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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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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4. 14:48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1)-기초 공사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조오지 와싱턴은 미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받고 국회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을 큰 영예로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으로 생각할 때 몹시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역량과 경험으로 과연 이 방대하고도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저라는 사람은 이 영예로운 명령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필자 자신도 이 훌륭한 선배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과 가정에 관한 일련의 기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대담한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아직 양육해야 할 가족이 있는데다 은혼식(銀婚式 -결혼한 지 25년째에 행하는 결혼 기념식)도 치러보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위험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자도 이 기사를 기고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필요는 상존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독자들은 본서가 자녀 양육과 완전한 결혼생활에 관한 입문서는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 본서는 필자 개인과 필자 가정의 승리하는 생활에 입각하여 기록된 통찰력 넘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본서는 단지 가족 간에 실천되어야 할 성경적인 모범의 원칙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만약 어떤 흠이 필자에게 있다면 그 기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본서가 현세로부터 동떨어진 이상주의자의 상상일 따름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이상(理想)이 어떠한 이상주의자의 장상보다도 훨씬 더 높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누가 우리에게, 그러한 성경의 원칙들을 충분히 경험하여 축복을 받아보았느냐고 도전한다면 필자는 이렇게 간단히 반문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모든 기쁨과 축복을 온전히 다 누려본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빌립보서 3장의 바울처럼 우리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목표를 향하여 부단히 좇아갈 따름입니다.

본서의 첫 논제로는 연애기간을 살펴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연애기간은 연애(교제) → 결혼 →가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고려함에 있어서 첫번째 사건일 뿐만 아니라 후속되는 사건들의 밑바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

혹자는 연애기간에 관한 기사가 창작의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연애기간에 관하여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동양의 결혼은 정교한 사업처럼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보기만 하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원칙들과 모범들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연애기간에 대하여 우리의 젊은 신자들이 어떤 문제들을 겪는지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그들의 걱정거리를 몇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젊은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는 실패와 당황입니다.  우리는 십대나 이십대쯤 겪었던 우리의 실수에 대하여 편치 않은 상처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 모임(지역교회)들은 다른 통신망을 구비한 소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스톤의 소문은 토론토와 뱅쿠버, 와싱턴을 거쳐 신속하고 정확하게 되돌아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이 됩니다.  한편이 다른 편을 거절했다는 소식은 금새 알려지며, 교제의 중단은 공적(公的)인 실패라는, 영적 희생을 추가시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으로 알고교제를 시작했다가 중도에서 결별을 선언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연장자인 신자들은 소문을 퍼뜨리는 일에 신중을 기하여 한담을 더욱 절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수많은 감정과 당혹감을 틀림없이 예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은 서로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 아는 것이 좋을까요? 교제를 나누지 않고서 상대방의 성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금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실제보다 더 확대 해석되기 일쑤이며, 함께 대화라도 나누면 곧 결혼할 것으로 오해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은 경솔하다는 오명을 두려워한 나머지, 관심을 나타내 보이려 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항들이 우리의 젊은이들이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점 들인데도 그 해답을 도식화해내기란 문제만큼 쉽지 않습니다. 뒤이어지는 내용에 대하여 만인이 다 만족하지는 않겠지만 계속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와 맥락을 같이하는 실제적인 문제 중 하나는 누구든지 결혼을 해야 할까?”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해서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순위

최근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훌륭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애 가운데서 내려야 할 결정 중에 결혼이 두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그처럼 주관적인 성격을 띠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결정을 내리는 일에 관하여 저술된 좋은 규범이나 분명한 지침서를 모두 원합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새로운 가르침이 복음적인 단체 가운데에 대두되었는데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특정적인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일반적인 지침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을 알기 쉬운 일상용어로 옮기자면, 성경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바는 주 안에서 믿는 자와 결혼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어떤 대상이든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적인 문제에 관하여 주님의 뜻을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의 말은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응답을 받으려고 여러 시간이나 여러 날, 여러 주일, 심지어 여러 해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에게 마치 무거운 짐을 벗겨주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설혹 위의 말이 영적인 신경안정제처럼 들릴지라도 실상은 영적인 축복 탈취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많은 목적을 이루도록 기여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갈구하던 경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실제로 표현하시던 때와 같이 소중한 것이었다고 기쁘게 증언합니다. 육신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연단의 과정, 곧 기다림은 우리로 하여금 우선순위에 주력하도록 만들 때가 종종 있으며, 이것은 이 부분의 소제목인 우선순위문제에 대하여 부분적인 해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혼 문제를 주관적인 성격을 띠도록 만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더욱 그분께 의탁하며, 그 중요한 영역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살펴서 우선순위를 따르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적

