장래를 볼 줄 아는 영적 시야를 가진 자들이 필요하다. 누가 이런 자인가? 누가 이런 위경을 간파하고 깨어 전파해야 하겠는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크리스챤! 바로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닌가?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다. 이제 꺼져가는 심지를 돋우고 생명의 빛을 높이 들어 온 방안에 그리고 온 동네에 비취게 해야만 한다. 어쩌면 이 해가 주님을 위해, 영혼들을 위해 수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린이 전도에 소명을 느끼며 주일학교를 돌아보던 초기에, 나의 주변 어느 가정에는 많은 아이들이 드나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 태반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집주인되는 형제님께 한 주에 한번씩 두 시간만 집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우리는 아이들이 이 집을 통하여 전도 받는 이 일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아이들을 초청하였다. 적지 않은 수의 아이들이 모였다. 시청각 자료들을 이용하여 노래도 가르치고 말씀도 전해주고 재미있는 게임도 하며 준비된 아이들을 구원받도록 상담도 해 주었다. 얼마 후 소문이 좋아서 형제님의 집은 아이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우리는 한 주에 두 번 나눠 모임으로 더 많은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중에 여러 아이들이 교회에 더해졌다.

그 후 내가 북쪽의 어느 사역지에서 어린이 전도와 교사들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 한 주에 한 시간씩 집을 개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님은 열 가정의 문을 열어 주셔서 매주 약 300명 가량의 어린이들을 만나 전도할 기회를 주셨다. 나는 이와 같은 전도가 복음주의적인 모임들에서 활성화된다면 얼마나 많은 어린이 전도가 각처에서 활발하게 진척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만일 한 교회에서 열명의 교사가 한 주에 한번씩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전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한 주에 한 시간씩 낼 수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우리 주변에는 낮 동안에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특히 기혼 자매님들 중에 더 많다. 그러나 문제는 깨어있는 교회, 깨어있는 성도가 적은 것이다. 주님은 가까운 마을로 다니며 전도하셨고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우리를 두고 계신지를 잊고 허송세월을 보낼 때가 많다. 지금은 깰 때다. 정신을 차리고 사지로 끌려가는 영혼들을 건져내야만 한다.

어떤이들은 교회에서 하는 어린이 집회와 가정에서 하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앞서 불신 부모들의 무관심과 생각이 그들의 자녀들을 교회로 보내기를 꺼려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 덕망있고 칭찬듣는 선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이웃의 아이들을 위하여 유익한 시간을 가져준다고 할 때 그들의 저항감은 사라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이웃집 아주머니 집에 잠시 놀러 가는 재미 속에서 복음을 접하게 되고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그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변화된 생활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고 그들까지도 마음의 문을 열고 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이들만의 전도가 아니다. 그들의 부모들까지도 전도하게 되어지고 이웃을 복음화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효과적인 전도 방법인 것이다.

이런 어린이 가정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와, 집을 개방할 집주인, 그리고 협조할 동역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반을 시작하기 전에 교회의 장로들 또는 경험자들과 의논함으로 협조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함께 일할 동역자를 만나 기도하며 집회 시간을 정하고, 초청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초청은 그 집의 자녀와 친구들부터 시작하며 이웃집을 방문하거나 전화 또는 초대장을 줌으로 또는 중생한 아이들의 친구들을 인도해 오도록 격려함으로 자연스럽게 모여지게 해야 한다.

집회는 복음적인 노래, 기도, 성구 암송, 성경 이야기, 복습 퀴즈, 상담 등을 포함하여 한 시간 정도로 하고 흥미와 관심을 더하기 위해 각종 시청각 자료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기독서점이나 어린이 전도협회에서 이런 자료들은 쉽게 구입할 수 있음) 때때로 성경적인 비디오나 영화 슬라이드 기타 자료들을 사용하는 것도 좋다.

교사는 지나치게 숫자를 늘리려고 억지로 해서는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중생한 아이들을 통하여 차츰 인도되게 하거나 호감을 갖고 있는 이웃의 자녀들부터 초청해 가는 편을 택하는 것이 좋다. 교사는 가르칠 자료들을 미리 순서대로 준비해 두어야 하며, 가능한한 시각화된 자료들을 사용함이 학습에 효과적이며 흥미를 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집회 시간 전에 도착하여 함께 수고할 집주인이나 보조자와 더불어 기도로 준비하고 시간이 늦지 않게 끝냄으로 다음에도 부담없이 모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

집회는 넘치는 힘을 적절히 발산하도록 아이들이 도착하자마자 할 흥미로운 일감을 주며, 율동을 겸한 노래를 부른다. 모이는 장소는 편안하고 깨끗하며 적절한 조명이 되게 하고, 출석과 학습을 격려하기 위해 칭찬과 시상을 아끼지 말며, 어린이들은 질서를 유지하는 교사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아 친절하면서도 엄격한 훈육을 함이 좋다. 각 집회는 기도로 푹 젖어지게 하며 너무 철저히 하려다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집회가 끝나면 더 나은 집회를 위하여 평가를 하되 실망하지 말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서로 격려함이 좋다. 사단은 우리의 부족을 드러내어 실망케 함으로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바짝 붙어 다닌다는 것을 잊지 말라.

