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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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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2. 16:12 횃불/1993년

요한계시록 강해(9)

4

어거스트 반린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4:1)

많은 이들은 이 놀라운 계시록의 첫장의 19절에서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즉 그가 방금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래될 일에 대해서 기록하라는 명을 받은 점을 주목해 왔습니다. 1장은 요한에게 과거를 밝혀 주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기독교 신앙의 중대한 사실들과,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2,3장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 개괄되어 있는 축복된 상태로 시작해서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에 개괄되어있는, 지상에서의 교회의 마지막 때를 특징지우는 가공할 배도로 마감하는, 이 은혜 시대 동안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를 매우 흥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진술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이제 있는것의 기간에 이어 장래될 일이 펼쳐질 차례이며, 4장 첫 구절에서 요한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그에게 곧 보이겠다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장은, 요한이 하늘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을 당시에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여전히 미래의 일인, 그분의 복스런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들의 놀라운 전개를 시작하는 것임이 아주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시록 4:1은 그분의 백성을 하늘로, 즉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기 위해 올라가신 그 영광으로 불러 올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사건을 그림처럼 제시해 줍니다. 요한과 함께 이제 우리는, 아마 머지 않아 현실로 나타날 일들을 기대감 속에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하늘로 올리워 가기 전에 한 문이 하늘에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때 한 문이 열려진 것을 본 것이 아니라-만일 그렇다면 그 문은 그때 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이미 열린 상태에 있는 문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매우 소중한 진리인바, 하늘이 문을 활짝 연 채.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믿음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0:19). 사실 그것은 항상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시편 115:6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은 땅이라고, 즉 땅이 그들의 거처였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땅에서 살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가인이 창세기 4:14에서 말했듯이 말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그러나 비할데 없는 은혜로 인해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비록 인간은 땅 위에 있을 권리를 잃었지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하늘에, 즉 이 놀라운 지상의 창조보다 훨씬 아름답고 놀라운 장소에 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곳에서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취함을 입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의 신자들일진대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을진대 우리는 영원한 저주와 함께 지옥에 던지워질 것입니다. , 우리의 복스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우리를 사랑하사 위해서 자신을 주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셨으니 얼마나 그분을 찬양해야 할지! 우리 주님께서 그 옆의 죽어가는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문은 지금도 신자들을 위해 활짝 열린 채 있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믿음으로 성소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실 때,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때 그 때 우리는 실제로 그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그곳으로 올리워 가는 것은 곧 임할 것으로 우리가 고대하는 그 날에 일어날 성도들의 휴거를 예표해 줍니다.

요한은 위를 바라보고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항상 위를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이 특별한 경우에 요한이 보인 행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정규적인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지 말라는 명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위를 둘러보며 얼마나 적게 위를 바라보는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인내를 가지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오심의 징조를 바라보라는 명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변화시켜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게 하실 구주를 바라보라는 명을 받고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 처음에는 음성만 들었으며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인데, 이는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분을 그 계신 그대로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고 날마다 그분을 찾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믿음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좇습니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서, 전에는 가시관을 쓴 채 고난의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지금은 영광의 면류관을 쓰시고 영광의 보좌에 앉아계신 그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그분께서 그곳에 계신 것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그분께 충성해야 했다는 격려를 받게 됩니다. 필요하다면 그분을 위해 고난과 수욕을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들은 음성은 1장에서 묘사된, 주님 생전에 요한이 그분과 동행하며 듣던 부드러운 인간적인 음성이 아니라 많은 물의 격랑이는 소리와도 같은 음성이었습니다(1:15,17). 예수님은 이제 우주의 보좌 위에서 자신의 권세와 위엄과 위대함의 자리를 취하실 것이며, 그분의 큰 음성은 그 최고의 영광의 위엄에 잘어울립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최대의 승리감으로 행하는 첫번째 일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나라와 통치를 스스로 취하실 즈음에 행하실 일인바, 그분의 백성을 하늘로 불러 올리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일은 그분의 신부를 본향으로 부르시는 일일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2’10,13).

그러므로, 계시록 4:1은 휴거-예수께서 그분의 백성을 이 죄악된 세상에서 낚아채 가시는 일-의 축도(縮圖)입니다. 고린도전서 15:52은 본문에 나타난대로 그분의 오심이 나팔 소리와 더불어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을 일으키고 살아있는 성도들을 변화시켜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로써 주님과 영원히 거하게 할, 온 세상에 들리는 소집 나팔이 될 것입니다(살전 4:13~18). 이 데살로니가전서 구절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사건을 상세히 보여줍니다. 그 때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그 나팔 소리를 들을 것이며 모두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이리로 올라 오라는 외침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여기서 본 것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2:7). 당신은 이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주이십니까? 천국이 당신의 목적지입니까?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4:2,3)

출애굽기 28장에 기록된, 대제사장의 흉패의 보석에 새겨진 이름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데 거기서 첫번째 보석은 보석이고 마지막 보석은 벽옥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두 보석-첫번째 보석과 마지막 보석-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애굽기에서 그 보석들은 하나님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성도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해 주는 반면에 여기서는 그들의 구주의 영광을 묘사해 줍니다. 그분과 그분의 성도들은 사실 이와같이 연합되어 있는바, 우리도 역시 흠없는 광채로 영원히 빛날 것이며, 우리도 역시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8장의 첫번째 보석과 마지막 보석이 여기서는 위치가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 안에서 마지막의 위치를 차지하신 분께서 이제 영원히 첫위치에 해심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벽옥의 흰색과 홍보석의 붉은 색은 무한한 순결이 갈보리의 붉은피의 흘림을 통해서 무한한 사랑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 결과 무지개에서 보듯이 영원한 생명과 결실의 선녹색(emerald green)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녹색 무지개는 심판의 폭풍이 지나갔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갈보리의 어두운 폭풍을 통해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여기 이 땅에서 우리는 항상 부분적으로만 무지개를 보는데, 이는 우리의 시야가 땅에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보좌를 두르는 완전한 무지개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그 절반만이 나타나 있으나 거기서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충만히 계시된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의 모든 부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4:4).

