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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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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3. 10:45 횃불/1994년

영국을 다녀와서(3)

 

1. 스코틀랜드 언약자들의 수난사

이천여년의 교회 역사상 유례없는 17세기의 피비린내 나는 대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1:3) 힘써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용감히 그리고 기꺼이 숭고하게 죽어간 스코틀랜드 비국교회 언약자들, 곧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받은 박해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으며, 또 그러한 가혹한 박해를 어떻게 받았고, 또 그들이 남긴 선한 증거들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나게 되는지 그 영적 배경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서 지나간 교회의 역사와 오늘날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포함한 기독교계의 현실을 바로 읽는 영적 안목을 계발해 보고자 한다.

17세기의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된(1633~1688) 대 박해는 스코틀랜드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믿음의 용사와 순교자들을 배출한 세기로 기록되고 있다. 이 기간에 일만 팔천 여명의 성도들이 굶주림과 고문과, 또 추방이나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11:38). 그러다가 잡히면 현장에서 목베임과 양팔과 양다리를 잘리우는 가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어 산들은 온통 순교자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당시 순교자들 중의 한 분인 제임스 거트리의 수난의 삶을 살펴봄으로 당시의 언약자들이 일반으로 받은 수난과 또 그들이 그 수난 속에서 나타낸 믿음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엿보기로 하자.

 

제임스 거트리(James Guthrie)

거트리는 언약자들 가운데 불굴의 사나이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키는 삭개오처럼 작았지만 그의 믿음은 다윗과 같이 커서 세상의 거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청교도인 크롬웰과 교분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크롬웰은 후에 거트리를 가리켜 머리를 숙이지 않는 키가 작은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조그마한 타협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와 스코틀랜드 속담을 인용해서 조금만 타협할 것을 권유했을 때 거트리는 대답하기를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타협은 금물일세라고 했다. 이 불굴의 사나이, 이 후퇴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병사는 그러기에 그가 에딘바라 네더바우 항구 광장의 교수대에 오를 때까지, 또 거기서 목베임을 받아 그 머리를 창에 높이 매달아 일반에게 전시할 때까지 머리를 숙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27년 간이나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해 그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 그는 또 그 성격이 매우 관용적이어서 바나바처럼 권위자라 불리우는 영예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생사간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8)는 성경의 말씀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는 「국민 신앙 서약 헌장」이 승인, 선포되던 1638년도에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그도 그 헌장에 서약의 서명을 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교수대원을 만나게 되자 잠시 약간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긴 했으나 그는 그것을 오히려 예표적인 것으로 보고 담대히 앞으로 걸어나가서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명단에 앞으로 순교할 수천 명의 훌륭한 주님의 존귀한 종들의 이름들이 서명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영광스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늘에 등록된 서약이며 스코틀랜드 전국에서 가장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섬기는 사람이었으며 매사에 신중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진실했으며 참된 경건에서 벗어난 것은 무엇이나 미워했다. 그러기에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왕과 그 신하들에 대해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증한 통치자가 교회의 일에 어느 면으로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주님께서 스코틀랜드에 대해 진노하시는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것이 그가 후에 당국에 의해 반역죄로 선고, 처형을 받게 된 주된 죄목이었다. 그 책은 교수대원에 의해 공중 앞에서 불에 태워 소멸되었지만 그 복사본이라도 소유하는 것은 왕과 왕정에 대한 반역죄로 간주되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주권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또 왕의 신권을 도전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거트리는 1660년 찰스 2세가 왕 위에 복귀한 얼마 후에 체포, 감금되었다가 1년 뒤인 1661 2월에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동년 4월에 그는 소위 「술에 만취한 국회」앞에서 그의 입장을 진술하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진술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나의 주님과 나의 양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낡고 믿을 수 없는 몸, 이 죽을 육체는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육체를 가져다가 죽이든, 추방하든, 감금하든, 기타 어떻게 하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내 피가 무슨 유익이 될 것인지 심사숙고하기를 권할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을 소멸하는 것이 1638년 이후 시작된 언약이나 개혁의 일을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의 파급 효과는 내가 수년 더 살아서 자유로운 몸으로 하는 일을 통해서 보다 나의 피나 나의 구속, 또는 나의 추방당함을 통해 훨씬 더 크게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자 어떤 의원들은 이 사람의 사형을 승인하는데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떠났고, 또 어떤 의원은 그를 사형하기 보다 추방하는 쪽을 택하자고 간곡히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재판관들은 그의 피를 흘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침내 1661년 6월 1 에딘바라 시 십자로에서 교수형에 처하기로 선고를 내렸다. 거트리는 처형을 당한 후 그의 머리는 네더바우 항구 광장에 창에 의해 높이 달려졌고,그의 재산은 다 압류되었다.

거트리는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다음 자기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저 훌륭하신 아가일의 후작보다 더 복이 많아요. 그분은 목베임을 받았지만 나는 나의 구주님처럼 나무에 달려 죽게 되니까요라고 했다.