집회 속에 선교사의 이야기나 서신들을 들려 줌으로 우리의 듣는 복음은 참으로 헌신할 가치가 충분함을 느끼도록 하며, 선교의 일에 기도로, 몸으로 헌신하도록 참여 프로그램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다. 지혜로운 교사들은 연중 몇번씩 파티나 야외활동으로 반을 더욱 결속시키며 친화력 있게 이끌기도 한다. 반의 육성을 위하여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위하여 정규적으로 기도하며, 적당한 시기가 됐을 때 부모들을 찾아 뵙고 교제함으로 자신과 가정집회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두는 것이 좋다. 교회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문제는 서두르지 말고 순차적으로 부모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가지며 결석한 아이들을 위하여는 학교로 엽서를 띄우거나 다른 친구들을 통하여 만날 장소를 알려주고 밖에서 만나주는 사랑과 성의를 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집주인은 구원받은 자로서 영혼들이 자기 집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라야 한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이들이 구원받는 것을 위하여는 집안이 좀 더럽혀지거나 가구가 닳아지는 것도 기꺼이 용인하는 자라야 한다. 사실 자기 집을 개방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장소로 쓰는 그 집은 선교 센타와 다를 바가 없다(국내 선교이긴 하지만····). 집주인은 이웃의 아이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풂으로 더욱 존경과 덕망을 얻게 되고 주님의 선한 간증을 드러내는 자이다.

가정 성경반이 모일 장소는 명랑한 분위기의 방일수록 좋다. 적당한 온도와 환기,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나 방석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들을 앞자리부터 앉게 함으로 진행 중에 늦게 온 아이로 인한 방해가 없게 하며 방이 비좁을 것 같으면 미리 가구 배치를 변경하는 헌신된 준비도 잘 하는 것이다. 교사와 집주인은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기도와 준비를 마치고, 아이들이 도착할 때는 환영하는 느낌을 받도록 친절한 인사와 아이들의 외투나 가방을 걸어주는 등의 환대를 표시함이 좋다. 집주인이나 보조자는 교사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출석 또는 게임의 점수를 기록하거나 시청각 자료들을 붙들어 주는 등 협조자로서 동역함으로 차츰 역량있는 교사로 성장하게 된다. 교사가 준비된 아이들을 상담할 때는 나머지 아이들과 조용하게 시간을 가져줄 수도 있고, 집회 중에는 기도하면서 아이들의 질서를 위해 노력함으로 교사의 진행을 도울 수 있다. 또한 교사의 준비한 것, 진행하는 것 또 아이들의 반응 등을 관찰함으로 차츰 교사의 자질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복음을 위하여 집을 개방하는 데는 약간의 헌신과 봉사가 따르지만 이로 인하여 얻는 축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통로로 자기 집이 선택되어 쓰이고 있다는 기쁨을 갖게 된다. 그는 주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는 새싹들을 인하여 희망과 보람을 갖게 된다. 그의 친절과 봉사는 많은 아이들의 사랑의 교제를 얻는 기쁨을 갖게 해 주며, 그리스도인부모를 갖지 못한 불쌍한 아이들의 영적 부모와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는 수시로 이웃의 부모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갖게 되며 중생한 아이들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그들의 부모들까지 인도되는 기쁨을 얻게 된다. 또한 그의 한 주간은 이웃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므로 경건한 영적 축복을 얻게 되고, 차츰 교회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상급이나 기쁨을 초월해서 전해야만 할 복음의 빚진 자다. 내 마음이 원하든 원치 않든 주님의 소원을 위하여 드린 몸이 아닌가? 이젠 정신을 차리고 온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하여 복음에 동참해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와 말씀하셨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20:23).

우리의 사명은 실로 큰 것이다. 누가 추수 때에 잠을 자겠는가?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된 어린 영혼들을 보라. 주를 위하여, 저들을 위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10:15).

 

(1993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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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