연애기간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은 세련된 사람들에게 좀 천진난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의 질문을 본서에서 다루도록 용납하시고 여러분도 그 중요성을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데이트는 결코 세상적인 성격을 띠지 말아야 합니다. 연애기간은 결혼을 전제로 가져야 합니다. , 두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 두 사람 전체가 온 생애 동안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저 재미로 데이트를 하겠다는 생각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결코 자리를 잡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이란 너무나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오류에 빠지지 않고 정확한 대상에게로 인도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빨리 기도해야 합니다. 연애의 감 정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 늦습니다. 열애라는 편향(偏向)이 추가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설혹 그저 친구로서 교제한다고 공언했을지라도 끝에 가서는 대개 한 쪽이 상처를 받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모든 연애기간은 상대방이 과연 하나님이 정하신 일생의 반려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가져야 합니다.

 

모범

그러면 우리는 생애의 이처럼 중요한 단계에 관하여 안내를 받기 위해 성경에서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성구사전에서는 연애기간이나 데이트에 관하여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탐구하려면 창세기의 처음 세 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상일 것입니다. 창세기 2 2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 여러분은 이 최초의 연애기간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어떻게 표현하시는지 주목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표현입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아담에게는 충분한 상식이 있었고 이브도 역시, 그 당시에는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두 사람은 서로 배필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었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상면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의 첫 부분에 기록된 이 교훈이 우리에게 무익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생()의 필수 불가결한 이 단계에 관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실 목적으로 그것을 다로 거기에 기록해 두신 것이 아닐까요?

필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지라도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현재 어떤 대상과 교제 중에 있다면 두 사람을 상면케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기에 기동연습이나 불장난 따위가 어느 정도 섞여 있습니까? 그것은 화장품으로 치장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까?

여러분의 결혼을 안정시키고, 이 결혼으로부터 얻어진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여러분을 상면시키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확신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나중에 자녀들이 구원받지 않고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연애기간의 실패를 자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 말이 자녀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곧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신들의 잘못된 결혼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고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에 부르짖을 수 없다고 하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나의 결혼과 그 열매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음을 알면 하나님께 큰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를 조금 더 읽어가면서 저 유명한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를 상고해 봅시다. 혹자는 반론하기를 그 이야기 속에는 연애기간에 관한 것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중매에 의해 이루어진 원거리 약혼이었으며, 이삭은 그녀를 약혼 전에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방법의 미덕을 칭찬할 독자들이 있긴 하겠지만 여하간 그것은 우리의 문화에는 낯선 방법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종은 자기 주인의 아들에게 적합한 여자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족속과 고향에 관하여 아브라함은 분명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인과 주님 안에서의 결혼에 관계된 하나님의 일반적인 지침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그 종은 추가적인 표적(標的)을 구했는데, 즉 그녀가 만일 자기 약대들에게도 물을 제공한다면 이삭의 배우자가 될 사람으로 알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왜 이런 표적을 요구했을까요? 그것은 그저 변덕의 일종이었을까요? 아니면 비상한 표적을 주어 보라고 그냥 한번 요구해 본 것일까요?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은 단지 외적인 아름다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품의 표현이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소녀가 약대들에게 물을 길어다 주는 작업을 실행한 것은 접대, 친절, 사려깊음, 자원함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자기 주인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가 지녀야 할 훌륭한 성품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리브가가 외적인 매력이 아닌, 내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한가지 사례를 더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모압 여인 룻은 모두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시모 나오미는 그녀보고 모압으로 돌아가 거기서 새 남편을 찾아보라고 권했습니다. 모압 여인에게 있어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남편을 새로 얻을 가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룻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시모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요행이나 바라는, 그런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댓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베들레헴으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제 이 참신한 옛 사랑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아스는 어떻게 룻에 관하여 알게 되었을까요? 첫 상봉과 첫 인상은 밭에서 일하는 그녀의 열심을 통해서 형성되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젊은이들 가운데서 일하는 그녀를 관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녀의 근면성을 관찰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추수 책임을 진 자기 종에게도 룻에 관한 의견을 들어 보았습니다. 룻이 현숙한 여인이라는 사실은 온 성읍에 금새 알려졌습니다( 3:11). 이 정도만으로도 이미 제기 한 질문에 대하여 부분적인 답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젊은이들의 단체활동은 첫 인상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물론 이 첫인상은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하겠지만 시작임에는 분명하며, 이 일시적인 관찰에 의해서 많은 대상들을 배우자의 목록에서 제외시켜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 보아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룻에 관하여 문의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더 장성한 성도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호감이 가는 대상의 친구들에게로만 가서 문의 한다면 공정한 조언을 얻지 못할 수도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공정한 조언을 구하십시오. 모사(謀士)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는 법입니다( 11:14).