그의 사랑하는 친구요 하인인 제임스 코위(James Cowie)는 톨부쓰(Tolbooth)에서 그와 함께 생활했었기에 그의 사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제임스 거트리는 분주한 생활 속에도 끊임없이 주님과의 교제를 유지한 결과로 믿은 지 얼마 안된 어린 성도처럼 항상 신선한 즐거움 속에 사셨지요. 그분은 항상 새벽 4면 일어나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트리는 그의 두 자녀인 소피아와 윌리암이 찾아 왔을 때 다섯살 난 윌리암을 무릎에 앉고 이렇게 일렀다. “얘야, 앞으로 애들이 너보고 너의 아버지는 목매달려 죽었다고 놀려 댈거야. 하지만 그때 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 선한 일을 위해 그렇게 된 것이니까 말야.” 후에 어린 소피아와 그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에서 추방되었는데, 더 야만스러운 것은 그 자녀들과 후손들이 영원히 거지가 되어 마땅하다는 저주가 선포된 것이었다. 제임스 거트리와 윌리암 고반(Govan)은 줄에 묶인 채 함께 서서이 걸어 에딘바라 시 십자로가 있는 데까지 왔다. 진리의 두 용사가 다시 한번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거트리는 주교의 지위를 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절한 사람이다. 그는 처형되기 전 그의 최후의 진술을 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왔으며, 그곳에 모인 큰 군중은 그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며 쥐 죽은 듯 조용히 서있었다.

나의 하는 이 말에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나는 이 교수대를 왕의 궁전과 영국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의 주교관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나같이 형편없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사 내 속에 그 아드님을 계시해 주시고, 또 나로 영원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사 황송하옵게도 사단과 세상의 많은 반대 속에서도 적잖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나의 사역을 인쳐주신, 특히 나의 마지막 교구였던 스터얼링(Stilting)의 교인들과 장로들의 마음 속에 나의 사역을 인쳐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 나의 빛, 나의 의, 나의 힘, 나의 구원, 나의 바램의 전부가 되십니다. 그분, 오 그분을 내 목숨을 다해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내 영혼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분을 찬송하라. 주여, 제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옵소서.”

 

거트리는 교수대에 달린 채 그의 얼굴을 덮은 수건을 제치고는 큰 소리로 언약이여! 언약이여! 그것이 스코틀랜드 부흥의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외쳤다고 한다.

옆에 서서 거트리의 처형 광경을 열중하여 바라보던 윌리암 고반은 이렇게 외쳤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저기 달린 저분의 시체를 감히 이렇게 바라다 볼 수 있을까! 또한 저 교수대가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으로 알고 이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

어떤 사람은 교수대에 달린 거트리를 향해 주 예수님을 바라다 보라고 외쳤다. 이에 거트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께서 나를 내려다 보시고 나에게 미소를 짓고 계시는데요.”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11:35~38).

 

2. 그 수난의 이유

17세기에 비국교도들인 개혁교회가 겪은 수난은 무신론자들이나 이교도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의 일파인 성공회에 의해 감행되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즉 기독교의 일파인 성공회가 기독교의 다른 일파인 개혁교회를 박해한 매우 아이러닉한 사건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조금도 아이러닉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누렇다고 다 금이 아닌 것처럼,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7:21),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9:6,7)고 함과 같다( 2:28,29참조).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3:9)고 책망하듯 말했으며, 또 주님께서도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 8:39,40), 또는 하나님의 자녀( 8:42~44)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8:44)라고 하셨던 것이다.

계시록 2 9절에서도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3:9참조)고 일러주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29~31)고 하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독사의 새끼들”( 23:33)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의 형들과 요셉( 7:9), 모세를 거절한 이스라엘 조상과 모세( 7:23~36), 유대교와 그리스도, 이스라엘 공회와 스데반( 7:51~53)의 경우나 신약의 알곡쭉정이”( 3:12), “좋은 씨가라지”( 13:38), “좋은 것못된 것”( 13:48,49), “맏아들둘째 아들”( 21:28~32), “미련한 다섯 처녀슬기로운 다섯 처녀”( 25:1~13), “염소”( 25:31~46), “바리새인과 세리”( 18:9~14), “큰 음녀”( 17:1)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입은 어린양의 아내의 경우가 다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개인(목사, 장로, 집사, 권사, 신학자, 교인 등)이나 단체(교회나 기타 기독교 단체, 선교회, 신학교, 성경학교, 문서, 언론, 방송 매체 등)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 뜻을 널리 알리고자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며, 선교사가 되고, 또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와 성경학교, 선교회 기타 선의의 기독교단체를 세운다 할지라도, 그 개인이나 그 단체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거나 기독교 단체는 아닌 것이다( 8:9, 고후 13:5).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육체를 따라 난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요일 3:10)로 구분했다. 또 사도 바울은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29)라고 하여 교인들 사이와 기독교단체들 사이 간의 갈등과 핍박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질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기독교 단체나 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참된 의미에서 정통적인 교회가 오늘날에는 참된 의미에서 기독 교회 또는 기독 단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천여년 전 주님께서 이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은 우리 주님을 오해하여 배척하여 죽였다. 즉 그들이 그때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과 실제의 하나님은 달랐던 것이다. 마귀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가운데 들어와서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맹인처럼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참 하나님인줄 알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지키도록 강요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폭력을 사용해서 강권하되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예물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례 요한이나 주님은 그들이 참 하나님이 아닌, 거짓 하나님 마귀를 섬기고 있었음을 지적해 주셨던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로마 카톨릭교를 들 수 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교가 중세 천년 동안 오천만명이나 되는 성도들을 죽였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고 마귀가 한일임에 틀림없다. 그 다음으로는 17세기의 성공회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느 개인이나 교회나 단체가 거듭난 성도들을 핍박한다면 그 개인이나 단체나 교회는 육체를 따라 난 자에 속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스스로 마귀에게 속한 자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대적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8:44, 15:18,19, 요일 3:10~15, 2:9). 그렇다.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29).

