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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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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6. 11:12 횃불/1993년

요한계시록 강해(4)

2 12~29

-어거스트 반린 -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2:12,13)

여기서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와 결혼했지만( 7:4) 이제 세상과 결혼한 상태인 교회(the Church)를 보게 되는데 버가모”(비록 결혼했지만)란 말이 바로 그런 뜻을 내포합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혼관계였지만 이제는 사단과 교회와의 결혼관계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 피하고 있으며 사단의 위는 이 세상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 임금입니다.

살다”(dwell)는 말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로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이스라엘과 모압의 연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불법적인 연합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가리켜 행음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14).

또한 버가모 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해로운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15).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셔야 할 곳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다니!

시대경륜적으로 이 버가모 교회는 이교도로부터 박해를 받던-서머나 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초기시대에 이은 시대, 즉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대중화시킴으로써 시작된 시대를 보여줍니다. 이 때에 기독교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로 타락화되어 갔으며,그 제도 하에서 사단은 교회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조차 그분의 이름을 굳게 붙들고 믿음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때 안디바가 순교를 당했으며 그의 이름이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인 점으로 보아 그와같이 믿음을 지킨 사람은 극소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종종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그릇된 표준에 굳게 맞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부인하기보다 그분을 위하여 죽음을 당했는지요!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2:14).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임무를 띠었던 발람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건만 그는 모압 여인들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연혼을 꾀함으로써, 그리고 그들로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인함으로써 그들에게 저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25:1,2, 31:16). 모압과의 동맹은 그들의 신에 대한 숭배와 봉사를 초래 했습니다.

모름지기 신자가 세상과 연합할 때(신앙, 사업, 결혼 등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그것은 얼마나 종종 하나님과 무관한 길을 초래하는지요!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우상이 마음의 보좌에 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탐심과 같은 것도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성경은 발람의 길, 즉 그의 잘못된 행실과 교훈을 경계하라고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악한 목적 배후에는 돈에 대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했습니다. 돈에 대한 사모심은 하나님의 일에서조차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처럼 스스로 빈곤에 처하면서 다른 이들을 부요케 하기를 힘쓰는 대신 그들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의 질을 떨어뜨리는지요! 우리는 우리의 복스런 주님처럼 우리의 가난을 통해 다른 이들이 부요케 되도록 가난하게 되어야 합니다. 발람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했습니다. 기존 교회의 연약함의 적지 않은 부분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대적들과의 이러한 영적인 간음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15,16).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 나타난 니골라당의 행위는 이제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성장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행위를 미워한데 비해 여기 버가모 교회가 그들의 교훈을 미워했다는 언급은 일절 없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단순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성직 제도-성직자가 일반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제도-개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제도를 증오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독교계에 아무 저항 없이 널리 용인되고 받들어지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신자는 사역자”(minister)이며, 그러한 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성도들, 곧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들 가운데는 경건하고 지혜로운 인도자들이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형태로든 지위를 취하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성직자를 모든 신자들 위에, 혹은 그들과 구별된 특별한 위치에 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종종 성직자들은 양떼를 먹이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털을 깎아 그것으로 따뜻한 옷을 해 입는 최악의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우리 주님은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임하여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네게임하여 그들과싸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심판의 위협을 받는 자들은 성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열심으로, 그리고 겸손히 주님을 섬기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스승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게 우리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the Church)가 세상과 동맹하고, 교회가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거처를 발견하고, 성직자가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등 이 모든 거룩치 못한 면들이 영과 혼을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날선 검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추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각 서신마다 이기는 자에 대한 보상이 패배를 맛보아야 할 악의 세력과 직접적으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그네로 행하던, 그리고 우리의 나그네로서의 특성을 보여주는 광야여정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만나는 이 곳에서의 우리의 양식이며, 우상에게 바쳐진 것을 먹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신자에게 생명의 양식(만나)입니다. 우리의 나그네 길을 걸으면서 이곳에서 그분을 즐기는 동안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 위에 좌정해 해신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우리가 즐거워할 분이십니다. 만일 어떤 신자가 이곳에서 세상에 속한 것을 먹고 산다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는 그곳에서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흰 돌은 후보의 이름이 돌에 새겨진, 당시에 사용되던 추첨표로 생각됩니다. 우리의 복스런 주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의 경배와 섬김의 대상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표를 던집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은 그분이지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그분이 이곳에서 우리의 지지를 받을진대 우리는 저 위에서 그분의 지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이름은 그 흰 돌 위에 있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그러하시듯이 우리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나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보여주는데 비해 흰돌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평가를 보여줍니다. 흰돌은 매우 개인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받은 자 외에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의 수많은 소위 신자들 가운데 우리의 복스런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 개개인을 아시며 그분의 온전한 평가기준으로 각인에게 보상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요! 혹 사람들은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찬양할지니, 우리의 복스런 주님은 우리의 가치를 알아 주십니다. 모쪼록 우리 모두 정녕 승리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2:18).