중앙 보좌 주위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동일한 24개의 보좌들이 둘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5:8~10을 통해서 이 장로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데 그들은 땅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구속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본문에서 하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분명히 그들이 영광으로 휴거되었음을,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서 오신 것이 분명함을 암시해 줍니다. 이 복스런 진리가 본장의 1절에 암시되어 있는데 거기서 요한은 이리로 올라 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죽은 자든 살아있는 자든 모든 신자들은 예수께서 오실 때 그러한 외침을 듣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다음 세가지 두드러진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1. 이 성도들은 모두 앉아 있다.

2.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있다.

3. 그들은 금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것은 첫째로 이 성도들이, 예표적인 환상 가운데 요한에게 보여진 대로, 그리스도의 강림시에 끌어올려졌음을 입증하는데, 이는 많은 성경 구절들이 상급의 수여(항상 면류관의 수여로 묘사되어 있음)는 성도들이 이 땅을 떠난 이후에 행해질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갈아 주리라”( 22:12),

둘째로 이것은 이들이 영광을 얻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있으며 옷을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희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무한한 가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들은 보좌에 앉아 있는데 이는 고난의 시간이 끝났고 그분과 함께 다스릴 시간이 왔음을 입증합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4:5,6)

보좌 주위에는 무지개가 있었으며(3), 무지개는 항상 폭풍이 끝날 즈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는 번개와 음성”(이 폭풍을 일반적인 폭풍과 구별시키는 요소로 그것이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입증한다)과 뇌성으로 특징지워지는 분명히 다른 폭풍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막 가라앉으려 하는 그 폭풍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구속받은 자들인 우리가 하늘 본향으로 사라질 때 우리를 위한 폭풍은 영원히 지나가 버리며 우리는 하늘에서 영원한 평안과 안전을 누리게 됩니다.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 이 땅의 시련과 슬픔과 증오를 상기시키는 한편, 그 영원한 안식의 항구에서 누리는 우리의 기쁨을 한결 더해 줍니다.

그러나, 폭풍이 우리를 위해서 멈출 때 이 세상이 경험할 가장 두려운 폭풍이 이 가련한 땅에 불어 닥칠 것입니다. 그 때 창세 이래로 없었던 큰 환난의 시간이 임할 것입니다. 저 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전에 우리에 게 그토록 사나웠던 바다가 이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로 나타나는데 이는 삶의 두려운 파도가 영원히 잠잠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땅에서는 진노의 폭풍이 세상을 휩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게도, 그 두려움은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에 의해 통제되고 지휘되며, 번개와 뇌성이 섞인 음성은 아마도, 어떻게 그 때에도 그러한 공포상황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 게로 이끌 것인지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폭풍은 그 중앙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있는데 이는 회개치 않은 세상을 심판할, 회개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4:7,8)

이 네 생물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상징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계시된 하나님을 묘사해 주는 듯 합니다. 모든 성경 학도들은 이곳과 에스겔 1:10에 기록되어 있는 사자, 송아지 혹은 소, 사람, 독수리 등 네 짐승의 형상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복음서도 이 네 마리의 생물이 지니는 네 특성으로 우리 주님을 묘사해주는데, 마태복음은 사자(), 마가복음은 소(하나님의 충성된 종), 누가복음은 사람(인자)으로, 그리고 요한복음은 독수리(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상적인 특징을 지닌 그리스도)로 각각 그분을 제시해 줍니다.

이 네 생물은 앞뒤와 안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의 영원한 위대하심을 잘 드러내 줍니다. 뒤에 있는 눈은 그분께서 지나간 모든 일을 아신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그분은 모든 과거사를 발생하기 전부터 아셨습니다. 안에 있는 눈은 그분의 현재적인 전지하심을 말해 주는데 아무것도 그분의 눈에서 숨기우지 못합니다. 그분은 마음의 동기는 물론 그 속의 깊은 생각도 아십니다. 앞에 있는 눈은 모든 미래 역시 그분께 알려져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인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는 것은 얼마나 복스런 일인지요? 그분은 과거에 있어서의 그분의 능력과 방법의 경이로움을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이들의 눈에 가리워진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되 다른 곳에서는 물론 이 책에서 미래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보게 되며,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4:9~l 1)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대목들이 보여주듯이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제 삼자(the Other)로 암시된 분 사이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5:6~7을 통해서 혹자는 어린양-주 예수 그리스도-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서 책을 받는 것으로 보아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가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 장의 마지막 부분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 아들임을 암시해 주는데, 왜냐하면 그분께 만물의 창조가 귀속되기 때문이며, 골로새서 1:16이 만물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은 신성의 무한성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분임을 알 뿐입니다.

여기서 네 생물과 장로들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그분께 모든 찬양을 돌리는데 비해 다음 장에서는 그러한 찬양이 구속주로서 그분께 돌려집니다. 첫 창조와 둘째 창조, 옛 창조와 새 창조가 모두 그분의 작품입니다. 그분은 두 경우 모두에 다 이루니라고 말씀하신 다음 그분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분의 기쁨을 위해서 지은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가 지금 그분과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기쁨이요, 영원토록 우리의 소유가 될 기쁨을 위해서! 그분의 임재는 기쁨의 충만입니다. 그분의 우편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아멘!

 

(1993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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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