아벨이 가인에게,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야곱이 에서에게,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모세가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미움과 핍박과 배척을 당한 것처럼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이제도 그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참된 지역 교회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어느 지역 교회에 내부적인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육신과 육신 사이의 갈등이거나 육신과 성령님 사이의 갈등이다.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가 그 좋은 실례가 된다(고전 3:1~4, 5:16~23). 그러므로 어느 사람이 육신을 좇아 행하는지, 아니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갈라디아서 5:19~21에 열거한 일들에 끌리고 있는지, 아니면 갈라디아서 5:22,23에 열거한 미덕에 끌리고 있는지의 여부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교회 역사와 오늘날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포함한 현 기독교계의 현실을 본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지, 아니면 마귀를 좇아 난 것인지, 또는 성령을 좇아 난 것인지, 아니면 육신을 좇아 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5:8, 2:8, 요일 4:6).

 

3. 쇠퇴해가는 스코틀랜드 자유개혁 교회를 보면서

우리가 스코틀랜드를 순회할 때 우리의 마음을 심히 어둡고 무겁게 만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큰 기대를 걸고 찾아간 두 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그 두 곳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와 로버트 맥체인(Robert MeCheyne)이 목회하던 스코틀랜드 북부의 던디(Dundee) 시에 있는「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이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를 찾아간 이유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방문한 선교사들이 거의 다 이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를 통해 파송된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첫째로는 그 고마운 분들을 파송한 그 성서공회가 어떠한 곳인지 찾아가 보고 싶었고, 두번째로는 그 선교사들에 대한 사료(史料)를 구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외부로 나타난 그 성서공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즉 그들의 사무실에 나타난 활동모습이며, 분위기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모습 등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좋은 면에서 감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에 대한 자료도 전혀 또는 별로 구비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우리나라의 신약성경을 최초로 번역한(1887) 쟌 라쓰(John Ross) 선교사에 대한 사료만을 조금 얻어가지고 올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여기긴 했지만 그러나 무언가 하나님의 등불이 꺼져가는 듯한 허전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 자유교회가 17세기의 무서운 박해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준 저 거룩한 언약자들의 후예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했다.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로버트 맥체인(이분의 전기가 우리나라어로 번역되었음)이 시무하던 교회였는데, 이는 로버트 맥체인이 비록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에서의 주님의 사역을 끝내고 주님께로 간 사람이긴 했지만 지난 세기에 스코틀랜드 전국에 영적 부흥의 선풍을 일으킬 만큼 신령한 기도의 사람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이분의 영적 삶에서 무언가 더 얻어보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당은 석조건물로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내부의 좌석도 일천여 석이나 되는 빨간 카펫이 깔린 매우 깨끗한 큰 교회당이었다. 그 교회에 삼년 전에 부임한 젊은 목사의 말에 의하면, 그가 삼년 전 처음 그 교회에 부임했을 때 기도회에 나온 교인의 수는 두, 세사람 뿐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수요 집회에 약 삼십여명, 주일에는 육십여명 정도가 모인다고 했다.

본당 아래 층에는 친교실이 있었는데 그 친교실은 마치 어느 가정의 사용하지 않는 방처럼 어질러져 있었으며 친교실 전면에 옛날 저 위대한 하나님의 종 맥체인이 사용했던 강대상이 놓여 있었고 또 그 앞 벽 왼쪽에는 윌리암 번팅(William Bunting)의 사진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맥체인의 사진이 그 어질러진 친교실을 바라다보는 듯 외로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친교실 한 쪽에는 맥체인이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하며 대기하던 기도실이 있었다. 그 기도실이야말로 옛날에 맥체인이 자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던 곳이었을 텐데 그곳 역시도 지금은 사람의 손이 별로 가지 않는 창고처럼 부산하게 어질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회당 앞 뜰은 교회 공동묘지로 사용하는 듯 보였는데 그곳 역시도 임자없는 묘지처럼 보였다. 특수하게 꾸며놓은 맥체인의 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모든 정황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할 사이도 없이 두렵고 떨리는 경고를 받았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 교회들의 장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24:30~32).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31).

 

(1994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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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