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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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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 09:51 횃불/1993년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 배

알프레드 깁스

 

요한복음 4 20-24절에 기록된, 예배에 관한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은 모든 신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중생에 대한 가르침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진실한 바리새인에게 주어진데 비해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길 곁 우물가의 타락한 여인과 더불어 논의되었다는 점은 다소 의아스럽게 보입니다. 만일 우리라면 이 두 대상을 바꿔 놓겠습니다만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무한한 지혜 속에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그분께서는 이 놀라운 진리를 주님을 필요로 하는 가련한 죄인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이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고난과 후에 얻을 영광을 염두에 두신 채, 구약성경에 계시된 바 있었던 예배에 관한 적어도 일곱 가지 변화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1) 예배 장소에 관하여(20)

 

이 여인은, 비록 순결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종교 문제에 관해 토론하기를 꺼리지 않고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다시 말해서 예배는 더 이상 지상의 어느 특정한 장소나 인간에 의해 지상에 세워진 특정한 건물 -그것이 아무리 역사적인 가치가 크고, 아무리 건축 구조가 아름답고,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에 제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광야의 성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고, 그곳에서의 예배가 영광의 구름의 강림을 통한 하나님의 승인표시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이는 그것들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을 기다리는 상징그림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40:34, 왕상 8:10,11, 9:22-28). 성막이 이스라엘을 위한 예배 장소로써 그 목적을 완수한 후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인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 의해 대치되었습니다( 12:21).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문자적으로, “장막을 쳤을”)때 그분은 장막의 상징적 의미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1:14 참조). 아울러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의 상징적 의미 또한 성취하셨습니다. 하루는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그분께 도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답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에 유대인들은 당시에 예루살렘에 서 있던 헤롯 성전을 생각하고는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라고 야유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짤막한 해설을 주목해 봅시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18-21).

그 후 그분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비평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일과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봉사를 한 일을 인용하신 후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1-8).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인정하신 대체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관련하여 성전이 상징하는 모든 진리는 그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제사장직이 상징하는 모든 진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받으실 만한 제물뿐 아니라 인정된 제물 수여자가 되신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을 마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휘장 한 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습니다. 이 행위를 통해서 그분께서는 성전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이 그 목적을 완수했으며,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폐지되었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7-10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져 있습니다. 이 부분을 끈기를 가지고, 주의 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소위 성스런 예배 처소’, ‘성례를 주관하는 집례 성직자’, 인위적 의식과 규정된 예배 순서’, ‘엄숙한 신앙 고백 행위등으로 기독교계에서 통용되는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신약 시대에는 예배를 위한, 위와 같은 특정한 장소나 절차가 일절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예배는 더 이상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靈的)인 상태의 문제입니다. 신자(信者)는 한 국가의 대도시의 중심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보르네오섬의 밀림 가운데서도 동일한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부엌에, 곳간에, 침실에, 번잡한 장터에, 혹은 사람이 모인 광장에 있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어디서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영적인 상태 가운데 있는 한 말입니다. 그는 예배를 중개할 어떤 인간 중보자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위대하신 대제사장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께 직접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매우 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새롭고 산 길이요····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참 마음과 온건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 19-22).