교회의 역사상 최악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두아디라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가장 긴 서신들이 보내졌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 우리는 배도한 로마 카톨릭교를 보게 되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우리는 배도한 개신교를 보게 됩니다. 일이 잘못돼 가고 있을 때는 의당 더 많은 충고와 더 많은 격려와 또한 더 많은 경고가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 로마 치하-기독교 초기-의 핍박에 이어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대중화시켰으며, 이에 교회가 이방인 취급을 받는 대신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게 되었던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고난을 당하는 대신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종교적인 로마가 일어나 정치적 인 로마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 충성된 자들은 그들의 선조가 이방 로마에게서 느꼈던 동일한 압제의 손길을 교권 로마에게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이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본 서신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 서신의 메시지는, 그들이 처한 가련한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며, 다음에 나오는 사데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 나타나듯이 로마가 종교개혁의 물결에 밀려 무너지기까지 어떻게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권세를 휘둘렀는지를 보여주는, 의미깊은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주제와 부합되게도 주님은 여기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마가 즐겨 부르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로 소개합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같습니다. 그분은 이제 처녀의 가슴에 안긴 유약하고 비루한 예수님이 아니며, 로마가 즐겨 표현하는 십자가에 달린 고난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는 그분 대신 여자를 높인 부패한 조직인바, 그분의 눈은 그 우상숭배적인 의식과 진리의 왜곡을 감찰하고 판단합니다. 풀무불로 가열된 주석같이 빛나는 그분의 발은 언제든지 이 기독교의 모방품에 무서운 심판을 쏟아 부을 태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살피시며, 동정의 눈길로가 아니라 철저한 심판과 절대적인 거룩함을 말해주는 눈길로 이 황폐한 부패상을 바라보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그들 가운데는 많은 활동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 중에는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이 있으며 그분은 그들의 사랑과 인내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로마의 통치기반이 흔들리던 중세 암흑시대에 얼마나 많은 그분의 백성들이 무서운 암흑 상태와 당시를 휩쓸던 영적인 우상숭배 아래 고통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그분께 충성했는지를 아십니다. 한편 로마 조직은 전반적으로 영적인 부패와 그로 인한 도덕적인 부패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20)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를 들여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가증스런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이 거짓된 교회-스스로 어머니 교회라 칭하는 악한 여자, 즉 우리가 후에 자주 접하게 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17:5)-는 그녀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도덕적, 영적 간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바입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딤전 2:12).

두아디라 교회는, 여자가 그 전부가 부풀 때까지 가루(하나님의 백성의 음식)에 누룩을 섞고 있는 모습이 기록된 마태복음 13장의 네번째 비유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네번째 비유와 계시록 2장의 네번째 교회는 동일한 시대와 동일한 의미, 즉 거짓된 교리와 거짓된 실행들이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 진술된 하나님의 진리 속에 침투해 들어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 -이악한 누룩-은 전부가 부풀 때까지 작용합니다.

성경은, 종국에는 전 교계가 거짓되고 악한 가르침에 휘말려 마지막 시대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이르러는 주님께서 그 입에서 토해 내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가 영광으로 끌어올려진 후에 그러한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20절은 로마 교회를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요! 로마 교회는 스스로 어머니 교회라 부르며 자긍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녀를 가리켜 로마가 주장하듯이 참 교회라 부르지 않고 음녀들의 어미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순전한 신부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과 행음하는 파산한 매춘부인 것입니다( 18:3).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잘 아는 모든 성경학도들은,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그 신조와 규례의 대부분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성경에 직접적으로 반대되거나 성경을 왜곡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하나심의 거룩한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 아래로 인도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인도된 것으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지요! 우리 모두 우리의 보배로운 진리의 유산을 항상 소중히 간직할 수 있기를!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을을 살피는 자인들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1~23).