그 이야기의 말미는 룻이 보아스의 집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습니까? 보아스를 쫓아다니거나 혹은 잘 보이는수법을 써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었으며, 이런 그녀를 보아스의 밭과 가정과 장래로 이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젊은 남녀들은 이 점으로 큰 격려를 삼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젊은 남녀가 상면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정하실 수 있습니다. 

룻은 교훈 하나를 더 배워야 했는데 그것은 인내였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내 딸아····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조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필자의 육()도 여러분의 육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은 온전해질 것입니다.

이 말은 너무 단순하고 구식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생()의 동반자로 신뢰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이 적극적으로 짝을 찾아 나서야 할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뢰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두번째로 좋은 것을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설사 여러분이 원하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두번째로 좋은 생의 반려자는 아닐 것입니다(즉 내가 원하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가장 좋은 배우자를 주신다는 뜻임 -역주)!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을 표명한다면 이 관심을 하나님이 더욱 분명하게 인도해 주시도록 함께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서로 편지를 쓰는 것은 두 사람의 작문 능력 이상의 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편지 교환의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는 한낱 이상(理想)일 뿐 현실적이지는 못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원칙을 실현하도록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해 산보를 함께 간다든지, 식사를 함께 한다든지 기타 다른 방법을 사용해 보는 것도 상대방의 관심사를 알아내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이 때에도 정직이 두 사람 사이에 필수적입니다. 그래야만 한 쪽이 본의 아니게 불친절한 대우를 일방적으로 받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연애기간은 두 사람의 장래를 위한 기초작업 기간입니다. 결혼에 이를 때까지 여러분의 교 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원칙들은 결혼 후에도 일반적으로 달라지지 않고 계속 여러분의 결혼생활을 근본적으로 지배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사항들이 특정한 어느 소집단의 원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처한 주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위의 방법 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의 원칙들은 하나님의 원칙들로서 만일 실천되기만 한다면 실수와 비극으로 인한 감정의 손상을 경험하지 않고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필자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충고를 말씀드려오던 것을 잠시 중단하고 더 장성한 신자들에게 잠시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를 너그러이 관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항들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종종 감당해야 하는 중매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올바로 잘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도 지금 당황하는 빛을 얼굴에 띠고 그 일에 자신이 없다는 말을 입술로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생의 반려자를 찾는 일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일을 담당하는 우리도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결

어떤 말을 쓰는 것이 바울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유익하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3:1). 여러분의 교제에 요구되는 도덕적 순결에 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필자의 말을 잠시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성경에 풍성한 사례들이 나와 있습니다. 리브가의 면박, 룻의 처신, 마리아의 수태에 대한 요셉의 처음 배려. 심지어 악한 소돔에 살던 롯조차 자기 딸들의 도덕적인 순결을 유지시켰었습니다. 그 딸들은 결혼 전에 처녀들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지면 의무적으로 결혼해야 한다는 구약성경의 율법에 비추어( 22:28,29) 신약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상의 원칙들은 형제 자매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 원칙들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에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과 이상(理想)이 높을지라도 여러분이 그것에 도달하려고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1995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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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