하나님께서는 전에 성막과 성전 가운데 거하셨듯이 더 이상 인간이 지은 건물 가운데 거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언덕 위의 연설에서 이 사실을 명백히 밝힌 바 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17:24).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그분의 백성들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어디든지 당신의 모인 성도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18:20). 히브리서 3 6절에는 그리스도는 그의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 그의 집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일 개인의 그리스도인이든, 두 세명의 작은 모임이든, 아니면 큰 무리의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든 신자는 지상의 어떤 곳에서든 모여서 성부와 성자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 장소는 그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신 곳, 하늘입니다. 그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예배책 -그분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의 그분의 중보 사역- 을 굳게 의지하고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참된 예배자들은 아버지를 예배할 것입니다(23).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예배하였는데 시내 산에서 나타난 그분의 거룩과 위엄과 영광과 권능과 공의는 그들을 두려움과 공포로 떨게 했습니다. 그 두려운 광경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떨며 서 있던 백성들은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19)라고 간청했으며, 이에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이와 같이 그분의 거룩성이 요구하는 의로운 규율들을 계시한 율법 수여 장면에서 여호와께서는 멀리 떨어져, 흑암 속에 거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대목을 그리스도인의 예배 대상에 관한 그리스도의 계시와 비교해 봅시다. 예배 대상은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시내 산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셨는데 이는 하나님은 속성상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과거에도 항상 그랬듯이 현재에도 동일하게 거룩하고 의롭고 공의로우시며 미래에도 변함없이 그러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사랑하는 아들에 의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아버지로 계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다정한 친근함, 섬세한 친밀함, 편안한 정감, 따뜻한 연정, 부드러운 돌봄, 지속적인 사랑, 깊은 동정, 무한한 용서 및 다함없는 은혜를 내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워싼 흑암의 구름 속에서 나와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권속으로 태어난 모든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를 펼쳐 보였습니다( 1:20).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과 공의와 진리를 드러냈습니다( 20:1-17). 그러나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그분의 자비를 조금도 얻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찬 그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자가, 자신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 아버지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다함 없으신 온정과 그 진실하심으로

만물을 감찰하시며

당신을 감찰하시는 눈길로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부드럽게 다가오시는 그분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3) 예배하는 자의 신분에 대하여

우리가 예배드리는 애상이 아버지로 계시된 하나님이시므로, 논리적으로, 그분과 살아있고, 생동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된 자들만이 그분을 그렇게 부르며 그분께 예배도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혈통에 의한 아론의 자손들뿐이었습니다.

반면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제사장 나라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중생에 의한 하나님의 자녀들뿐입니다(벧전 2:5, 1:5,6). 이것이 중생이 왜 그토록 필수적인 일인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성령의 중생케 하는 능력에 의해 신자는 신의 속성에 참예한 자가 되며, 하나님의 권속으로 태어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기쁨과 찬양 속에 이렇게 감격해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하셨는고”(요일 3:1, 벧후 1:4).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고 그분을 예배하고자 원치도 않습니다. 그는 그 옛날 니고데모처럼 자연적으로 종교적인 성향을 소유할 수도 있고 상당한 수준의 도덕성과 경건함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3:3). 이스라엘의 경우와 같은 지상 백성의 국가적인 예배는 더 이상 유효치 않습니다. 이제 유효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하늘 백성들의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3:22).

 

(4) 예배의 성격에 대하여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드려져야 합니다(24). 다시 말해서 예배는 영적이고 정직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예배는 대체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특징 지워졌었습니다. 그것은 주로 질병과 썩음과 죽음에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인간 제사장의 중재를 통한 짐승 제물의 제사로 이뤄졌습니다. 이것이 이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거룩한 대제사장의 중개를 통한 영적인 예배로 대치되었습니다( 7:23-27, 10:14).

의미심장하게도 우리 주님에 대한 거짓된 재판석상에서 매우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바 있습니다. 실패로 특징 지워졌던 지나간 옛 시대의 마지막 대제사장이 실패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다가오는 새 시대의 위대한 대제사장의 눈을 응시하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과 그 결과를 주목해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본질적이고 영원한 신성에 대한 쉽고도 분명한 우리 주님의 선포에 대해 대제사장은 그의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라고 외쳤습니다( 26:57-68). 여기서 가야바는 그의 옷을 찢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범했습니다. 비록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 행동을 통해 그는 자신이 가진 직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에 대해 분명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21:10, 10:6, 39:23).

우리는 앞서, 훌륭한 의식과 다양한 제물을 관장하던 아론 계통의 제사장직이 십자가에서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찢겨진 성소의 휘장이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과거에는 인간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격리시켰던 담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폐해졌습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9:26).