주님은 로마 카톨릭에게 그 가증한 죄를 회개할 시간을 주었으나 그녀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기 동안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종교개혁의 빛을 통해서 그 두려운 암흑과 압제를 풀어 헤치실 때까지, 그녀의 교회의 신앙과 장래를 절대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전제(專制)와 공포에서 해방되었으나 그녀 자신은 조금도 변화됨 없이 그대로 지속해 나갔습니다. 혹 변화가 있었다면, 그녀의 교리가 진리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으며, 교황은 그 자리가 바뀜에 따라, 앞서 주장된 교리들에 교황의 무오성, 혹은 보다 최근의 마리아 승천설 등과 같은 가증스런 교리들을 추가해 왔습니다. 로마는 오만하게도 그녀의 비성경적인 주장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철회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로마는 번성할 때는 사자요, 현 상태일 때는 여우요, 어려울 때는 양이다라고 적절하게 표현된바 있듯이, 그녀는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 처세술만을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가죽은 바뀌었으나 그 본성은 항상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오랫동안 지체되었긴 하지만 로마는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서 17,18장은 이 다가오는 운명의 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환난 동안 이스라엘뿐 아니라 배도한 기독교계 역시 죄를 증오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로마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1). 그분은 유럽 연맹체의 장래 통치자들을 사용하여 로마를 황폐케 하고 그녀의 고기를 먹고 그녀를 불로 사르게 하실 것입니다( 17:16).

그녀의 자녀들 역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계시록 17:5은 로마 카톨릭이 음녀들의 어미라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녀는 어머니 교회이지만 그녀의 자녀는 개신교의 배도한 교회들입니다. 오늘날조차 우리는 많은 소위 개신교 교회들(로마 카톨릭에 대항하기를 중단한지 오래 된)이 로마를 향해 되돌아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그 배도자들을 그녀의 우리로 끌어 모으기 위해서 때로는 은밀히, 때로는 공공연히 그들의 마음을 떠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성경을 읽고 이 어머니가 참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악하게 왜곡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까요? 하나의 조직으로서 로마는 말할 수 없이 사악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거룩하고 정숙해 보이는 그 외양아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자들에게 그 정체의 대부분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24,25).

로마 교회 안에는, 그 사악함과 거짓됨을 알지 못하는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자들은 로마의 거짓된 교리를 알지 못하며,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10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깊은 것을 자신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사단의 깊은 것도 있습니다.

만일 신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상고함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것 안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결코 사단의 깊은 것에 의해 속임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을 즐겁게 하고, 그로 하여금 성경을 보다 깊이 상고하도록 자극을 주는, 그 밑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것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상고하지 않고 로마의 속임수를 아무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쉬 속는 영혼들의 눈을 더욱 어둡게 하는 사단의 깊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거짓됨 속에는 실로 악()의 깊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도록 그 눈이 떠진 사람들을 제외한 온 세상을 속이는 그야말로 속임수의 대가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26~29)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라는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가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줄곧 행사해 온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그녀에게서 빼앗아져서 그녀가 이 땅에서 모욕하고 핍박하고 그토록 광포하게 다스린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질서가 뒤바뀔 것입니다. 압제자들은 피압박민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 충성되기 위하여 극심한 고난을 받은 가련한 신자는 그분과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철장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19:15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실 때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 동일한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그 회계의 날에 자신의 왕위를 그들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로마가 오랜 세월 동안 다스려왔으나 그 후로는 전에 고난받은 그분의 성도들이 그분과 더불어 세세토록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언젠가 공의가 죄를 대신할 것이라는 기록을 대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몹시 뛰게 합니다. 우리의 복스런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얼마나 기다려오셨겠습니까!

, 그 무한한 자비로 인해 로마의 거짓됨 아래에서가 아니라 진리의 선명한 빛 아래에서 양육을 받도록 우리에게 특권을 베푸신 그분께 얼마나 찬양을 드려야 하는지요! 아울러 우리는 로마에 속한 가련한 영혼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와 주로 볼 수 있도록 그 눈이 떠 지도록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지요!

신자에게는 새벽별이란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복스런 칭호 중 하나로서 우리를 영광으로 데려가고자 오실 그분의 모습을 묘사해줍니다. 영적인 어두움이 완전히 세상을 덮을 때 갑작스레 그분께서 오실 것이며, 우리는 공중에서 그분을 뵈올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에게 큰 격려가 되어줍니다.

아마도 이 시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모쪼록 우리 모두 그분만을 바라보기를!

 

(1993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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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