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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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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 17:30 횃불/1994년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여

- 윌리암 오어 -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의학적으로 볼 때 일생동안 담배를 피우면서 애연가로 산다 해도(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정상적인 수명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담배에 아무런 해독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담배 속에는 해로운 요소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담배를 피워도 장상적인 수명을 살 수 있다고 한 것은 담배 연기의 해독을 즉시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놀라운 치유력을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여느 사람보다 장애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을 내세워 담배의 필요성을 운운한다 하더라도, 호흡기의 기관지 내에 있는 엷은 막을 담배 연기 속에 있는 갖가지 자극제로 괴롭히고 파괴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 아닙니까? 이것은 변경시킬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간과해서도 안될 사실입니다. 이 독초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느 경우로 보나 애연가보다는 건강하고 더 부유하고 더 행복하다는 것은 대다수의 애연가들이 증언을 서 줄수 있는 타당성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담배는 몸에 해롭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는 현대의 많은 애연가들을 완전한 습관의 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유행이 지나치다보니 요즈음은 청소년들로부터 여성에 이르기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자칭 기독교인들이 또한 담배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담배를 금하지 않고( 4:21~24) 있다고 해서 담배를 변호합니다. 그들은 또 담배 속에 아무런 해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고전 2:19,20). 그렇습니다. 일부는 옳은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담배를 꼬집어서 이를 금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인정합니다(딤전 5:22).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까지도 나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냐?가 문제이겠지요. ,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내맡기라는 것이 신약의 교훈이 아닙니까?( 12:1,2)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 직접 뵈올 때는 우리가 지상에서 최선을 다해 능력껏 주님을 섬겼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보상이 달리 주어진다는 것을 당신은 잊으셨습니까?(고후 5:10).

 

문제는 내가 담배를 피우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담배를 피움으로써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고전 10:31). 담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까?

 

무엇이나-담배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그것이 나의 생활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더 가까이 끌고 가는 것이 아닐 때에는 마땅히(과감히) 멀리 해야 할 것입니다( 5:3~5).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당신 한 사람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담배를 피운다면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그들이 내가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될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담배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된 것이든 간에, 모두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요일 2:16). 담배는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비롯한 그 외의 모든 견제세력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는 사특한 친구들에게 완전히 어울리는 화장품입니다.

도박꾼이나, 술주정뱅이나, 창녀나, 부랑아들은 코로 담배연기를 푹푹 내뿜고 얼굴 표면에 담배진이 흘러내린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울리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담배와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상치되고 있습니다( 5:17~23). 담배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중에나 기도회 같은 데서 피우면 조금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나라에 오늘날 오셔서 담배 피우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앉아있는 것을 보신다면 아마 칭찬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5:48).

 

담배의 진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새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행동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인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체험하면 그가 하는 기도 가운데는 반드시 이 담배로부터 나를 깨끗이 해달라는 기도가 나오게 마련입니다(담배를 원래 피지 않던 사람은 물론 여기서 제외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담배는 옛날의 생활에 속한 것이고 사단의 왕국의 제품이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육적이고(고전 3:1~3)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장성하지 못한 그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성령님께 그의 생활을 부탁하는 영적인(딤전 4:12) 그리스도인은 이 해로운 습관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담배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유해물입니다(고전 3:17). 그리고 이 습관이야말로 중독이 되면 그 피우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요소가 되기 쉽습니다.

담배회사의 터무니 없는 선전에 속지 마십시오. 게시판에 붙어있는 여러가지 미문여구로 과장된 선전은 다 니코친이 묻은 돈으로 사서 붙인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습관은 더러운 것이고, 비열한 것이며 낭비적인 것이며, 유해한 것입니다.

수천만 달라의 돈을 드려서 이 사실을 부인한다 해도 이 엄연한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악취는 계속해서 우리의 코를 찌를 것입니다.

 

만일 당신 자신이 아직도 이 악취나는 괴물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에게도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28:18). 그리고 이후부터는 담배를 일체 입에 대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십시오. 스스로를 중독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활동사진은 정말 재미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를 즐겨 듣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영화에서 움직이는 사진을 통하여 스토리를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를 발명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오늘날도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앉아서 구경하고,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을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과거 역사 속으로 흘러간 과거사를 우리의 눈앞에 재연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정부기관이나, 종교 단체나, 교육기관에서 영화가 지니는 굉장한 가능성을 교육의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확실히 눈으로 본 것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어 있는가 봅니다. 인상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화제를 극장가의 영화로 바꾸게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영화라 할 때는 오락을 위하여 필름을 제작하고 촬영하고 현상해서 시장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산업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상업을 우리는 단호히 정죄할 뿐입니다. 일반 대중에게 선을 위한 강력한 힘으로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기회를 외면하고 그 강력한 힘을 돈과 명성을 위해서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게 시작했던 영화는 무분별하고, 무원칙하고 돈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상업영화는 소위 배우라 부르는 사람들의 연기를 찍어 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상업영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은 지대합니다.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범죄와 사랑과 섹스를 영화의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범죄 영화는 범죄 생활이 무슨 바람직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주인공을 영웅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청소년 범죄를 만들어내는 학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사랑은 불의하고 음탕하고 육욕적인 것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고전 13:4~7). 툭하면 담배를 피우는 장면(남녀를 가리지 않고)이 나오고,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반나체와 부도덕한 모습으로 가득한 침실장면이 화면에 범람합니다.

하나님, 성스러운 예식, 교회, 결혼, 정직한 생활같은 것은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이 추잡한 행위를 지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5:18~21)

영화가 매력적이고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화려한 치장이나 의상, 우울을 가리고 등장하는 명랑, 모두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끌만합니다. 따라서 많은 십대청소년들이 영화에 반하고 광적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동하는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고( 6:8) 영적인 생활이 약화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상업영화는(요일 2:15~17) 치명 적인 바이러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면 그는 결코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죄가 따라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과( 12:1,2) 영화를 구경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여행기록영화나 교육영화, 가정영화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 이런 영화는 무방합니다. 결코 활동사진을 발명한 데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은 양심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한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영화 가운데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직접 그리스도인 배우를 등장시켜 제작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영화는 그리스도인이 지지하고 권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어떤 영화에 대하여 확신이 가지 않을 때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구하십시오( 1:5).

 

좋은 영화, 역사영화, 추천된 영화는 어떻습니까?” 영화 중에 내용상으로 반대할만한 요소가 없는 좋은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혹 좋은 영화가 시중 극장에서 상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화는 보통 달갑지 않는 영화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나오는 것이 상례입니다. 어떤 영화는 내용이 괜찮지만 추잡한 영화나 범죄 영화에 나오는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좋은 영화를 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속속들이 썩은 영화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좋은 영화라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영화에 대하여 가책같은 것을 느껴 극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낚시 밥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렇게 하여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끊어버릴 수 없는 영화벽을 형성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최선의 안전한 방법은( 4:8) 극장출입뿐만 아니라 안방극장도 삼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1:21), 당신 스스로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5:16) 그렇게 한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영화나 연극을 보는데서 얻는 일시적인 쾌락이나 재미 대신에 만족과 축복으로 갚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1994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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