이 사실을 보나(Bonar)는 다음과 같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피도 제사도 필요없으니

희생 제사가 끝이 났네!

불꽃도 연기도 피어오르지 않으니

더 이상 어린 양이 죽임을 당치 않게 되었네.

하지만 한결 값진 피가 한결 고결한 혈관에서 나왔으니

이는 영혼을 주홍같은 죄의 얼룩에서

정결케 하기 위함이네.

 

더 이상 예배는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유대인의 피의 제단 위에서 죽임을 당키 위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양과 암송아지 및 황소의 행렬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것을 권고 받습니다(벧전 2:5).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아론의 자손이나 다른 누구의 자손의 중개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며 그리스도만이 홀로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복스런 인격과 사역의 모든 미덕과 가치 가운데서, 구속받은 백성의 신령한 예배를 자기 아버지께 드리고 계십니다.

오늘날 소위 공중 예배라 불리우는 많은 예배들이 단지 기독교화된 유대교의 형태를 취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엷게 가리워진 이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계에 만연된 성직자 제도와 유대교의 의식을 한번 비교해 보면 누구나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유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교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를 배타적으로 주관하는 구별된 성직자 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계에는 인위적인 제사장직이,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배 의식에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돼 있습니다. 또한 유대교의 제사장들이 구별된 옷을 입었듯이 목사 역시 그러합니다.

또한 유대교가 지상의 성소나 건물을 중시했듯이 기독교계도 특정한 예배 장소를 중시하며, 그 건물을 교회라고 잘못 일컬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소유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는 그 화려한 건물 안에, 그 앞에 촛불이 타오르고 향이 드려지며, 많은 경우에 그 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간주되는 성체, 곧 성찬식용 빵이 배설되는 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모든 유대교의 모방이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하등 관계가 없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례를 집행하는 데 없어서든 안될, 특별히 교육받고 임명된 나름대로의 제사장직을 도입했습니다. 이들은 길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별도로 구별된 성소에 나와, 타오르는 촛불과 십자가와 피어오르는 향을 배경으로 피 없는 제단앞에 서서 평신도를 대신해서 예배 의식을 행합니다. 공들여 준비한 예배 절차에 준하여 판에 박힌 기도문과 그에 대한 청중의 응답과 더불어 순조로이, 그리고 매우 기계적으로 예배 의식이 진행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능과 기술로 빛은 조각품과도 같아서 유대주의자들에게는 확실히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우리 주님께서 선포하신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신령한 예배에 대한 가련하고도 비극적인 대체물에 불과합니다.

 

오래 전 알렉산더 히슬로프(Alexander Hislop)두 개의 바벨론이란 제목의 책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의 화려한 의식의 대부분은 고대 바벨론의 우상숭배적인 풍습들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매우 단정적으로 진술한바 있습니다. 본 단락의 주제에 관하여 보다 자세히 연구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여전히 유용할 것입니다.

 

(5) 예배 시기에 대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4:23).

여호와의 절기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예배는 대체로 정해진 상황과 장소에 한정되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예배 의식(意識) 속에는 안식일이라는 날짜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는 더 이상 날과 달과 절기와 해의 문제가 아님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지나간 율법 시대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4:10).

신약성경은 다른 날들보다 한결 엄격한 성결을 요구하는 거룩한날들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안식일, 혹은 일곱째 날은 이스라엘에 속한 날이며 하나님의 민족적인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31:3). 반면에 주의 날, 흑은 그 주의 첫째날은 기독교 시대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정하신 날로써 하나님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취하사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던날을 기념합니다( 118:22-24, 21:42, 12:10).

예배는 더 이상 일주일의 어느 한날, 혹은 하루의 정해진 어느 시간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0 7절에서 일주일의 첫째날에 떡을 떼기 위해 모이는 것이 초대 교회의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발견케 되는데, 그러나 예배는 이 날, 혹은 이 경우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낮과 밤을 막론하고 모든 날 모든 시간에 그의 마음을 열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부와 성자께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예배가 열납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는 특별한 절기를 중시합니다만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에 대해 일절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에 속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 졌습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기독교를 유대교화하고, 은혜와 율법을 혼합함으로써 신자(信者)들을 혼란케 하고자 한 당시의 거짓 교사들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포함된 교훈들이 몸에 배일 때까지 이 서신에 친숙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계에서 볼 수 있듯이, 안식일 준수 경향을 비롯한, 기독교를 유대교화 시키려는 다른 모든 시도에 대항하는 최선의 처방입니다. 지금은 모든 날이 하나님께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의 날에 주 예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동료 성도들과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입니다만,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예배는 이 날이나 이 경우에, 흑은 일년 중 어느 기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6) 예배의 동력, 혹은 능력에 대해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

우리는 이미 참 예배는 신령한 것이어야 함을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삼위 중 제삼의 위()인 성령의 인도와 통제하에, 그것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그들을 통해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우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31:3, 24:2, 삼상 10:10, 대하 15:1, 11:29 ).

한편 신약성경에서 우리 주님은, 이미 주님의 제자들 속에 머물고 있었던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7)고 언급하셨는데 이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때 이 후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모든 죄인의 마음 속에는 그 순간 성령이 내주(內住)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날까지 그리스도의 소유로 인침, 혹은 표증을 받게 됩니다( 1:13, 4:30). 이뿐만 아니라 성령은 각 신자들에게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의 성품을 부여해 줍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자를 가르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자 애씁니다( 16:13-15).

따라서 신자가 그의 마음 속에 아무런 탄식함 없이 성령이 편안히 거하도록 할 때, 성령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깊이 사로잡히도록 하여 결국 그에게 주님이 더욱 존귀한 분으로 여겨지게 찬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그에게 성부와 성자께 경건하고 신실하고 지식에 넘친 예배를 드리도록 능력을 부여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에 없어서는 안될 두 가지 필수적인 요건은 우리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한편 개개인의 신자는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슬프게 할 수 있으며, 성도의 모임은 그의 백성들을 통한 그의 활동을 제한함으로써, 혹은 그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성령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4:25-32, 살전 5:19-20). 따라서 신자는 항상 성령 충만한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그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 지고,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5:18).

 

(7)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는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는 말씀 속에 암시돼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하는 자가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현 시대에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자기 자녀들의 예배를 찾고 계십니다. 구원의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선포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9:10). 이러한 갈망이 그분을 십자가에로 이끌었습니다. 반면에 예배의 중요성은,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는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라는 사실 속에 함축돼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영원 속에 거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겸손한 신자를 마음에 두시는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그의 진실된 예배를 진지하게 소망하시며, 그에게서 그것을 찾고 계신다니! 그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그릇 이해될 수 없는 말씀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배제한다면 아마 그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이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모든 신자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입증하기에 족할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자신이 모든 것을 위탁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그 무엇을 드릴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복스러운 일일까요!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계시에 대한 무지에서, 혹은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께서 그들이 아버지께 드리기를 그토록 열렬이 소망하시는 것들을 취하시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결론적인 질문 중 하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3:8)였으며 불행히도 그 대답은 긍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분에게서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한 것처럼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에게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며 또한 마땅히 기대할 권리를 갖고 계신 예배를 제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물가의 여인과의 이 놀라운 대화를 통해 우리 주님은 이러한 예배에 있어서의 혁신적인 변화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 때까지 없었던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깊이 기울이고 우리의 예배가 그분께서 구상하신 설계에 일치하는가, 늘 자신을 살피게 되기를 바랍니다( 7:46). 아울러 하나님은 빛이시므로우리는 진실해야 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은 불이시므로우리는 근신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우리는 참되고 신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두게 되기를 바랍니다(요일 1:5, 4:8, 12:29, 4:24).

 

(1993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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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